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심을 담아 소개합니다, '흑심' [공간]

근심은 털어 버리고, 진심을 새겨 보는 시간
글 입력 2021.06.04 09:2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20210604151158_thsdyhxz.jpg

 

 

3월부터 노트에 하루 일정을 적기 시작했다.

 

보라색 펜으로 날짜를 적고, 검은색 펜으로는 하루동안 해야 할 일을 나열한다. 일정을 끝낼 때마다 취소 선을 긋고, 그렇게 모든 일정들이 반쪽으로, 가로로 갈라지고 나면 내 하루가 끝난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내 노트에 ‘흑심’이 새겨졌다.

 

 

20210604151218_zburhcrp.jpg

 

 

여름을 향해 가는 길에 드리워진 비와 구름의 장막이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하루였다.

 

평소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건 돈이 아니면 다 싫어!’라고 외치곤 하던 나지만, 얌전히 내리는 부슬비와 그 비가 잠시 멈췄을 때 보이는 회색 하늘, 그리고 나무는 제법 잘 어울린다. 거기에 음악 한 마디, 향수 한 숨까지 더해지면 감성을 자극하기에는 최고의 조합.

 

지난번에는 휴무일이라 아쉽게 발길을 돌려야 했지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계단을 올라 문을 연 나의 앞에 드디어 새 세상이 펼쳐졌다. 온통 나무, 나무, 나무.

 

어린 시절부터 난 유난히 나무를 좋아했다. 인사동이나 박물관으로 견학을 간 날, 다른 아이들이 장난감 사기에 바쁠 때 나는 나무 수저, 나무 그릇, 나무로 만든 종이로 만든 수첩을 사 모았다. 시라고는 몇 편 읽어 보지도 않았으면서 시인이 되고 싶다고 하던 8살 때도, 매일 책을 몇 권씩 읽으며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하던 12살 때도, 만화가가 되고 싶다고 혼자 스케치를 연습하던 15살 때도 난 늘 연필과 함께였다. 진하기는 늘 B 이상이어야 했다. 힘을 크게 들이지 않아도 종이 위에서 미끄러지며 진한 자욱을 만들어 내는 게 좋았다.

 

색연필도 좋아했다. 친구들이 시험을 잘 보겠다는 조건으로 부모님께 장난감이나 용돈을 요구한 것과 달리, 만족스러운 성적표를 받은 나는 엄마 손을 끌고 문구점에 가서 색연필을 한 움큼 샀다. 뒤에 달린 꼭지를 돌리면 나오는 플라스틱 색연필이 아니라, 직접 깎아 써야 하는 색연필이 참 갖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연필을 잡고 있어야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순간은 늘어났고, 답을 적어 내야 하는 문제집이 쌓여갈수록 연필 나무의 각진 부분이 손에 배겨 굳은살도 늘어갔다. 가장자리에 고무가 둘린 플라스틱 샤프와 볼펜이 내 필통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인인 지금, 내 가방에는 더 이상 필통이 없다. 두꺼운 노트북 파우치에 담긴 노트북, 마우스, 마우스 패드, 충전기가 가방을 무겁게 할 뿐.

 

 

20210604151242_lenczikk.jpg

 

 

그런 나에게 연필이 한 자루 생겼다. 1970~80년대 미국에서 만들어졌고 체리레드색 몸에 금색 레터링이 새겨진 예쁜 빈티지 연필.

 

연남동 ‘흑심’은 각각의 연필이 가진 이야기를 소개해 준다.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연필도 잠깐의 시선을 던져 조금만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만의 특별한 사연을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세계 2차 대전 때 만들어진 연필은 자원이 부족해 연필 몸통과 꼬리의 지우개를 금속으로 연결하지 못했다는 슬픈 사연도 갖고 있다.

 

매장 곳곳에 자리한 메모지에 여러 연필들로 직접 글씨를 써 보며 필기감을 확인하고, 내 친구가 될 연필을 선택하고 나면 사장님께서 그 연필이 살아온 날들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해 주시고, 한 자루일지라도 고운 종이 봉투에 담아 잘 봉해 주신다. 단순히 연필을 사는 것이 아니라 연필을 분양받는 느낌이다.

 

 

20210604151309_zddufube.jpg

 

 

손으로 글을 적는다는 것은 큰 힘을 가지고 있다. 가끔은 쓸수록 닳아가는 흑심이 내 우울까지 모두 함께 가지고 달아나 버릴 때도 있고, 가끔은 꾹꾹 눌러쓰며 종이와 내 마음에 두근거림을 동시에 새겨 볼 때도 있다. 또 가끔은 누군가에게 전할 진심을 적으며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흑심’은 그런 감정들로 공간을 가득 채웠다. 사실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이 나무에 불과하지만, 각 연필이 가진 다채로운 색깔과 이야기, 그리고 각자의 기록이 풍기는 향수에 젖다 보면 쉽사리 공간을 떠날 수 없게 된다.

 

 

20210604151347_ltbnswdy.jpg

 

 

‘흑심’에 다녀온 날, 엄마에게 오랜만에 연필을 깎아 달라 부탁했다.

 

엄마는 부드럽게 깎이는 나무를 한 번, 앞에 앉은 나를 한 번 보며, 한 자루 한 자루 정성스레 연필을 깎아 우리 자매의 필통을 채워 주던 옛 시절이 떠오른다고 했다. 연필 한 자루가 지난 시간의 기록을 되새겨 주었고, 새로운 추억을 새겨줬다.

 

오늘도 나는 내일 할 일을 노트에 적는다. 사각사각, 기분좋은 소리가 방을 가득 채운다.

 

나는, 연필을 쓴다.

 

 

 

20210604151426_nlquhnly.jpg

 


[이건하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