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150년을 거스른 파리의 시공간 - 코뮌(파리, 1871) [영화]

글 입력 2021.08.27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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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오피니언은 345분 버전을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Go ahead and grab the extension, grab another one

어서 가서 연장 탄창을 챙겨, 하나 더 챙겨

Uncle, cousin, brothers, send glory to all the chosen ones

삼촌, 사촌, 형제들이여, 너의 순수를 없애기로

That will rid you of the innocence

선택받은 이에게 영광을


- XXXTENTACION, 「Riot」

 

 

모든 역사적 사건은 그에 합당한 전후 사정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 모든 사태는 너무나도 뜻밖에, 그리고 뜬금없이 벌어진 어느 한순간을 통해서 방아쇠가 당겨졌다. 프랑스 최초의(그리고 최후의) 공산주의 정권, 파리 코뮌의 탄생이 바로 그러했다.


1870년에 발생한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패전국으로서 불평등 조약을 지켜야 하는 처지로 몰락한다. 당시 '아돌프 티에르'를 위시한 임시 공화정부는 무장해제라는 명목하에 파리에 주둔 중인 국민방위군의 대포 수거를 지시한다. 가뜩이나 무기력하게 떨어진 조국의 위상에 분개한 파리 시민들은 정부군의 무기력한 지시 앞에서 그만 폭발하고야 만다. 프랑스 혁명 이후 무엇 하나 나아진 것 없이 살아온 파리의 프롤레타리아에게 정부의 무능력한 대처는 도화선으로 작용한다. 1871년 3월 18일, 그렇게 혁명의 불꽃이 삽시간에 파리를 점령하기 시작한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로 기록된 파리 코뮌이 올해로 역사 속에서 사라진지 150 주년을 맞았다. 폭발적으로 시작해서 참혹하게 끝이 나버린 코뮌의 굴곡진 역사는 70일이라는 짧은 존속기간에도 불구하고 1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기억될 만큼 세계 역사에 강렬한 충격파를 날렸다. 숱한 시행착오 속에서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목표로 잠시나마 기성 체계를 전복시켰던 야심찬 시도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하지만, 자그마치 3만에 가까운 자국민의 학살이라는 국가적 오점으로 인해, 코뮌의 원혼은 사랑한 조국으로부터 1세기가 넘도록 함구 당하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코뮌COMMUNE이라는 대담한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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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왓킨스' 감독의 <코뮌(파리, 1871)>은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려 은폐되었던 1871년의 어느 파리의 봄을 재현한다. 감독은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란 희망과 함께 새로운 길을 개척하던 그날의 코뮈나르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다시 소환시킨다. 하지만, 평소 자본주의에 부합한 대중 미디어의 일원화(Monoform)를 극도로 반대했던 감독의 의도는 단순한 시대 재현에 그치기를 철저히 거부한다. 영화 <코뮌(파리, 1871>은 역사적 사선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는 것을 넘어, 사건을 둘러싼 하나의 담론을 영상으로 형성한 것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의 프리 프로덕션은 사뭇 대담할 뿐이다. 파리 외곽에 위치한 폐공장을 세트로 활용하며 인위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한정된 공간 내에서 파란만장했던 파리 11구를 묘사한다. 공고를 통해 모집한 200명가량의 아마추어 배우들은 저마다 분석한 내용들을 토대로 인물의 상황에 맞게 공연한다. 관객의 수동적 시선을 무너뜨리는 브레히트적 쇼트들과 이를 담아낸 카메라의 거친 핸드헬드는 흡사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진행한 영상 실험을 연상시킨다. 중간중간 삽입한 자막 쇼트들은 코뮌의 전후 사정을 모르는 관객들을 위한 최대한의 배려로 보일 만큼, 영화는 기존의 서사극에서 보기 힘든 형식들을 적극 차용함으로써 시공간을 초월한 거대 담론을 형성한다.


피터 왓킨스 감독은 결코 파리 코뮌을 찬양하는 논조로 일관하지 않는다. 영화는 여러 프리즘을 통해 파리 코뮌이라는 하나의 탐구 대상을 바라봤을 때의 도출할 수 있는 각기 다른 이미지들의 몽타주다. 그 자체로 존중할 수밖에 없는 그 당시 시민들의 신실한 변화 의지의 산물이며, 일종의 흑역사로 취급하는 현 정권과 대중 미디어의 문제점을 직접적으로 투영한 진실의 거울과 같다. 혹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끝내 극복 못한 현대판 이카루스의 한계를 역사적으로 증명한 안타까운 사례로서 또한 인지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각기 다른 프리즘으로부터 도출 가능한 코뮌의 여러 갈래들을 영화는 공간을 통해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이는 뒤이어 언급할 서로 다른 시간대의 접점 구축과 더불어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차이와 반복을 통한 1세기 전의 공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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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공간적 특징은 피터 왓킨스 감독의 의도를 명확히 반영한 차이와 반복에 기인한다. 시민운동으로부터 촉발된 코뮌의 공간은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노출돼있는 반면, 베르사유 정부는 오로지 아돌프 티에르에게 모든 포커스가 집중된 채 시종 등장한다. 공간의 열림과 닫힘을 통해 기존의 관습이 유지되거나 이를 탈피하려는 양 체제 간 차이를 시각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하지만, 베르사유의 폐쇄적 공간이 상기시키는 보수 주의는 야속하게도 파리 코뮌에 또한 반복된다. 영화 속 공간은 철저히 1871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향한 감독의 양가적 시선이 공존한다.


