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패션과 자기표현: 우아한 규칙과 깨트림 속에서 자신을 선택하는 즐거움 - 사토리얼리스트 맨

글 입력 2021.05.19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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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게 된 건 평소 명사에 대한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잘 모르는 분야의 명칭과 용어들에 대한 흥미는 곳곳에서 자극받는데, 패션도 그중 하나다. 특히 시간을 머금고 있는 의복들의 명칭을 궁금해한다. 박물관에 걸려 있고 시대물에 나올 법한 의상들, 어디서 본 적은 있지만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잘 모르는 옛 장신구의 이름 같은 것들. 멋지게 각 잡힌 슈트에 대한 흥미도 이런 관심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슈트의 매력은 디테일한 스타일링에 있다. 어떤 모양 라펠의 재킷을 입을지, 단추가 몇 개 달린 재킷을 택할지, 넥타이는 어떤 방식으로 묶고 슈트의 직물과 색은 어떠한지 등등. 물론 어떤 부류의 옷을 입는가에 따라서도 성격이 드러나지만 ‘슈트 안에서’ 이렇게 세밀하고 복잡한 개성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은 슈트에서 두드러지는 패션의 관습성 때문일 것이다. 이미 그 패션 안에 전통과 변주가 체계적으로, 풍부하게 있는 덕분이다. 그러나 <사토리얼리스트 맨>이 말하고자 하는 패션의 중점은 관습보다도 ‘입는 사람의’ 개성 표현과 즐거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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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리얼리스트 맨>의 저자 스콧 슈만의 패션관은 변화한 남성성 개념을 내포한다. 슈만이 직접 길 위에서 카메라 렌즈에 담은 ‘옷 잘 입은’ 남자들의 사진은 하나하나 패션 화보가 되어 이 책에 함께 실려 있다. 책을 읽기 전에 그 사진들만 훑어보아도 다양한 차림새를 볼 수 있다. 과감한 무늬의 스카프를 매치하거나, 치마(혹은 치마바지)를 입은 남성, 다양한 핏의 반바지를 입거나 귀걸이 등 액세서리를 찬 남성이 여럿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태도 또한 자연스럽다.

 

 

성별에 따른 역할과 규범은 과거의 것이 됐다. 스콧과 내가 속한 세대에 적용되던 보편적인 미의 공식 또는 ‘전형’들이 완전히 뒤집혔다. (...) 스콧 슈만의 작품은 전형이 변화하는 과정을 담은 성실한 기록이다. (...) 내가 “남자들이 변했다”고 말한 것은 그들이 감정적 자유를 얻었다는 뜻이다. 오늘날 남자는 자신의 내면세계, 약한 면, 독특한 면, 낭만적 사고를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

 


위에 인용한 문장은 발렌티노 디자이너인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가 이 책의 서문을 위해 쓴 글의 일부로, <사토리얼리스트 맨>은 물론이고 현대 패션관의 배경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자유로운 개성 표현도 무에서 이뤄지는 게 아니다. 관습을 깨거나 재해석하여 자기만의 표현으로 바꾸려면 먼저 그 관습을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책의 처음은 체형별 옷 입기 규칙과 함께 슈트의 기본 구성, 스타일링 팁에 대해 소개한다.


규칙과 관습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지만 저자는 항상 예외 혹은 의도적인 선택을 존중하고 독려한다. 그러나 이 책 18p에서 26p까지 다루고 있는 ‘체형에 맞게 옷 입기’ 정보는 꼭 취해가길 바란다. 기성복 구입 시 어려움을 겪는 체형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각각 기본적인 슈트 핏을 추천해주는데, 이 유형 중에서 두 가지 정도를 혼합해 자기 체형에 도움될 팁을 가져갈 수 있다.


