[Opinion] 2021 서울국제작가축제: 한강, 훈자(2012) [문학]

2021 서울국제작가축제 참가작 리뷰
글 입력 2021.10.0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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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훈자>, <<노랑무늬 영원>>, 문학과지성사, 2012.

위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해주세요.

 

 
 

'채식주의'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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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기회로 2021 서울국제작가축제의 서포터즈로 활동하게 되었다. 예비 국어국문학도였던 고등학생 시절 꽤 존경했던 단체인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주최하는 행사라고 하여 더욱 의미가 깊다. 당시 나는 <소년이 온다>에 꽂혀 있었기에 한강 작가의 팬으로서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가겠노라고 여기저기 떵떵거렸던 기억이 난다. 축제의 타임 테이블을 보면서 개막식 소개 옆에 '한강'이라는 두 글자를 보고 눈이 번쩍 뜨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직 개막식이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한강 작가가 참가작품을 냈다고 하여 냉큼 전자책으로 읽어 봤다. 그가 이번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출품한 작품은 <훈자>로, 짧은 단편 소설이다. 문학과지성사에서 2012년 발행한 <<노랑무늬 영원>>에 실린 글이다. 팬이라곤 했지만 기실 아는 것은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 뿐이었으므로 기대감보다는 호기심을 바탕으로 작품을 열어봤다. 그리고 읽는 내내 작품 전반에서 "한강 냄새"가 난다는 생각을 아주 많이 했다.

 

한강 작가의 책은 어렵다. 그것은 현학적인 단어를 사용해서도, 문장력이 떨어져서도 아니다. 다만 장면을 묘사하는 족족 한국인의 정서로는 쉬이 떠올릴 수 없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그려내기 때문이다. 편집증적인 문체에 면역이 없는 우리는 문장을 한참 들여다보아야만 그가 의도한 장면을 재현해낼 수 있다. 또는 정반대로 장면이 너무 적나라하고 생생하기 때문에 버퍼링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일례로 나는 고등학생 때 남자 문학 선생이 수업시간에 <채식주의자>의 섹스 씬을 육성으로 읽어주었을 때 내가 입었던 정신적 상해를 똑똑히 기억한다.)

  

이처럼 한강의 작품에는 읽는 이를 무언가 불편하게 만드는, 상당히 반(反)문명적이며 난해한 세계관이 있다. 그는 문명으로 둘둘 감싸 숨겨둔 인간의 기이한 집착들을 기어코 풀어헤치곤 피가 뚝뚝 흐르는 그것을 독자들에게 먹어보라며 들이민다. 자연히 평화롭고 로맨스적인 문학을 기대했던 독자들은 그것을 먹느니 차라리 '채식주의자'가 되고 말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 세계관이다.

 

 

 

가져본 적 없는 것을 잃다



 

그 여자가 생각하고 싶은 것은

훈자가 아닌 훈자였다. 

훈자가 아닌 훈자를 생각하는 일은 

훈자인 훈자를 생각하는 일보다 

힘이 들거나 거의 불가능했다.

 

- 한강, <훈자> 中 -

 

 

<훈자>는 가져본 적도 없는 유토피아를 잃어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다. 작품 전체에서 이름이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그 여자'는 습관적으로 꿈을 꾸는 사람인데, 직장과 육아에 찌들어 사는 그녀가 꿈꾸는 것이 바로 '훈자'다. '훈자'는 파키스탄의 지역 이름이다. 특유의 아름다움 탓에 세계의 걷고 싶은 길 중 하나로 자주 지명되는 이곳은 지브리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모델이 된 마을이기도 하다.