기존의 체제에 항거하며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 탄생한 코뮌 정부의 정책 방향은 단연 이전과 완전히 다른 급진적 태도를 지지한다.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 바로 여권 신장의 적극적인 움직임이다.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던 왕정 체제와 달리,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는 희망은 여성의 투표권 부여를 통해 더욱 고취된다. 하지만, 그 이상의 기대에 상응하지 못한 코뮌 정부의 보수적인 면모는 개입의 여지가 전무하며, 대중으로부터 차단된 폐쇄적 공간들을 통해 노골적으로 묘사된다.


코뮌 정부의 수립 과정에서 많은 여성들이 기여 한 만큼, 새로운 자치 정부를 향한 파리 여성들의 기대는 엄청났다. 이제껏 여성으로서 핍박받는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국민군에 스스로 자원할 만큼 파리의 여인들을 열정적인 코뮈나르로 이끌었다. 하지만, 코뮌 정부를 움직이지는 소위원회 그 어디에서도 여성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그들의 열정을 되려 조소와 조롱으로 화답하는 이들까지 존재한다("여성이 전쟁에서 무엇을 할 수 있죠?").

 

점입가경으로, 코뮌의 첫 여성 위원회 개최를 위한 모임 공간을 위원회 측으로부터 약속받은 여성들이 위원회를 찾는다. 하지만, 그녀들을 위한 모임 공간 '따위'에는 전혀 관심도 없다는 투로 평의회 일원들은 오로지 자기 할 일만 집중한다(그 과정에서 폭탄 돌리듯 다른 부서로 일을 떠넘기는 직원들의 모습이 가관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들이 간신히 얻은 공간 허물어져가는, 심지어 이용시간까지 정해진 조그마한 시청 창고뿐이다.


피터 왓킨스 감독의 설계가 탄생시킨 영화 속 공간은 코뮌의 표리부동한 행보를 거리낌 없이 지적하는 대목과 동시에, 100년이 훨씬 지난 코뮌의 공간을 현재와 밀접하게 연결시키는 접점 역할까지 수행한다.

 

위원회 관계자 이외에 법안 통과 과정을 지켜보지 못하는 시민들의 아쉬움은, 오로지 소수에 의해서 다수가 영향받을 결정들이 은밀하게 진행하는 베르사유 정부의 모습과 맥을 함께한다. 이 같은 소수의 권력자를 위한 공간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대중이 모르게 암암리에 뿌리 잡고 있다. 반면, 권력에 소외된 절대다수를 위한 공간은 아직까지도 부재중이다. 차이와 반복을 통한 '피터 왓킨스' 감독의 실험은 그렇게 1세기가 넘는 세월을 초월한 공간의 공유 가능성을 입증한다.

 

 

 

고증 파괴로부터 포착된 코뮌의 동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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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 dont les médias ont particulièrement peur, 

미디어들이 특히 꺼려 했던 건,

est de voir le petit homme du petit écran 

작은 네모 상자 속의 등장하는 인물이

remplacé par une multitude de gens - par le public...  

군중으로 대치되어 공개된다는 점이었으리라...

 

- <코뮌(파리, 1871)> 중에서

 

 

자유와 평등을 주창한 파리 코뮌의 정신은 모두가 평등하게 배부를 수 있는 사회를 목표로 이제껏 시도되지 않았던 정책들을 도입한다. 시민 대표로 선정된 평의회를 중심으로 총 10개 부문의 소위원회들을 구축함으로써 평등 정신에 입각한 정책 활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시민들에 의해 점거된 파리 시청을 뒤로한 채 베르사유에 임시 거처를 마련한 아돌프 티에르의 프랑스 정부는 혼란과 무질서를 야기했다는 명목과 함께 국영 언론을 통해 자치 정부를 향한 마타도어를 주도한다. 정부의 선동에 맞서기 위해 코뮌 역시 코뮌의 정당한 취지와 정책들을 전달할 수 있는 자신들만의 언론 매체를 새로이 구축한다. 여기서 두 체제가 주도적으로 활용하는 언론 매체는 다름 아닌 TV다.


