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태어나버린 삶 - 가버나움 [영화]

글 입력 2021.05.22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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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가버나움>, 그 참담함에 대하여


 

영화 <가버나움>을 처음으로 봤던 때가 기억난다. 광화문 씨네큐브였는데, 영화를 보고 나와서 동행인과 한참 동안 말을 나누지 못했다. 감상을 나누기 어려웠다.  <가버나움>은 영화적 연출이나 판타지가 아닌, 참담한 현실이었다.


영화는 2019년에 국내 개봉했다. 나딘 라바키 감독은 영화의 배경으로 그가 나고 자란 레바논을 선정하였다. 레바논은 오랜 내전을 겪으며 가난의 뿌리가 깊어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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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자인'은 레바논의 한 빈민가에 살고 있는 어린 소년이다. '자인'의 삶은 험난하다. '자인'이 몸을 뉘이는 집은 수많은 형제들을 재우기에는 턱없이 좁아 보인다. 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었지만 당연하게도 가지 못한다. 대신 부모의 이름을 대고 타온 마약성 진통제를 물 타 주스라고 속여 길거리에서 파는 일을 한다.

 

그러던 중 고작 열한 살이 된 여동생 '사하르'가 나이 많은 '아사드'의 아내로 가게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격렬히 반대하지만 열두 살 소년이 어른들의 힘을 이기기에는 역 부족이었다. '자인'은 그 길로 집을 나와버리고, 막연히 길을 헤매던 중 난민 여성 '라힐'을 만나 그녀의 아이 '요나스'를 대신 돌봐주는 조건으로 '라힐'의 집에 머무르게 된다.


<가버나움>의 출연진들은 모두 전문 연기자가 아니다. 자인 역의 자인 알 라피아는 시리아 난민 소년이며, 라힐을 분한 요르다노스 시퍼라우은 실제 불법 체류자로, 실제로 촬영 중 체포되었으나 나딘 라바키 감독의 개입으로 풀려나고 촬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요나스와 사하르 또한 마찬가지이다.

 

모두 자신이 맡은 역할과 비슷한 삶을 살아온 것이다. 감독은 실제로 자인에게 대본을 쥐어주거나 자세한 디렉팅을 하지 않고 그저 상황에 대한 설명만 제공한 채로 촬영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자인은 그 모든 촬영 과정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현실에서의 삶과 너무나도 닮아있었기 때문이리라.

 

제작진들은 영화 촬영 후 '가버나움' 재단을 설립하여 또 다른 자인들에게 도움을 지속적으로 주고 있으며, 자인, 요나스, 사하르, 메이소운 역을 맡은 아이들은 평범한 아이들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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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내내 찔끔 눈물이 나오기는 했지만, 가장 많이 울었던 순간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때였다. 주인공 자인은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제작진들은 영화 이름의 재단을 설립하여 자인과 비슷한 아이들을 돕고 있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영화가 끝나도 자인의 괴로움은 끝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울적했는데, 그 화면을 보자마자 안도와 함께 눈물이 터졌던 것이다. 다행스럽지만 또 한 편으로는 아직 얼마나 많은 자인들이 세상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버나움>은 수많은 키워드와 문제 의식을 담고 있다. 그 중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키워드를 꼽으라면 아동학대, 난민, 조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에서 아동학대는 영화 전반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사실 자인과 자인 주변의 등장인물들이 사는 사회에서 자인이 받은 아동학대는 학대라고 지칭하기도 애매했을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너무나 명백한 학대였다. 학교에 가야 할 나이에 학교에 가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하며 가짜 음료수를 판 것, 성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월경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로 초경을 맞이한 것, 아기가 아기를 돌보는 풍경, 단순하게는 폭행, 욕설, 그리고 조혼까지도. 그런데 여기서 물음표를 하나 제시해보고자 한다. 그 학대들은 과연 막을 수 있는 것이었나?


자인의 부모를 변호할 생각은 결코 없지만 영화를 보고 있자니 부모들의 삶도 궁금해질 수 밖에 없었다. 법정에 선 자인의 부모들은 말한다. 자기들도 그렇게 컸으니 그렇게 한 것이라고, 당신이 나처럼 살았으면 분명 자살했을 거라고, 아무도 내 삶을 모른다고. 그래, 아무도 그들의 삶을 모른다. 하지만 짐작해보자면 그들은 자인처럼 학대를 받고, 사하르처럼 조혼을 ‘당’하고, 어린 나이에 임신과 출산을 또한 ‘당’한 사람들일 것이다.