슈만이 말했듯이, 자기 ‘체형에 어떤 옷이 어울리는지 알면 어떤 패션이든 잘 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p. 16) 자기 체형을 파악하는 것 자체에는 큰돈이 들지 않으며 마음에 들지만 한 부분 아쉬운 옷을 만났을 때 어디를 수선하면 더 어울리는 옷이 되는지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참, 슈만은 옷 수선해 입기를 책 곳곳에 걸쳐 수차례 권장하고 있다.


또한 슈트 재킷의 유형과 각각의 디자인, 라펠과 어깨 실루엣, 벤트의 종류를 그림과 함께 일목요연하게 알려준다. 자기 취향을 알아보며 슈트 스타일링에 참고하기 좋을 듯하다. 테일러샵에서 맞춤 정장을 주문해 입을 사람들을 위한 조언들도 있다. 흥미롭고도 친절하게 양복점에 가기 전, 재단사를 만날 때와 만난 후로 시점을 세분화하여 상황별로 필요한 설명을 해 준다.


슈트 외에도 니트, 프린트 셔츠 등 옷의 종류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가 하면, 단색으로 입기나 레오파드 무늬 활용 등 다양한 패션 소재를 소개한다. 이런 내용들은 책에서 슈만이 직접 찍은 스트릿 패션 화보들과 함께 확인해 보시길. 다음은 이 책에서 접할 수 있는 주요 패션 개념에 대해 알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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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레차투라: 의도된 어색함. 그러나 아름답게.


 

스프레차투라(sprezzatura)는 원래 ‘약간 헤롱헤롱한’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이다. 패션의 측면에서는 너무 애쓴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한 두 가지 아이템을 일부러 어색하게 배치하는 기술을 말한다. 예를 들면 손목시계가 셔츠 소매 위에 오게 착용하거나, 넥타이를 니트 조끼 밖으로 내거나, 넥타이핀을 가로 방향이 아닌 사선 방향으로 끼운다던가 하는 것이다.


그냥 어색하기만 해선 안 된다. 미적으로 보여야 한다. 말은 헤롱헤롱하다지만 실은 패션의 규칙을 매력적으로 깨는 의도적인 선택이며, 센스 있게 계산된 패션 기교이다. 슈만에 의하면 이러한 의도적인 무심함은 sns에 파급력 있게 전시되며 폭발적으로 유행하게 됐다.(p. 58)


그 어색함을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줄지는 결국 자신의 선택이다. 이를테면 그 시각적인 삐끗함(물론 정말로 삐끗한 게 아닌)을 칼라나 넥타이에서 만들어낼지, 소매를 접는 방식으로 만들어낼지, 재킷 단추를 잠그는 방식이나 바지와 신발의 매치를 어색하게 할지 정하는 건 순전히 자기 취향이다. 나는 이것도 결국 강한 개성 표출 방식이라고 본다. 원래 완벽하게 만든 물건 위에 그 완벽함을 깨면서 자기만의 포인트를 올려둘 때가 하나부터 열까지 개성적인 조합의 물건을 볼 때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여담으로 자기만의 스프레차투라를 표현할 때 규칙은 단 하나이다. ‘남의 스프레차투라를 베끼지 말라.’(p. 58) 그러나 모델이 된 ‘원본’을 존중하는 오마주는 괜찮은 듯하다.

 

 

 

자기표현, 자기만의 제복


 

슈만은 책의 말미에서 ‘제복에 도전하라’고 말한다. 개성 표현을 중시한다면서 갑자기 제복이라고 하니 다소 의아하다. 그러나 앞에 중요한 조건 하나가 붙는다. ‘자기만의’ 제복을 만들어 볼 것.


