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의 크리스마스 드레스코드는 수영복이었다 - 2편 [여행]

해외여행 막차 탔습니다
글 입력 2021.06.18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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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따사로운 햇살 속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에 눈을 떴다. 지프 투어로 정신없는 하루를 보낸 탓에 여유롭게 눈에 담지 못한 무이네 리조트의 풍경이 기대되어 서둘러 흰 이불을 제치고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파란색 물감을 엎은 듯한 하늘 아래는 온통 초록색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옆 방의 외국인 할머니께서는 마당에 앉아 책을 읽고 계셨고, 저 멀리서 이미 신나게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라면 뜨거워 피했을 강한 햇살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이 햇살을 내가 다 머금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내 온몸을 그 공간과 시간 속에 맡겼다. 수영장의 일렁이는 물결은 빛을 받아 유난히 반짝여 마치 투명한 바다를 보는 듯했다. 슬리퍼를 잠시 벗어 두고 맨발로 밟은 바닥은 열기로 가득했지만 발바닥을 타고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듯한 생동감이 나를 감쌌고, 뜨겁기보다는 그저 따뜻하고 평화로웠고 평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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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조트에서의 시간을 잘 새겨 두고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탔다. 그렇게 쾌적하지만은 않은 버스에서의 긴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나름 잘 적응했다. 중간에 들른 휴게소는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버스가 멈췄고, 다른 사람들이 내리기에 따라 내렸지만 나무들 사이 뻥 뚫린 듯한 공간은 '여기가 휴게소인가?'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런데 더운 날씨에 다가간 아이스크림 냉장고에는 익숙한 아이스크림들이 가득이었다. 새로움의 연속 속에서 여행 사이사이 등장하는 이런 익숙함은 여행 초보였던 우리를 잘 달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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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찌민 도심에 도착하니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문을 열어젖힌 식당들과 노상에서 자유롭게 식사 혹은 술 한 잔을 즐기는 베트남 사람들, 길거리의 수많은 오토바이, 화려한 네온사인과 조명들은 호찌민의 향과 함께 기억에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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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로 택시를 타고 예약해 둔 호텔로 가 짐을 풀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호텔 라운지에 산타가 찾아와 간식을 나눠 주었다. 타국의 여름에 즐기는 크리스마스, 그리고 호텔 라운지에서의 칵테일 한 잔, 들뜬 듯한 사람들의 웃음소리. 무이네에서 자연과 함께 하는 휴양을 즐긴 뒤, 색다른 매력을 가진 도심에서의 휴가는 열심히 달려온 나의 시간을 위로하는 듯, 격려하는 듯, 칭찬하는 듯 찬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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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동 시간 탓에 종일 식사를 하지 못한 우리는 호텔에서 나가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택시를 타고 가는 길이 너무 음산해서 살짝 겁먹었지만 다시 당돌하게 걸어 나간 골목 끝에는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식당이 자리하고 있었고, 반쎄오, 분짜, 망고 셰이크 한 잔으로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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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이네의 택시에서도, 호텔과 식당에 가는 택시에서도 느껴졌지만 베트남은 크리스마스에 정말 진심이었다. 더운 날의 크리스마스는 어떻게 다를지 생각해 보기도 전에 이미 나는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인파 속에 섞여 너무나 자연스럽게 반팔, 반바지 차림의 연말에 흠뻑 빠져 있었다.

 

다양한 언어가 섞여 들려오는 거리에서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것은 확실히 무언가 달랐다. 특별한 날을 색다른 곳에서 보낸다는 건 해 볼 만한 경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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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다음 날 해가 떴다. 하늘은 여전히 청명했고 높은 호텔 창문에서 바라본 호찌민은 참 다채로웠다. 오늘을 다 보내고 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앞섰지만, 우리는 애써 그 생각을 지우며 호텔 수영장에서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고, 화려한 조식 뷔페도 잊지 않고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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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도 나무가 참 많은 편이지만 호찌민은 도시 전체가 공원 같았다. 구름 사이사이 비치는 햇살 아래 나뭇잎들이 반짝였고 거리는 활기가 넘쳤다. 특별한 목적지 없이 마냥 걸어도, 도착한 관광지에 볼거리가 부족해도 마냥 즐거웠던, '여행'다운 오후였다.

 

그때 내가 느낀 호찌민의 거리는 정말 '살아 있는' 느낌이었는데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한 지금, 그 거리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면서도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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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쌀국수를 좋아하고, 한국에서도 즐겨 먹는 편이지만 사실 짜조는 찾아 먹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거리를 걷다 만난 쌀국수집, 그곳에서 사이드 메뉴로 시킨 갓 튀긴 짜조를 정말 맛있게 먹었다. 평소에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는 것 또한 여행의 설렘과 행복이었다. 바삭, 하는 소리를 내며 씹히던 뜨거운 짜조, 달달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 아래에서의 점심 식사는 화려하진 않았지만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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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며 더위도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호찌민의 랜드마크인 핑크 성당이 보이는 카페 루프탑에 앉아 유명하다는 코코넛 커피를 즐겼다. 달고 시원한 음료가 오랜 외출로 지친 몸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어 줬다.

