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모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의문 - '케빈에 대하여' [영화]

글 입력 2021.06.22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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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에 대하여 포스터.png

 

 

케빈에 대하여

 

개봉 2012. 07. 26.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장르 드라마, 스릴러, 서스펜스

감독 린 램지

출연 틸다 스윈튼, 에즈라 밀러, 존 C. 라일리

 

소개

자유로운 삶을 즐기던 여행가 에바에게 아들 케빈이 생기면서 그녀의 삶은 180도 달라진다. 일과 양육을 동시에 해내야 하는 에바의 삶은 케빈의 이유 모를 반항으로 점점 힘들어져만 간다. 에바는 가족 중 유독 자신에게만 마음을 열지 않는 케빈과 가까워지기 위해 애쓰지만 그럴수록 케빈은 더욱 교묘한 방법으로 에바에게 고통을 준다. 세월이 흘러 청소년이 된 케빈은 에바가 평생 혼자 짊어져야 할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데...

 

 

*

본문에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만한 부분이

다수 있기에 주의하길 바람.

 

 

 

"좋아하는 것과 익숙해지는 건 달라.

엄마도 나한테 익숙해졌잖아."

 

 

위 대사는 영화 속에서 아들 ‘케빈’이 엄마 ‘에바’에게 하는 말이다. 에바는 ‘엄마’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나름대로 케빈에게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사랑이 담기지 않은 의무적인 행동은 오히려 케빈이 더더욱 에바의 사랑에 집착하게끔 만든다.


케빈은 에바에게 있어 처음부터 원하지 않았던 아이이다. 케빈이 생기며 자유를 잃은 여행가 에바는 케빈이 어렸을 때 대놓고 ‘나는 네가 태어나기 전이 더 좋았어’라고 말하는 등 영화 내내 아이에게 정을 붙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애초에 마음이 없었던 에바는 케빈을 막 낳았을 때도 믿기 싫다는 듯 멍하니 앉아 허공만 바라본다. 이후 케빈이 엉엉 울 때도 거리를 두고 그를 어정쩡하게 들어 올릴 뿐, 결코 자신의 품을 내어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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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케빈과 공놀이를 하려던 에바는 케빈이 굴러오는 공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때, 그저 짜증 섞인 한숨과 함께 ‘엄마에게 그 공을 굴려봐’라는 말만 반복한다. 에바는 절대 케빈이 왜 자신의 말에 응하지 않는지 이유를 묻지도, 혼을 내지도 않는다.


케빈은 에바의 관심을 받기 위해 지속해서 이상 행동을 보인다. 활로 과녁을 잘 겨누다가도 괜히 에바가 앉아 있는 쪽의 유리창으로 화살을 쏘고, 몸에 더는 맞지 않아 배가 드러남에도 집에선 늘 어렸을 적의 옷을 입고, 자신만의 방을 꾸미고 행복해하는 에바의 모습을 보고는 그 방을 죄다 망쳐놓는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 에바는 혼자 짜증을 낼 뿐 케빈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케빈은 자신에 대한 에바의 애정을 확인하기 위해 ‘살인’이라는 최후의 방법을 선택한다. 에바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아빠인 프랭클린과 동생 실리아, 그리고 자신이 다니는 학교 체육관에 있던 친구들까지 모조리 활로 쏴 죽여 에바의 곁에는 케빈이 바랐던 대로 자신밖에 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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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때 영화 내내 나왔던 붉은색이 깔끔히 사라진다. 영화는 토마토 파티를 즐기며 자유롭게 유영하는 에바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 중간중간에는 누군가의 복수로 붉게 물든 허름한 집을 청소하는 에바가 계속 등장한다.

 

그런데 영화의 후반부에는 그 빨간색이 없다. 이는 아마 자유롭고 화려하게 빛났던 에바의 모습을 지우고 엄마가 된 에바를 암시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영화의 말미에 에바는 성인 교도소로 이감되는 케빈과 담담히 이야기를 나눈 뒤 처음으로 그를 꼭 안아준다.


나는 에바가 사랑이 아닌 의무감으로 케빈을 길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과의 원인이 에바에게만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에바와 마찬가지로 아이를 돌봐야 할 의무가 있는 남편 프랭클린은 늘 태평했다. 프랭클린은 케빈이 본인에게는 순한 모습만 보여준다는 이유로 육아를 힘겨워하는 에바를 본인의 일이 아니라는 듯 그저 이상하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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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프랭클린은 아이들을 잘 놀아주는 아빠이다. 하지만 프랭클린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다. 그저 일을 마치고 돌아와 아이들을 놀아주기만 했을 뿐, 그들을 돌보는 일은 하지 않는다. 프랭클린은 자신과 에바의 아이임에도 그들을 양육하는 것은 당연히 엄마인 에바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모성애가 없는 엄마, 즉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엄마라는 금기된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모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영화를 보고 모성애라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며, 어쩌면 사회가 명확히 실재하지 않는 것을 여성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여기서 실재하지 않는다는 건 모든 엄마에게 모성애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성애는 여성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즉 우리가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마음을 열고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듯이 모성애 또한 여성이 태초부터 지닌 것이 아니라 아이와의 교감을 통해 만들어가야 함을 에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케빈은 단순히 에바의 무관심으로만 만들어진 아이가 아니다. 당연하다는 듯 에바에게만 강요된 모성애와 준비되지 않았던 임신이 한 가족을 망쳐놓은 것이다.

 

케빈을 책임져야 할 의무는 에바 혼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듯 ‘우리 모두’는 케빈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유소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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