그는 자기만의 제복을 패션업계 에이전트인 노보루 카쿠타의 스타일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카쿠타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두세 가지의 색상과 실루엣으로 선택지를 좁힌 후 그 안에서 풍부한 변형을 시도한다.(p. 287) 파랑, 흰색, 회색이 의상의 넓은 부분을 차지하고, 갈색 아이템으로 포인트를 준다. 그의 룩에서 중요한 것은 핏이다. 색상과 무늬가 주의를 분산시키지 않는 경우 정확한 비례감이 중요해진다.(p. 287)


핵심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선택지에서 없애나가면서 잘 어울리는 옷을 찾아 입는 것이다. 좋아하는 아이템 한두 가지를 찾아내고, 그것들이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지 판단하고, 점점 군더더기를 없애 자기화하면 된다. 이를 위해선 유행을 꿰는 것보다는 다양한 옷을 많이 입어보는 것과 자기 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게 중요할 듯하다. 결국 책의 시작에 나왔던, 체형에 따른 옷 입기라는 가장 기본적인 규칙의 완성 단계가 ‘자기만의 제복’ 찾기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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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제복이 아니더라도, 취향이 주는 즐거움


 

나만의 제복에 대해 생각해 봤다. 옷으로 자기만의 실루엣과 컬러, 이미지를 만드는 것도 해 보고 싶은 일이긴 하다. 그건 어딘지 모르게 매끈한 선 같은 걸 소유하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아주 잘 만들어진 도자기의 흠 없는 윤곽선 같은 것. 어울림을 찾아내는 것도 자기 자신을 빚는 일 같아서일까.


책을 덮기 전에 포스트잇을 붙여둔 화보들만 따로 훑어보았다. 이거 내 스타일이다 싶어 표시해놓은 것들이었다. 모아서 보니 취향이 드러난다. 미끈한 실루엣의 아우터에 욕심이 있고, 옷감이 흐르는 느낌이 있는 상의를 선호하며, 은근히 잔무늬 옷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그걸 다 합쳤을 때 정갈하기만 한 옷은 또 그렇게 안 좋아한다. 모두 조합했을 때 묘하게 튀는 느낌이 만들어지는 룩을 좋아한다.


물론 평소에 늘 튀게 입고 다니진 않는다. 개성 강한 것만 사 모으다 보면 옷을 돌려 입기 힘들어서 지출이 장난 아니게 커진다. 그래도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좋아하는 아이템들을 떠올려 보면 그럭저럭 취향 따라 입고 사는구나 싶어 왠지 안심이 된다.


‘자기만의 제복’처럼 완성된 형태는 아니어도 내 취향의 옷을 입을 때의 갖는 즐거움과 감회에 대해선 잘 알고 있다. 너무 바쁘고 매일같이 가야 하는 곳에 별로 꾸미고 싶지도 않아서 한동안 옷을 주워 입듯 입고 다닌 적이 있었다. 정말로 아무거나 주워 입고 다닌 건 아니고 코디한다는 생각 없이 입고 다녔다는 의미다. 그렇게 재미없는 상태로 살다가 언제 한번 옷을 정성스럽게 골라 입고 나갔는데, 내 취향의 옷을 입고 걷는 것만으로 행복감이 감돌았었다. 팔다리에 내가 좋아하는 옷의 자락이 사락사락 스치는 것만으로, 오후의 햇빛 아래서 좀 더 나긋하고 만족스런 상태가 되었던 날을 기억한다.


아마 무미하게 지내다 오래간만에 자기표현이 이뤄져서 그랬을 테다. 마음에 드는 옷을 고작 5분이라도 더 들여 골라 입었다는 사실 자체로. 내가 좋아하는 옷이 피부에 맞닿아 존재감을 드러내며 그 사실을 상기시킬 때마다 나는 오늘 나를 좀 더 대접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스콧 슈만이 <사토리얼리스트 맨>에서 거듭 말하던 ‘패션은 행복해지기 위한 도구여야 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어야 한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장미가 피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갈수록 무더워질 날들을 대비하여 나는 또 어떤 옷으로 일상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지, 봄의 옷장을 정리하며 고민해 봐야겠다.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지만, 신경 쓰는 만큼 즐거워질 옷과 옷의 조합을 좀 더 편리하게 만들어 줄 테니.

 

 

[신성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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