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부담이 될까 봐 답장을 수정했지만

글 입력 2021.05.21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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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요즘 어떻게 지내. 잘 지내고 있어?”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인다.

 

*

 

난 자격증 공부하고 있어. 취업 준비중이거든. 그리고 잘 지내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어. 밥도 잘 먹고 무난하게 지내고 있는데, 예전만큼 즐겁지가 않아. 좋아했던 영화도, 음악도, 산책도. 예전만큼의 울림이 느껴지지 않더라. 말로 하기는 어려운데. 내가 나일 수 있게 해줬던 어떤 것들이 전부 빠져나간 것 같아.


내가 카페 좋아했던 거 기억나지? 누구랑 가든지 가서 무엇을 하든지. 들어가면 은은하게 풍기는 커피 냄새와 잔잔한 음악. 그리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라떼를 참 좋아했는데. 요즘은 카페에 가도 마음이 편하지 않아.


너도 알겠지만 내 스마트폰에는 영화 달력이 있어. 그날 본 영화의 제목과 포스터, 감상평을 기록하는 영화 전용 기록장이야. 예전에는 영화가 끝나면 거의 30분 동안은 휴대폰을 붙잡고 놓지 않았던 것 같아. 쉴 새 없이 밀려드는 감정과 느낌, 의문점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 이렇게 적어 놓고 나중에 영화 달력을 돌아보면, 영화를 볼 때의 감각이 더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 같더라. 길게 채워진 문장들에 뿌듯하기도 했고.


그래서 정말 열심히 적었었는데, 요즘엔 그게 안 돼. 활짝 열렸던 감각의 댐을 누군가 강제로 닫아버린 것처럼, 예전만큼 많은 게 느껴지지 않아. 그래서 쓸 수가 없더라.


옷도 그래. 누구나 인정할 만큼 세련된 스타일은 아니지만, 나만의 개성이 살아있는 옷차림을 입었었는데. 아이보리와 베이지, 브라운. 그리고 연한 파스텔 색감의 옷이 주던 따뜻한 느낌을 좋아했어. 운동화보다는 로퍼, 치마보다는 바지. 대부분은 무지였지만 가끔은 체크와 스트라이프로 포인트를 주던 옷들.


이 옷을 보니까 네가 생각났다는 말. 난 이 말이 참 좋았어. 나만의 고유한 개성이 있고, 그 자체로 나를 인정받는 느낌을 받았거든. 물론 나를 떠올려준 그 사람의 마음까지도 말이야. 그래서 더 열심히 옷을 입었던 것 같아.


무채색이 가득한 지금의 옷장을 보면 네가 많이 놀랄 것 같아. 나를 잘 알던 너니까. 하지만 지금은 외출을 자제해야 하는 시기이고, 또 공부를 하다 보니까 밖에 나갈 일이 많이 없더라고. 그러다 보니 어디서든 무난하게 입기 좋은 검은색 옷을 찾게 되더라.


너에게 보낼 답장을 쓰다 보니 알게 됐어. 좋아하는 게 없어진다는 건 생각보다 더 큰 상실감을 준다는 걸. 사람을 무감각하게, 또 조금은 우울하게 하더라. 코로나로 인한 무기력과 취업을 준비하는 부담감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 같아. 그래서 잘 지낸다고는 말 못하겠다.


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며칠 전부터 틈틈이 마음공부를 하고 있어. 유튜브에 있는 관련 동영상을 보고, 책도 읽으면서. 지금 공부하고 있는 자격증을 따면 새로운 활동도 시도해보려고. 아마 운동을 시작할 것 같아. 부디 너는 이런 상태가 오지 않도록 네 마음과 취향을 잘 존중해주었으면 좋겠다.


나의 답장이 너에게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길 바라.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어? 참 궁금해.

 

*


바쁘게 움직였던 손가락이 멈춘다. 그리고 화면을 오래 응시하다가. 이내 지우기 버튼을 누르고 다시 움직이는 손.


“나야 잘 지내지! 자격증 공부하고 있어 ㅎㅎ 너는?”

 

그리고 전송.

 

 

[최예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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