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사주는 MBTI야

글 입력 2021.09.27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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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연씨는 물을 타고났는데 불이 많은 사람이에요.”


태어난 시와 생년월일을 말하고 난 뒤 처음으로 들었던 말은 이거였다.

 

사주팔자는 한자 그대로 네 개의 기둥과 여덟 개의 글자라는 뜻이다. 그 여덟 개의 글자가 네 개의 기둥을 이룬다고 해서 사주팔자라고 부른다. 그 중 ‘자기자신’을 의미하는 글자가 있고 나의 경우 그게 물이었다.

 

어릴 땐 겨울이 좋았다. 사람이 무서웠고 모두가 잠든 고요한 새벽을 사랑했다. 새벽 세시까지 음악만 틀어주는 라디오를 혼자 듣다가 창문 너머의 보름달을 보고는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우울감과 유약한 에너지는 그때의 나를 설명하는 단어였다. 자기주장이 약해 주변에 자주 휩쓸리는 나를 물과 닮았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물을 타고났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런데 불이 많다니. 나는 다혈질도 아닌데. 에너지가 넘치기보단 정적인 편인데. 의아해하는 나에게 그 분은 이렇게 말했다.

 

“불이 많다고 해서 꼭 다혈질에 화가 많고 에너지가 넘치는 것은 아니에요. 불은 시각적인 것과 관련이 있고 불이 많은 사람은 보통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사람들은 꾸준히 뭔갈 하기보단 새로운 것을 찾아 다니는 편이고 현실에는 별로 관심이 없죠.”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나는 미술사를 전공했고 주기적으로 문화생활을 즐긴다. 예술 하는 사람을 동경했고 일이든 취미든 하다가 지겨우면 다른 걸 찾았다. 무언가를 꾸준히 이어나가지 못했던 것도, 비현실적인 것에 몰두했던 것도 어쩌면 내 사주에 불이 많아서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쯤 되자 신뢰가 생겼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내 성향을 꿰뚫고 있었다. 보편적인 특징을 자기만의 특징으로 여기는 바넘 효과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이미 복비를 지불했고 최소한의 신뢰도는 쌓였으므로.

 

 

그 분은 내게 요즘의 고민에 대해 물어봤다. 어떤 것 때문에 찾아왔냐면서. 취준생의 고민이 뭐 별 다를 게 있겠나, 취업이지 뭐. 내 사주를 유심히 보더니 내게 이런 얘길 하셨다.

 

“지금 일 안 하고 있죠? 정규직 같은 회사 일 말이에요. 소연씨는 남들이 사는 대로 사는 건 안 맞아요. 고집이 세서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야 하는 사주거든요. 그래서 일반 회사 보단 아르바이트, 계약직, 프리랜서, 사업 같은 게 더 잘 맞을 거예요. 회사에 못 들어간다는 게 아니라 들어가도 아마 오래 못 견딜 거예요.”

 

거기다 돈을 불규칙하게 벌 거라는 소리에 한숨이 나왔다. 평범하게 살긴 그른 건가,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싶다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정말 그런 삶을 생각하며 살아왔다는 걸.

 

대기업에 들어가는 건 관심 없었다. 그저 한 회사에 들어가 부품처럼 일하고 야근하고 삶의 대부분을 의미 없는 것으로 채우며 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지금까지 지원했던 곳들도 전부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작은 회사들이었다. 진심이 아니면 자기소개서를 쓰지도 못하니까 그랬다. 취업을 위해 맘에 없는 이야기 같은 건 절대 못 한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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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나요?”

 

라는 질문에 나는 “저 그럼 30대에도 계속 이렇게 살게 될까요?”, “건강에 큰 문제는 안 생길까요?”같은 걸 물어봤다. 지금의 고민은 아니지만 미래에 대한 질문들. 아무도 알 수 없는 미래지만 여기서라면 왠지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혼났다.

 

“그런 건 물어보는 게 아니에요.”

 

“사주는 바뀔 수 있어요. 사주를 보는 건 자기 운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함이에요. “회사에서 대인관계가 너무 힘든데 왜 그럴까요.”, “가족들이랑 너무 안 맞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런 고민들의 이유를 사주풀이로 찾는 거죠. 사주는 MBTI같은 거예요. ‘나는 왜 이럴까’라는 자기 부정에서 벗어나 이건 내 팔자구나 받아들이고 내게 더 잘 맞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는데 도움을 주는 거예요. 소연씨가 물어본 건 지금 아무 의미 없어요.”

 

내가 사주를 보기로 했던 이유는 이랬다. 도저히 앞이 안 보이는데 뭐라도 붙잡을 게 있었으면 했다.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누군가가 그럴듯하게 얘기해준 말에, 그게 허황된 말일지라도 최소한 기댈 수 있으니까. 정답을 구하고자 찾아갔지만 정답 같은 건 없었다. 조금 허탈했다. 어떤 노력도 없이 정답만을 기대하고 갔던 마음이 들통나 부끄러웠다.

 

생각해보면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만으로 운명이 정해진다는 것도 억울할 것이다. 그렇다면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열심히 살 이유도 없을 터였다. 사주풀이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답답함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꼈다.

 

*

 

삶에 정답 같은 건 없다는 흔하디 흔한 문장을 곱씹어본다. 이 문장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말을 금세 잊는다. 모든 걸 내 손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진실은 부담스럽기만 하니까, 팔자라는 이름의 운명에 마음을 쉬이 기댄다.

 

MBTI가 유행했던 이유도 어쩌면 스스로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검사결과라는 명확한 타인의 언어로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의 문장은 때로는 자신의 언어보다 더 신빙성 있게 느껴진다.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인식하게 한다. 자기소개서를 쓸 때 MBTI 결과지를 참고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사주는 MBTI라고 했던 그 분의 말도 비슷한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제 사주나 타로 같은 것에 기대지 않을 거다’ 라고 말하진 못하겠다. 주어진 선택지 앞에 막막해질 날들은 앞으로도 계속 찾아올 테니까. 그때가 되면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 만한, 손에 잡힐 무언가를 찾아 다닐 것이다. 그것이 사주든, 심리검사든, 누군가의 말이든 말이다. 그걸로 안심이 된다면 충분하다. 삶은 어차피 어느 정도의 의미부여와 자기합리화는 필수다. 운명은 정해진 삶의 궤도가 아니라 어떤 사건의 나열에 우리가 서사와 의미를 부여한 것이란 걸 기억하면 그만이다. 나의 운명은 내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있고 나로는 도무지 불가능할 어느 순간에, 기대고 싶은 곳에 잠시 기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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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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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 뽀로예
    • 저희 할머니는 제가 자라온 평생동안 사주 이야기를 하시면서, 저의 미래에 대해 어쩌면 단정짓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요. 그러다보니 저도 어느새 사주와 타로에 눈길이 가 그것들에 때로 의지하게 되더라구요. 문득 '아, 이건 삶에 대한 주체적인 태도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오늘 소연님의 글을 읽으니 모든 내용이 참 공감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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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댓글 닫기댓글 (1)
  •  
  • 누베
    • 뽀로예저도 할머니와 엄마의 영향 탓에 샤머니즘을 꽤나 믿는 편인데요, 의지는 하되 완전히 기대지는 않아야겠다 글을 쓰며 다짐했어요. 뭐가 됐던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면 그만이지요 :)

      따뜻한 댓글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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