 

카페에서 나온 후 간식으로 먹을 반미 샌드위치를 사러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하지만 저녁 피크 타임 호찌민의 거리는 차로 꽉 막혀 있었고 우리는 어둠 속에 가려져 기사님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택시를 잡기 위해 몇 분이나 서 있었을까, 우리 옆에 현지인이신 듯한 한 남성분이 다가왔다. 이전에 이미 지갑을 보여 달라는 외국인으로부터 한 차례 도망을 왔던 터라, 낯선 사람의 등장에 우리는 살짝 겁이 났고, 그분이 내뱉는 말들은 이해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분 역시 이내 우리와 소통하기를 포기하셨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곧 그분이 도로를 향해 핸드폰을 높이 들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사이 우리 앞에는 택시 한 대가 섰다. 그 현지인 분은 택시를 잡지 못하고 도로 옆에 서 있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돕기 위해 멈춰 섰고, 핸드폰 플래시를 이용해 익숙하게 택시를 잡아 주신 것이다.

 

열심히 즐겼고, 새로운 경험과 맛있는 음식으로 여행을 가득 채워나갔지만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는 약간의 무서움과 불안함이 늘 자리하고 있었다. 소매치기를 당하면 어떡하지, 말이 안 통해서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지, 택시를 잘못 타서 사기라도 당하면 어떡하지. 수많은 걱정 사이에서 나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을 살짝 경계하며 여행을 했던 것 같다. 그날, 우리는 한 마디 대화 없이 들어 올린 그분의 핸드폰 불빛에서, 그보다 훨씬 더 큰 빛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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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코스는 마사지 샵이었다. 점심에 호텔 체크아웃을 한 후 마사지 샵에 캐리어를 맡기고, 외출했다가 돌아와 마사지를 받고 새벽 비행기를 타러 가는 일정이었다. 혹시 나와 같은 3박 5일 일정의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있다면, 새벽 비행기 전 코스는 꼭 마사지로 하시길. 물론 행복했지만 그와 별개로 잔뜩 지친 몸을 다음 일정 걱정 없이 푹 뉘고 릴렉스할 수 있었다.

 

나는 간지럼에 취약한 민폐 손님이었기 때문에 담당 마사지사분께 꽤 죄송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스르르 잠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 눈을 떠 보니 이미 머리 마사지까지 끝냈단다. 나는 머리에 감각을 느낀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기절하듯 잠들며 마사지를 즐기고,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여행의 마무리를 준비했다. 캐리어를 끌고 마사지 샵에서 나와 공항으로 가는 길. 3일 전에 마주했던 같은 공항, 그 때로부터 고작 3일이 지난 후의 똑같은 나지만 뭔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드레스코드가 수영복이었던, 우리의 특별한 크리스마스 연휴는 그렇게 끝났다.

 

*

 

참으로 충만한 여행이었고 참으로 감사했다. 함께 여행을 떠난 친구에게도, 별 탈 없이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준 베트남에도, 그리고 또 다른 행복을 발견해 준 나에게도.

 

나는 겁이 많아 도전하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난생처음 가는 베트남 공항에서 밤을 새웠다. 나는 영어를 잘하지 못해 말을 잘 꺼내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 호텔 프런트에서도, 택시 기사분께도, 식당 직원분께도 말하는 건 내 몫이었다.

 

학교, 아르바이트하는 가게와 집. 그리고 가끔 카페, 식당. 내가 또 무엇을 즐기기 위해 살 수 있을까 싶었다. 스무 살 이후의 여행들은 건조해 메말라 가는 내 땅에 촉촉한 봄비를 내렸고, 새 싹을 피웠다. 나는 어디든 갈 수 있는 사람임을 알았고, 세상에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이 너무나 많음을, 그리고 나의 세상은 너무나 좁음을 깨달았다.

 

여행 중에는 꼭 한 번씩, 긍정적인 감정에 인색했던 내가 행복을 말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길 건너편 바다가 눈에 보이기 시작할 때,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외출 준비에 설렐 때, 평소에는 눈길이 가지 않던 나뭇잎 하나, 그 나뭇잎이 흔들리며 내는 조용한 소리에 집중해 볼 때. 나는 그 순간을 모아 마음 깊은 곳에 잘 저장해 둔다.

 

사실 이 글은 순전히 나를 위한 글이고, 흐려져 가는 내 행복의 순간을 잘 붙잡아 두기 위함이다.

 

여행을 떠나기 어려운 요즘, 일상도 여행처럼 즐겨보려 하지만 역시나 쉽지 않은 일이다. 하루하루를 전부 여행처럼 보낼 수는 없어도, 하루에 마음 깊은 곳 저장해 둘 만한 순간들 하나씩은 남기를 바란다. 그렇게 차곡차곡, 행복을 쌓아 두는 방법을 잊지 않기를. 그리고 나중에 정말 자유롭게 여행을 떠날 수 있을 때 그 문을 활짝 열고 밀려오는 행복을 마음껏 머금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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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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