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언젠가는 당신의 안테나에 닿기를 바라며 [드라마]

글 입력 2021.07.05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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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우리를 설명하기 위해 너무 많은 말들을 하고 있다고. 나는 왜 여기에 있는지, 나는 삶의 파편들을 모아 놓고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너무 많은 말들을.


이 생각이 든 후로부터는 설명하는 일에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설명하는 목소리들의 범람은 피곤했고 차리리 그토록 무서워했던 침묵을 좋아하게 되었다. 넘치지 않고 딱 적당한 수준에서 찰랑거리는 설명의 왕래들을 상상하면 그제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설명하지 않고 살 수는 없는 걸까. 설명하는 것 외에 우리가 닿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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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품들은 마치 나에게 필요한 순간에 와 주기로 약속되었던 것처럼 나타난다. 힘을 들이지 않아도 이때에 오기로 약속돼 있었던 것이니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단편 드라마 <아득히 먼 춤>이 그랬다. 설명하기를 관두고 침묵을 유지하는 것을 동경하게 된 나에게 이 드라마는 바로 그 침묵 같았고, 그래서 편안했다.


영화는 주인공인 신파랑의 자살을 기점으로 그가 연극 연출 활동을 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전개된다. 파랑에게는 연극이 그가 가진 모든 것이었고 파랑은 따지고 보면 가진 적도 없었던 연극을 하기 위해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가리지 않고 하는 인물이었다.

 

연극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연극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파랑에게 연극은 명줄 같은 것이었을까. 그러나 영화에서는 간절함과 간절함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파랑은 세상 사람들과 닿고 싶어하고 극을 올리고 싶어했지만 함께 팀을 꾸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일삼고 피해를 주기 십상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가 지향하는 연극의 결말은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으며, 이해하지 못했다.

 

이렇게 그는 가진 것이 진심뿐인 쓸모없는 인간으로 전락하고 결국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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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못하는 사람. 파랑은 그런 사람이었다.

 

파랑은 자신이 돌고 있는 궤도 속에 스스로를 철저히 가두게 되었다는 것, 그 결과로 주변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연극을 제외한 모든 것을 포기한 채로 살아가는 것 같은 얼굴을 보여 주었다. 파랑이 죽음을 택하기 전 현이를 만났던 곳의 조명은 주황빛이었지만 파랑의 얼굴만큼은 시퍼런 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랑은 더이상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지 않는다. 대신에 사람들에게 묻는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기 싫은 게 아니냐고. 파랑을 외면했던 현이도, 외면당했던 파랑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을 모르는 척 어물쩡 넘겨 버리는 것이 남일 같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설명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정말 없는 걸까. 나는 그렇게 믿고 싶지 않다. 구체적인 설명으로 서로를 이해시키지 않아도 공생하는 사람들이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을 거라 믿는다.

 

파랑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상하며 글을 쓰고, 극을 올리고자 했던 것 같다. 그가 썼던 극의 결말은 사람들이 자신의 전파가 닿을 때까지 춤을 추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연영과 학생들은 비웃었고, 함께 작업했던 이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춤은 그가 생각한 최선의 대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난해하고도 솔직한 파랑의 진심이 계속해서 기억에 남았다. 실은 난해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우리는 모두 평생 닿을 일 없이 각자의 궤도를 떠도는 별들이다. 별과 별 사이 수억 광년의 거리. 속삭이듯 말해서는 평생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온몸으로 춤을 춘다. 그 별이 당신에게는 아직 판독 불가의 전파에 불과하겠지만 언젠가는 당신의 안테나에 닿기를 바라며 춤을 춘다."

 

 

그가 극의 연출 의도로 내놓으려 했던 이 글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던 파랑의 가장 솔직한 마음이었다. 속삭이듯 말해서는 평생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판독 불가의 전파로 고여 버리고 말았지만 진심 가득 담긴 극을 올리고자 했던 파랑을 보면서 또 다시 커지는 내 안의 바람을 느꼈다.

 

언젠가는 당신의 안테나에 닿아야지. 온몸으로 춤추다 보면 나는 판독 가능의 전파가, 당신은 마중 나온 안테나가 되어 줄 것이다. 아득히, 아득히 먼 곳에서 작지만 큰 바람을 안고 춤을 춰야지.

 

 

[박이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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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김수지
    • 첫문단부터 울렁거리게 좋은 글이에요. 저도 한때 설명의 피로함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어요. 그때의 저에게 들려주고 싶은 글이에요. 춤과 전파를 생각하며 살아갈게요 이 글도 저에게 하나의 전파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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