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눈을 감으면 펼쳐지는 환상의 나라, 잔나비의 세계 [음악]

잔나비 정규3집 <환상의 나라: 지오르보 대장과 구닥다리 영웅들>
글 입력 2021.08.15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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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지구에서 한아뿐>에는 가수 아폴로의 팬인 주영이 등장한다. 그리고 주영은 이런 생각을 한다.


 

절대 명제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역사상 가장 오래 되풀이된 거짓말 중 하나일 거라고 주영은 생각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탁월하고 독창적인 사람들이 만든 세계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 지구에서 한아뿐 중에서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의 세계, 비틀스와 퀸의 세계에 포함되고 포함되고 또 포함되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이런 주영의 깨달음은 내가 많은 예술가들에게 진 '빚'이 있다고 생각해온 것과 어느 정도 상통하지 않을까 싶다.

 

주영은 이 사실을 바탕으로 꼭 그렇게 살아가야만 한다면 차라리 아폴로의 다시없이 아름다운 세계에 뛰어들어 살기를 원했다. 내가 어떤 예술가의 세계관이 담긴 작품을 마치 나의 자화상처럼 여기고, 아끼고, 사랑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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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나비의 정규 3집 <환상의 나라: 지오르보 대장과 구닥다리 영웅들>은 내게 그런 종류의 감동과 환희를 선사한 앨범이다. 듣는 이들을 지오르보 대장과 구닥다리 영웅들의 환상적인 이야기 속으로 기꺼이 초대하여 환락을 맛보게 한다.


총 13개의 트랙으로 구성된 앨범을 차례로 듣다 보면 마치 거대한 지도를 펼쳐 두고 길을 따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전설의 주인공들을 따라 모험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이 앨범을 혹시나 아직 들어보지 않았다면 반드시 트랙 순서대로 듣기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그래야만 이 이상한 환상의 세계로 무사히 입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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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나라는 말 그대로 환상의 나라로 초대하는 듯한 웅장함이 돋보이는 곡으로 끝날 무렵 작게 지저귀는 새소리가 다음 곡인 용맹한 발걸음이여로 이어지는 부분이 매우 동화적이고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낡고 헤진 성실에 대한 찬가'라는 설명처럼 밝고 경쾌한 리듬이 이어지며 닿을 수 없는 무지개를 알고 있더라도 뱅뱅 발을 굴러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가사가 묘한 응원가처럼 들리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세계에 속하며 산다는 주영의 말이 다시금 떠오르는 곡, 비틀 파워! 제목과 가사에서 비틀스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비틀스에 대한 존경이 담긴 헌정 곡으로 볼 여지가 있을 수 있다. 또 어딘지 모르게 장난스럽고 유쾌한 멜로디와 코러스가 '비틀 보이'를 비틀린 소년으로 들리게 하는 것도 같아 재미가 더해진다.

 

이 비틀린 세상을 통과하며 춤을 추는 비틀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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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극장은 우정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자꾸만 눈에 밟히는 외로움들을 오로지 안타깝게만 관망하지는 않는 인물이 그려지는 곡이었다.

 

자신을 생존과 정열의 왕이라고 칭하는 화자는 결국 '함께 외로울 것'을 제안하며 관계 사이의 참을 수 없는 빈틈을 끌어안는다. '처절', '외로움', '치열'과 같은 꽤나 날카롭고 현실적인 명사들이 연이어 등장하는 곡임에도 불구하고 되려 더욱 환상적인 이야기로 이어진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영화 같은 사랑을 바라는 연인과 이 연애가 조금은 어렵고 스스로가 아쉬운 화자의 노래, 로맨스의 왕. '사실은 좀 그래 좀 미안해 너를 사랑하지만 늘 피곤한 내겐 그런 불꽃은 없'다며 찬물을 끼얹으려는 것 같다가도 '나의 이름은 리차드 오 줄리아 유아 마이 스윗 허트'하고 연인을 부르며 영화 속에서 존재할 것 같은 사랑에 대한 은근한 바람이 빠른 템포로 변주되는 곡과 함께 고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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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자 지오르보 대장이 바라보는, 꿈을 뒤로한 채 삶에 투항해버린 친구들에 대한 노래 페어웰 투 암스! + 요람 송가와 별이 될 줄 알았던 분칠 한 광대의 이야기 소년 클레이 피전까지 이어지는 동안 책장은 계속해서 펄럭이며 넘어간다.


지나버린 시간에 대한 회상을 그린 것 같은 누구를 위한 노래였던가 속에서 화자는 '엉금엉금 기어올랐던가 꿈을 좇았던가 우리'하고 서글퍼한다. 꼭 아팠던 것들이 시간의 위선으로 지워지는 것에 허망해지는 날도 있음을 떠올리게 된다.


그 바로 다음 곡인 밤의 공원은 더 신비로운 무드로 시작된다. 고요한 여름밤, 내일 아침 떠오를 태양 같은 건 아무래도 좋으니 그 순간에 심취해 달빛에 쫓기듯 춤을 추는 연인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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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앨범의 타이틀곡인 외딴섬 로맨틱은 정지용 시인의 '오월 소식' 중 '외따른 섬 로만틱'을 인용했다고 하는 제목처럼 그야말로 로맨틱하고 시적인 감수성이 돋보이는 곡이다.

 

화자는 처음부터 그곳에는 무엇도 없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꼭 두 눈으로 보고 싶어 하는 이를 위해 기꺼이 손을 잡고 여정을 함께 한다. 더 길 잃어도 좋을 어떤 낭만에 대한 따뜻한 이야기이지만 어쩐지 아련하게 들리기도 한다.


다시 웅장하게 등장하며 낯선 세계를 방랑하는 여행자의 사기를 돋우는 것만 같은 블루버드, 스프레드 유어 윙스!를 지나면 아쉬운 이별의 순간이 성큼 다가온다. 굿바이 환상의 나라는 내레이션으로 채워져 있다.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마음 한구석을 괜히 아리게 만든다. '환상의 나라를 사랑하고자 했던 사내에게 현실의 아름다움은 독이어야만 했'다며 담담하게 고백하고, '촌스러운 은유를 벗겨내는 고통'을 말하는 화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이전의 환상적인 장면들이 안개처럼 고요히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진정 사랑했던 별과 꿈을 다만 환상으로 남겨두고 내일로 떠나는 그의 서글픔은 마지막까지 흥겹게 컴백홈, 즉 집으로 돌아가며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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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에 수록된 곡을 순서대로 듣는 동안에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뮤지컬 혹은 서커스가 펼쳐진 것 같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끝에 가까운 트랙이 이어질수록 그 모든 시간이 먼지 쌓인 시계 바늘 속 박제된 환상임을 깨닫게 되고 짙은 그리움이 솟아난다. 어쩌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떤 시간, 만남, 세계에 대하여 담담히 작별을 고하고 내일로 나아가는 용기와 희망이 더욱 또렷해진다.


눈에 밟히는 외로움들, 모든 기대와 약속이 보기 좋게 빗나간 아침, 돌아보니 참 아름다웠던 때를 쓸쓸히 돌아보는 시선과 가사들이 그제야 마음을 쿡쿡 찌른다. 그러나 그 여운을 다시 느끼기 위해 맨 첫 트랙을 다시 듣는 순간부터 모든 걸 잊고 다시 잔나비의 재기 발랄한 세계에 녹아들게 되는 것. 어쩌면 이것이 잔나비와 그의 세계가 가진 힘이자 꿈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더불어 그런 달콤한 망각의 세계를 우리에게 빌려주어 참 고맙다는 말도 덧붙이고 싶다.

 

 

[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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