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인생 연기 [사람]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된 글이며, 사실과 큰 관련이 없습니다
글 입력 2021.10.01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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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가 코미디 연극을 한다는 소식은 정말 의외였다. 웃음이 많아 별것 아닌 장면에서도 몇 번씩 NG를 내던 그녀가 코미디라니,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앞으로 세 달간 대학로의 소극장에서 공연한다고 SNS에 글을 올린 그녀는 표를 살 때 자기 이름을 대고 할인을 받으라는 말도 자랑스럽게 적어 두었다. 나는 K의 게시물에 진심을 담아 하트를 누르며, 그녀의 연극이 꼭 잘 되길 빌었다. 그러나 연극을 보러 갈 생각은 없었다. 대학로 감성의 오픈런 연극에 큰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K의 얼굴을 볼 낯짝이 없기 때문이었다.

 

K는 내가 연출했던 영화 <북한산에서 첫차를 타는 사람들>(이하 북첫사)의 주인공이었다. 제목만 거창한 영화를 만드느라 그 당시 주변에 끼친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일정을 맞추느라 근로기준법이 없는 나라처럼 사람들을 굴렸고, 꼴에 영화 찍는답시고 크라우드 펀딩까지 야무지게 받아냈다. 말이 좋아 펀딩이지 지인들의 돈을 좀 더 그럴싸하게 뜯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영화가 수작 근처라도 갔다면 뭐라도 할 말이 있었겠지만, 결과물은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라는 듯 조악했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한 3일을 폐인처럼 보낸 후, 나는 도와준 사람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감사의 연락을 돌렸다. 있으나 마나 한 굿즈를 의리로 사준 사람들에게 한없이 고맙다가도 작품은 언제 보여주냐는 질문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감사의 연락을 돌리다가 문득 제작진과 배우들이 모인 채팅방이 보였다. 촬영이 끝나던 날,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뒤풀이를 꼭 하자는 말을 끝으로 단톡방은 저 밑에 가라앉아 있었다. 곧 저기다가 완성본을 보내야겠지, 그러면 그게 진짜 마지막 카톡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 K의 공연이 시작된 지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북첫사 단톡방에 K의 남자친구를 연기했던 T의 카톡이 올라왔다. 얼핏 보기에 꽤 장문의 글이라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카톡을 읽었다. 너 같은 새끼가 영화 찍는답시고 설치면 안 된다는 내용은 다행히 아니었고, 배우들끼리 K의 연극을 보러 가자는 말이 나왔는데 나를 포함한 제작진도 함께 가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모두가 좋은 생각이라며 반길 때,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당황한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개인적인 제안도 아니었고, 날짜가 정해진 것도 아니라서 거절하기 퍽 어려웠다. 물론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빠질 수야 있겠지만, 제작진들이 감독 없이 가는 것도 좀 그랬다. 이쯤 되니 나를 위한 공개처형의 자리가 아닐까 싶었지만, 판이 깔린 김에 그들과 함께 가는 것이 K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나저러나 죄인이라면 표라도 하나 팔아주는 죄인이 더 낫지 않겠는가. 무슨 일이 생겨도 내 업보겠거니 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나는 사람들과 일정을 맞췄다.

 

*

 

소극장은 마로니에공원 뒤쪽 언덕으로 올라가면 나오는 곳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나는 홀로 배우들을 마주치는 게 두려워 다른 사람들이 올 때까지 근처에서 시간을 보냈다.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적당히 성의 있어 보이는 꽃다발을 사는 동안 촬영감독 B가 도착했다는 카톡을 올렸고, 나는 그제야 공연장으로 향했다.

 

멀리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그들은 내외하는 사이처럼 두 덩이로 나뉘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배우 셋에 스태프 셋.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한껏 반가운 표정을 만들고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부끄럽게도 그들은 나를 아직 감독님이라고 불렀다.

 

-요즘은 작품 안 하세요?

-어…. 따로 하는 건 없고, 일단 학교 다니고 있어요.