 

주인공 '그 여자'는 자신의 직장에서 '훈자'에 대한 이야기를 주워들은 뒤로 매일 밤마다 그곳을 인터넷에 검색해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자기 전까지 훈자에 다녀온 사람들의 리뷰와 사진들을 찬찬히 읽어본다. 여기서 인상적인 점은, 정작 자신이 가볼 생각은 해볼 엄두조차 못 낸다는 것이다. 그녀는 만년 시간강사 남편 대신 아이를 키우고 생계를 책임질 '단 한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훈자는 인터넷 속에만 존재하는 유토피아적 성격을 띤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여자'는 직장 동료들과 TV를 보다가 광고 속에서 상품화된 훈자를 목격한다. 한 번 그 순결한 이미지가 부서지자, 그녀의 훈자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디스토피아적인 특성들이 덕지덕지 달라붙는다. '그 여자'에게 훈자는 이제 더 이상 여행 블로그 단골 소재이자 지상낙원이 아니다. 그녀의 꿈에서 훈자는 그저 파키스탄 내전에 휘말린 지역이자 온갖 범죄의 온상으로 등장할 뿐이다.

 

그녀는 변해버린 훈자를 붙들고 한참을 괴로워하다가 자신의 아이가 본인처럼 불가능한 꿈을 꾸기 시작할 때 비로소 훈자의 악몽에서 깨어난다. 교통사고를 당한 자신의 자식이 '변신할 수 있을 줄 알았기에 차를 피하지 않았다'고 변론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훈자를 꿈꾸던 자신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을 바라왔는지를 자각한다.

 

 

내가 안 죽였어, 라고

그 여자는 낮게 중얼거린다.

 

- 한강, <훈자> 中 -

 

 

하지만 선배의 바보스러운 웃음에서, 키우던 병아리가 죽었던 기억에서, 토너가 잔뜩 묻은 손으로 작업을 하며 눈만큼은 높은 곳을 쳐다보았던 기억에서 '그 여자'는 여전히 훈자를 떠올린다. 즉, 때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 그 자체가 훈자로 발현한다. 그리고 그렇게 부활한 훈자는 자신을 잊으려고 분투하는 그녀에게 끈질기게 말을 걸어온다. "나를 혐오해?" 가슴에 묻어버린 꿈의 망령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죄인일 수밖에 없다. '그 여자' 역시도 자신을 찌르는 훈자의 물음에 그저 몰아세우지 말라며 무기력하게 응수할 뿐이다. 그리고 생기를 잃어가는 세상의 수많은 순수함들을 향해 그녀는 중얼거린다. "내가 안 죽였어."

 

 

 

총평


 

몇 년 전 전공 수업 레포트를 준비하며 방민호 교수의 <<문학사의 비평적 탐구>>라는 책을 읽다가 '한강 작가는 이상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취지의 서술을 읽고 감명을 받았던 적이 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대충 <채식주의자>에서 주인공이 새의 날개를 뜯어 놓은 것에서 이상의 <날개>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훈자>에서도 유사한 포인트를 찾을 수 있었기에 흥미로웠다.

 

나는 <훈자>의 '변신'에서 이상의 <날개>를 본다. '날개'를 바라고 "날자꾸나"하고 외치는 <날개>의 주인공과 '스피드 몬스터'를 바라고 자동차 앞에서 눈을 감은 <훈자>의 아이는 그 캐릭터가 매우 닮았다. 불가능한 것을 바라며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언행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저 기호학 예술처럼 보이는 이상의 작품들과 다르게, 한강 작가의 소설은 언제나 피터팬의 잔혹동화같다.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피터팬적 인물/서사를 가져다 놓고 작품 내내 칼로 두드려 팬다.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한 묘사와 함께. 그리고 독자들은 육고기가 되어가는 피터팬을 보며 '채식주의자로 살아야지'하고 결심하게 된다. 글을 막 읽고 난 후의 독자들은 '피터팬처럼 살지 말아야지'의 의미로 금육(禁肉) 선언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게 아니다. 그 결심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먹는 고기들은 사실 피터팬의 살점이었음'을 기억하려는 시도이다.

 

기생충부터 오징어게임, 훈자까지 최근 예술가들이 지향하는 트렌드는 그야말로 '기괴함'인 것 같다. 이 변화가 딱히 반갑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꺼릴 이유도 없기에 차근차근 읽어나가려고 한다.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짓이겨진 본능과 욕망과 이상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이 '기괴함'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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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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