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다름'이 거슬리는 순간 [공연]

우리는 모두 다르지만, 모든게 다르진 않기에.
글 입력 2021.07.25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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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스웨트: 땀, 힘겨운 노동>에서 다루는 ‘다름’은 주로 인종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다인종·다민족 국가인 미국사회의 현실을 한국에 그대로 대입하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 글에서는 단순 인종보다는 성별, 학력, 경제적 수준 등 더 넓은 의미로 ‘다름’을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단, 사람의 성격적 차이는 제외한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나의 못난 점을 떠올리다 보면 한없이 우울 해진다. 그렇다고 열심히 산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런 원망은 들어주는 사람도 없을 뿐더러 세상을 바꾸지도 못하니까. 결국 가장 쉬운 길은 나보다 더 나은 상황의 누군가를 탓하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미움의 대상을 만드는 건 생각보다 쉽고 편하다.


그래서인지 평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다른 사람과 나의 차이가 이상하게도 그 사람이 잘될 때, 혹은 내가 잘 안될 때는 아니꼽게 느껴진다. 연극 <스웨트>는 ‘다름’이 눈에 들어오는 그 순간을 처절하게 표현한다. 개인의 위치가 흔들릴 때 우리는 얼마나 ‘다름’에 예민해지는가? 질문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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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극 <스웨트: 땀, 힘겨운 노동>


 

최근 미국의 이주 노동자, 흑인 노동자 이야기를 다룬 영화나 책을 많이 접했다.

 

미국 사회 내에서 그들이 겪는 차별에만 집중하니 다소 부담스러운 면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던 와중 보게 된 연극 <스웨트>는 나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단순 사회적 약자, 미국 사회의 한 조각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개인들의 삶과 관계를 이야기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린 노티지 작의 Sweat는 2000년대 미국 펜실베니아 주, 벅스 카운티에 위치한 마을 레딩(Reading)을 배경으로 한다. 특히 사건의 배경이 되는 2000년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이후 여러 기업이 멕시코로 이전, 새로 유입된 노동력으로 인건비를 절감하는 등 폐업과 구조조정을 단행한 해이다.


아프리카계, 독일계, 콜럼비아계, 이탈리아계… 백인부터 흑인, 히스패닉까지 다양한 인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미국에서 나고 자란 ‘미국인’이다. 등장인물들은 레딩의 공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이고 극은 비용 삭감을 결정한 회사의 통보로 해고당한 인물들의 싸움, 화합의 공간이었던 한 바(bar)에서 일어난 사고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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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모르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이 극은 2000년대 혼란스럽던 미국의 상황과 당시 빈곤 노동자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극을 보며 굉장히 사회적인 이슈를 사적으로 풀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사회 자체의 부조리함이나 노동자들의 투쟁,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개개인 사이의 관계를 풀어냈다는 점에서 그랬다.

 

<스웨트>는 공장노동자의 실직으로 그들의 관계가 붕괴되는 과정을 그려낸다. ‘인종’이라는 선천적 차이를 가졌음에도 동료로, 그 이상의 친구로 의지하던 사람들이 직장을 잃자마자 상대를 멸시한다. 그들 사이에서 문제되지 않던 피부색, 인종을 이유로.

 

분열의 시작은 둘도 없는 친구였던 신시아와 트레이시다. 20년 넘게 생산라인에서 함께 일하며 그들은 남다른 우정을 쌓았다. 매년 생일을 함께 보내고 고된 노동이 끝나면 바에서 술 한 잔으로 서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신시아가 관리직으로 승진하며 둘의 관계는 변한다. 작업복이 아닌 말끔한 블라우스, 생산라인이 아닌 에어컨 밑 사무실. 그 사이의 괴리만큼 트레이시와 신시아의 관계는 흔들린다.

 

이 속에서 혐오는 시작된다. 트레이시는 신시아가 관리직 승진에 성공한 이유가 ‘흑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이전에는 문제되지 않던 친구와 나의 다른 점이 이제는 나의 자리를 뺏는 장애물인 셈이다. 그들 사이의 오랜 우정은 온데간데 없고 흑인에 대한 경멸과 시기심, 백인 우월주의와 혐오의 감정만 우뚝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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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와 신시아의 경우가 가까운 사이에서 시작한 최초의 분열이었다면 분열의 씨앗은 점점 커져 평소 친분이 없는 제3자를 향하게 된다. 바로 극 속 오스카가 그 예이다. 내부의 분노가 더욱 과감 해져 외부로 향하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사람들이 궁지에 내몰렸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혐오의 감정에 무감각 해졌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극 내내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라틴계 미국인 오스카는 ‘조금 더 잘 살아보려고’ 시급을 더 주는 공장에 취업한다. 단지 그 뿐이다. 하지만 트레이시를 비롯한 극 속 인물들은 미국에서 나고 자란 오스카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며 오스카를 ‘굴러온 돌’ 취급한다.

 

언제 그렇게 관심이 많았다고, 오스카를 배신자 취급하며 심지어는 실제 폭력을 사용하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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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묻고 싶다.

 

 

우리는 언제

‘다름'이 거슬리기 시작하는가?

 

우리는 그때

얼마나 ‘다름’에 예민해질 수 있는가?

 

 

내가 생각한 답은 이렇다.

 

- 개인의 위치가 흔들릴 때, 다름에서 비롯된 차별과 혐오가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일면식 없는 사람 모두를 향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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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는 모두 다르지만, 모든게 다르진 않기에



레딩 사람들은 문제의 본질을 잊은 채 눈에 보이는 대상을 공격하고 ‘우리’와 ‘너희’를 구분 짓기에 바쁘다.

 

그런데 실제 우리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 무언가 내 것이 위협당한다고 느끼거나 나의 위치가 불안할 때 우리는 나와 ‘다른’ 것들이 거슬리기 시작한다. "쟤는 저래서 그렇지", "얘는 이게 문제지". 쉽게 판단하고 고립시킨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늘어나면 사람들은 혐오의 감정에 무감각해지고 <스웨트>의 비극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결국 연대의 공간이었던 <스웨트> 속 스탠의 바가 무너지는 것처럼 말이다.

 

트레이시와 신시아가 20년 넘는 세월 동안 동료 이상의 친구로 지낼 수 있었던 건 분명 둘 사이의 정서적 교감이 존재했고 그들만의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함께 노동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이지만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일 수는 없다. 아이러니하지만 이 사실이 위안이 된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이지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의미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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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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