 

찰기 없는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다른 사람들이 모두 도착했고, 우리는 예매한 표를 찾으러 지하에 있는 극장으로 향했다. 계단 아래서부터 해묵은 습기가 올라왔다. 물비린내가 나는 작은 로비엔 축 늘어진 상자가 쌓여 있었고, 물기 어린 에어컨은 비 오는 날의 바람처럼 습기를 흩뿌렸다. 바닥을 긁는 철문을 힘주어 열자 작은 무대가 눈에 들어왔다. 최신 가요가 은은하게 들리는 공연장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다들 발밑에 꽃이 하나씩 있는 것을 보아, 연극만 보기 위해 온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딱 맞춰 도착한 탓에 금세 공연이 시작되었고, 누군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알아보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몇 년 전까지 TV에 자주 나왔던 개그맨이었다. 공연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지 않은 탓에 나는 그가 이 극장을 운영하면서 공연을 기획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능숙한 말재간으로 분위기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역시 개그맨 짬은 어디 안 간다고, 누군가 작게 말했다.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빠르게 읊은 그는 대학로 최고의 코미디 연극이 지금 시작된다는 말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거창한 소개와 함께 시작된 공연은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냉동실 가장 뒤쪽에서 꺼낸 것 같은 각본에는 20세기의 성에가 잔뜩 끼어 있었다. 재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유머를 해도 되나 싶었다. 다행히 사람들은 열심히 웃었다. 나도 사람들을 따라 열심히 웃었다. 문득 너는 억지로 웃을 때 입꼬리가 이상하게 올라간다는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K가 나올 때는 연극에서 조금 멀어질 수 있었다. 그녀가 연기를 못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본체를 알기 때문이었다. 아이돌로 데뷔한 절친이 음악방송에 나와 춤추는 걸 보는 기분이랄까. 이외에도 몰입이 안 되는 이유는 또 있었다. 그녀가 코믹한 대사를 뱉을 때마다 웃음이 많은 그녀가 중간에 실수하진 않을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남모르는 사투를 벌이다 보면 중간중간 짧은 암전이 찾아왔다. 나는 그때마다 한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걱정과 달리 그녀는 훌륭하게 코믹 연기를 소화했지만, 위기의 순간은 있었다. 극의 절정에서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과 함께 도망치는 걸 그녀가 돕는 장면이었다. 둘을 쫓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K는 머리를 냅다 풍차처럼 돌리며 춤을 추었다. 관객들은 극장이 떠나가라 웃었지만, 나는 피가 쏠려 얼굴이 벌게진 그녀가 입가에 힘을 주는 것을 보았다.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곧장 무대 옆으로 빠져나갔기에 별다른 일은 없었지만, 나는 오랫동안 그녀의 표정을 생각했다. 그녀는 무슨 기분일까. 그리고 그때는 무슨 기분이었을까.

 

*


컷!

 

오디오 감독 J가 깊은 한숨을 쉬며 하늘 높이 쳐든 마이크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마지막 장면의 9번째 테이크였다. 촬영이 예정보다 훨씬 늦어진 탓에 분위기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 좀 전까지 제법 농담도 주고받던 사람들은 다들 약속이나 한 듯 널브러졌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한 K가 나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모니터링을 시작했다.

 

두 주인공의 끝을 보여주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었다. 그만큼 나의 의도가 최대한 잘 담겼으면 했지만 이번 촬영본도 조금 애매했다. K의 잘못은 아니었다. 내가 어떤 느낌을 원하는지 그녀에게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 탓이었다.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를 꺼내서 보여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상 결단을 내려야 했다. 머리에 안개가 끼는 느낌이었다.

 

-혹시 지금 거 킵하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갈 수 있을까요?

-아 네.

-마지막 대사가 지금은 무의미한 약속처럼 들리는데, 좀 더 모호하게, 어느 쪽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느낌으로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 대사가 어떻게 보면 자기를 그런 식으로 괴롭혀 온 애인에게 같은 방식으로 복수하는 거잖아요. 약간 너도 내 말이 생각날 때마다 불편하고 괴로웠으면 좋겠다는 느낌으로...

-어… 일단 해 볼게요.

-지금 것도 좋으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 그냥 다른 톤으로 한번 해 본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하시면 돼요.