고증 파괴나 다름없는 TV의 존재는 사실상 전혀 다른 시공간을 이어주는 매개체다. 국영 언론의 코뮌 비판적 기사에 맞서 새롭게 창설한 코뮌 TV의 리포터들은 코뮌 정부의 행보를 함께하며 행정 지침이 형성되는 과정들을 취재한다. 현장에서 즉석으로 진행되는 시민들의 인터뷰는 얼핏 그 시대 시민들의 의견을 물어보는 듯하면서도, (제작 시점 기준) 1999년의 어느 파리 시민의 인터뷰를 보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바리케이드 시퀀스에서 코뮌 TV는 정부군에 저항하는 시민들에게 시기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질문("오늘날엔 어쩔 겁니까?")을 건넨다. 저항의식에 투철한 1871년의 시민들을 순식간에 현재로 회귀시켜버린 코뮌 TV의 인터뷰는 아무렇지 않게 하나의 쇼트에 서로 다른 시간대가 존재하는 동시성을 발휘한다(이들의 답변 과정 가운데 과거 2차 세계대전에서 있었던 일, 혹은 68 혁명 당시의 일화들을 아무렇지 않게 꺼낸다).


과거와 현재의 괴리를 순식간에 메꾸는 TV의 역할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일원화된 시선에서 벗어나려는 감독의 의도로부터 전적으로 기인한다. 이 같은 의도를 대놓고 드러내기라도 하듯, 코뮌의 앞날을 토론하는 집단 내 분위기는 순식간에 철거민, 불법 외국인으로 집약되는 현대 프랑스 사회의 주제들로 담론의 방향이 틀어진다.

 

별다른 연출 없이 1871년과 1999년 사이를 오가는 시간대의 접점은 시간의 커다란 간극을 순식간에 말소시킨다. 그로부터 22년이 더 지난 2021년에 이르러서도 상황은 유사하다는 점은 영화의 동시성이 발휘되었음을 다시 한번 방증하는 대목이다.

 

<코뮌(파리, 1871)>은 공간에 이어 서로 다른 시간대까지 공존시킨 놀라운 실험을 성공시킨 작품이지만, 이를 통해 감독이 은연중에 전하는 의도는 정말 별거 없다. "코뮌에 관한 당신의 프리즘은 무엇입니까?"

 

 

 

모두가 행복한 사회의 가능성을 인터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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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왓킨스 감독은 1871년의 혁명을 섣불리 재단하지 않는다. 영화를 통해 감독은 대상을 향한 수많은 가능성과 시선을 시종 견지한다. 관습 타파를 이유로 종교의 일방적 해체를 추진하거나, 권력 분산에 따른 혼선을 방지하기 위해 과거 공포정치의 상징이었던 공안위원회 재설립 에피소드 등을 통해서 감독은 코뮌의 급진주의적 태도가 내포한 명암을 배우들의 입을 통해서 균등하게 드러낸다.


다시 말해, 피터 왓킨스의 지향점은 프롤레타리아/부르주아 역할을 맡은 배우들을 매번 벌갈아 인터뷰하는 형식들을 통해 직접 제시된다. 감독이 구상한 가상 코뮌은 변화와 보수, 혁명과 폭동, 이상과 현실이 자유로이 공존하는 양가적 공간이다. 말 그대로 "숨이 멎을 만큼" 참혹한 클라이맥스로 영화가 치닫는 그 순간까지, 지향해오던 공간적 특성을 감독은 뚝심 있게 밀어붙인다.


1871년과 1999년, 그리고 2021년에 이르는 150년의 시공간을 초월한 감독의 놀라운 실험은 관객들의 적극적인 담론을 통한 하나의 가능성을 진심으로 탐구한다. 이는, 에릭 홉스봄이 말한 대로 "결국 이루어질 희망의 원칙으로서, '모두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지칭한다. 그 자체로 코뮌의 은폐된 역사를 영속시키는 행위이자,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지속해서 좁혀나갈 수 있는 가장 진실된 해결 방안임을 피터 왓킨스 감독은 기꺼이 자신의 실험에 지원한 비전문 배우들과의 끊임없는 인터뷰 쇼트들을 통해서 그러한 신념을 표출한다.

 

 

 

당신의 프리즘PRISM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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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코뮌(파리, 1871)>은 역사와 세상을 향한 편향된 시각을 지양하고, 더 넓은 가능성을 지향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오늘날 미디어를 향한 감독의 날선 자막들은 다시 한번 1871년의 시공간이 하나로 포개졌음을 실감케한다. 실제로, 코뮌의 영화화를 의도적으로 방해한 제도권 미디어의 행태들은, 과거 코뮌 정부를 향한 티에르 정부의 탄압 행위를 연상시킨다.

 

혁명을 몸소 재현한 배우들, 그리고 이 모든 순간을 관람한 관객들에 이어 감독 또한 시공간을 초월한 위대한 실험의 참가자로 등극한 순간이다. 적어도, 이 사회에 할리우드 상품 따윈(!) 필요 없음을 그는 단호히 명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는 여러분 차례다. 코뮌으로 말미암은, 살기 좋은 사회를 향한 당신의 프리즘은 과연 무엇인가?

 

150년이 흘러도 여전히 코뮌이 유효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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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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