학대와 폭력은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학대를 받고 자란 아이들은 반드시 학대를 하는 부모가 된다는 말이 아니다. 학대와 폭력에 대해 문제 의식을 가질 때, 우리는 그 것을 저지른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자리한 ‘사회’까지 시야를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폭력이 그렇지는 않지만, 많은 폭력은 재생산된다. 자인의 부모의 부모들은 그런 유산만을 물려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유산의 본질은 다름 아닌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사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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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인의 부모를 보며 또 다른 궁금한 점이 생겼다. 그들은 왜 그렇게나 아이를 많이 가진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 두 가지의 가설을 설정해보았다. 첫 번째는 성 지식 부족과 가난으로 인한 피임 실패이다. 물론 그들이 성 지식 부족도 그들이 속한 계층과 사회 불평등에 의한 것이다. 영화 속 대화로 미루어보아 그들은 학교에 다니기는 커녕 출생신고조차 되어있을지 확실치 않다. 올바른 성 지식을 배울 수 있는 장소나 수단이 만무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극심히 가난하기 때문에 콘돔이나 피임약 같이 물리적으로 임신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을 사용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자식을 노동력으로 보는 구시대적, 산업 혁명 전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영화 내에서 자인의 부모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대신 길거리에서 노동을 시키고, 학교는 단지 식량이나 물자를 배급해준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학교에 보내기를 고민한다. 다만 이 부분은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는 농촌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아이들로 인한 수입보다 지출이 더 클 것이기 때문에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대체 왜 그들은 끊임없이 임신을 하는가. 물론 임신과 출산, 즉 재생산권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권리이다. 또한 여성을 출산의 수단으로 여겼던 과거를 가진 인간사에서 재생산권은 여성에게 특히나 중요하다. 재생산권은 아이를 낳아도 되는 권리와 낳지 않아도 되는 권리 모두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재생산의 주체가 장애를 가지고 있든, 가난하든,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이든, 모든 사람에게 보장되는 권리이다. 가난하거나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출산을 막는 것은 극단적으로 말해 히틀러가 주장했던 우생학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정말로 그들이 가진 재생산권이 태어날 아이의 인생보다 중요한가?

 

수많은 가정이 있지만 감히 단언해보자면, 자인의 부모들은 아이를 낳지 않았어야 했다. 적어도 사하르의 죽음 뒤에는 무슨 수를 써서든 임신을 하지 않았어야 옳다. 그들은 어딘가-사회 전반과 그들을 낳은 부모 앞-에서는 피해자였으나, 그들이 낳은 아이들 앞에서는 가해자이기 때문에. 그들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든 것이다.

 

 

 

태어나버린 삶과 사라져버린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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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 어쩌면 자인이 아닌 그의 여동생, 사하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하르는 사실 영화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큼지막한 사건들의 시발점이다. 자인이 집을 나가고, 아사드를 찌르고, 그의 부모를 고소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모두 사하르다.

 

사하르는 자인이 모르는 곳에서 결혼과 강간과 출산과 죽음을 당했다. 관객들과 자인은 그저 그 모든 일의 결과만을 마주하게 된다. 또한 영화 자체도 자인의 시선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자인에게만 집중하기 쉽지만, 그럼에도 나는 사하르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다. 숱한 영화들에서 여성 캐릭터들이 주인공을 각성시키는(자인도 사하르를 통해 일종의 각성을 하게 되기는 하지만 비슷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용도로, 혹은 단순 오락용으로 소비되는 행태와, <가버나움> 속 사하르가 등장하고 사라지는 것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정 반대 지점에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사하르는 죽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영화의 모든 메시지를 만들고 동시에 허무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사하르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부모가 법정에서 얼마나 눈물을 흘리든, 자인이 학교를 다니고 인생을 꾸리고 가족을 만들게 되든, 사하르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 흐려질 것이다. 어쩌면 <가버나움>이 전하려 한 것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져버린 어린 생들이 너무나도 많다고, 그들을 기억해달라고.

 

자인의 엄마가 임신했던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안타깝지만 판결이 그들에게 중절을 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태어나버린 그 아이의 생은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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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세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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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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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자유롭고싶어
    • 에디터님의 글로 2019년에 가버나움을 처음 봤던 때 감정이 떠오르네요. 지구 저편 동시대에 고통받는 아이들의 존재를 알고나서 충격과 먹먹한 감정이 떠오릅니다. 부모의 책임과 사회의 책임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영화 중간중간 내비쳤던 아이들의 웃음이 전세계 아이들의 웃음으로 퍼지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0 0
  •  
  • 바두슴
    • 사람을 압도해버리는 절박하고 연약한 삶, 출구가 없어서 답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최소한의 사랑 그리고 사랑받을 권리가 필요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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