-오케이, 알겠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 비슷한 것은 나의 디렉팅만큼 모호했고, 나는 그게 생각날 때마다 불편하고 괴로웠다. 여기저기서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알바를 시작해야 했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출품했던 영화제에서도 당연히 떨어졌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완성본을 배우들에게 전달할 때는 정말이지 죽고 싶었다.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 이걸 주제로 만든 27분짜리 영화도 있지만 답은 간단하다. 존나 쪽팔리기 때문이다.

 

한창 죽는소리를 하던 나를 위해 새벽까지 술을 마셔 준 친구 Y는 실패를 통해 배운 게 있지 않겠냐며 나를 위로했지만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았다. 전보다 나아지기야 했겠지만 그렇게 넘어가기엔 얄팍한 배움의 대가가 너무나도 컸다. 나만큼, 아니 나보다 성과가 절박한 사람들의 열정은 그렇게 낭비돼도 괜찮은 건가? 나만 믿고 개고생한 사람들 앞에서 결과 대신 의도와 과정을 봐 달라고 뻔뻔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영화 찍으면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도 아무튼 영화 못 잃는 이야기, 무기력한 학식들의 알맹이 없는 사랑 이야기나 하고 있는 내 작품이 한물간 희극인의 시대착오적인 코미디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웃기고, 후배들의 소중한 노동력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그의 연극이 못 알아먹을 소리나 하면서 뭐라도 되는 줄 아는 내 작품보단 세상에 이롭지 않을까. 그런 내가 무슨 자격으로 K의 기분을 헤아리고 있나, 스스로가 조금 역겹다고 생각했다.

 

*

 

두 주인공의 맥락 없는 키스를 끝으로 연극은 막을 내렸다. 발랄한 음악과 함께 배우들이 무대로 다시 올라오자 우리는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힘차게 달려 나온 K가 다시 한번 헤드뱅잉을 하자 관객들은 어느 때보다도 크게 환호했다. 얼굴이 다시 벌게진 그녀는 쨍한 조명을 받으며 우리를 향해 인사했다.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의 의미를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박수를 치던 손바닥이 그녀의 얼굴처럼 빨개질 즈음 배우들의 마지막 인사와 함께 불이 켜졌다. 우리는 천천히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우리는 주차장 구석에 모여 K를 기다렸다. 연극에서 가장 웃겼던 장면을 이야기하며 낄낄대던 우리는 할 말이 떨어지자 다시금 천년의 어색함을 느꼈다. K가 슬슬 나올 때 되지 않았냐는 말을 다섯 번쯤 했을 때, 옷도 갈아입지 않은 그녀가 슬리퍼를 신은 채 뛰어나왔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녀를 반겼다.

 

우리는 그녀에게 4개의 꽃다발을 건넸다. 미리 얘기를 좀 해서 각자 다른 거 살 걸 하는 생각도 잠시, 정돈되지 않은 마음들을 안아 든 그녀가 와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모두가 그녀에게 장난스레 주접을 떨 때, 나는 연극 재밌게 봤다는 짧은 말을 건네면서도 죄지은 사람처럼 뚝딱거렸다. 짧은 대화를 마친 그녀는 다른 배우들과 같이 무대를 정리하다가 잠깐 나온 거라며, 슬슬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함께 사진을 찍고 한 명씩 인사를 나누던 순간, 그녀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나에게 말했다.

 

-저희 다음 작품은 언제 해요?

 

생각지도 못했던, 그러면서도 수십 번을 생각했던 말이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아유, 제가 무슨 염치로 그러겠어요? 제가 진짜 열심히 준비해서 좋은 거 하나 가져올게요? 몇 번이고 생각했던 대답들이 떠올랐지만,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해야죠.라고 답했을 뿐이었다. 정말 진심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나중에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 그녀는 개운하게 돌아섰다. 나는 아래로 가라앉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마도 나는 오랫동안 이 순간을 떠올리며 혼자 부끄러워하겠지. 그런 예감과 함께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던 막연한 이미지가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갔다. 내가 그토록 보여주고 싶었던, 그녀의 인생 연기였다.

 

 

[박호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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