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무용함의 유용함을 믿는 당신에게 - 시가 사랑을 데리고 온다

‘그 무엇도 하찮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시’라면
글 입력 2021.03.04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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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좋아하지만 시는 어쩐지 친해지기 어려웠다. 행간 사이에 축약된 의미를 찾아내기엔 그 깊이가 너무 깊었던 탓일까. 호기심에 시집 몇 권을 사 보았지만 몇 번 펼쳐지지 못하고 책장에 고이 자리하곤 했다.


그러다 작년에 한 시인의 강의를 들었는데,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시는 전달하고 싶은 전언들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이해하기 어려운 게 당연한 것이라고.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우리의 감정, 감각,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명징한 한 단어가 아닌 에둘러 말하는 비유적인 표현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나는 네가 그리워”라는 말과 죽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것에서 느껴지는 그리움은 차이가 있다.


그때부터 시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여전히 시를 읽는 것이 어렵지만, 시에 대한 심적인 거리감이 단번에 좁혀졌다. 시집을 다시 펼쳐보고 싶었다. 그래서 <시가 사랑을 데리고 온다>라는 책을 집어들었다.

 


시가사랑을 입체사진.jpg

 

 

<시가 사랑을 데리고 온다>는 나태주 시인이 직접 뽑은 120편의 해외 시를 수록한 시집이다.

 

시인의 낡은 노트에 적혀 마음의 버팀목이자 삶의 위로이자 꿈을 전달해줬던 작품들에 짧은 감상을 덧붙인 형식이었다. 나태주 시인의 안내를 따라 시를 읽다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들 속에서도 분명 내게 닿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책은 총 5장으로 각각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살아남은 자의 슬픔’, ‘사랑하기 위해 상처받는 것이기에’, 서러워 마라 머지않아 때가 온다’, ‘희망에는 날개가 있다’라는 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을 대표하는 시의 제목을 선정한 것인데 이 중 마음에 남았던 시들 몇 편을 소개하고 싶다.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


 

 

마음속에서 풀리지 않는 고민들에 대해

인내함을 가져라.

고민 그 자체를 사랑해라.

지금 당장 답을 얻으려 말라.

지금 당장 주어질 순 없으니까.

중요한 건

모든 것 그대로 살아보는 일이다.

지금 그 고민들과 더불어 살라.

그러하면 언젠가 미래에

너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그 시간에

삶이 너에게 답을 가져다줄 것이리니.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답이 없는 고민에 괴로워했던 기억이 스친다. 막연함에 영영 답을 찾지 못할까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젠가 미래에 너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그 시간에’ 찾아온 답을 마주하며 막막하기만 한 마음이 단단해졌다.

 

이 시를 그때 알았더라면 그 불안이 조금은 덜 버거웠을까. 시를 마음의 버팀목이라 말한 나태주 시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우연


 

 

나는 하늘의 한 조각 구름

어쩌다 그대 물결치는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우더라도

놀라지 마세요

기뻐하지도 마세요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니까요.

그대와 나 어두운 밤바다에서 만났지요

그대는 그대의 길이, 나는 나의 길이 있어요

그대가 나를 기억하는 것도 좋겠지만

더 좋은 것은 나를 아예 잊는 일

우리가 만났을 때 쏟아졌던 눈부신 빛조차도.

 

- 쉬즈모

 


찰나의 만남이어서 더 오래 남는 사람이 있다. 우연히 만나 빛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사람. 함께 하지 못하고 각자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운명 앞에서 시인은 자신을 아예 잊으라 말한다. 불현듯 자신에 대한 기억이 하늘의 구름 한 조각이 되어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우더라도 금세 사라질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시인의 마음도 역시 그럴까. 시인은 영영 그 사람을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그 사무침을 알기에 그 사람은 경험하지 않기를 바라며 보내는 편지 같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문장이 마음을 울린다. 시의 아름다움은 이렇게 존재한다.

 

 

 

정원사


 

 

백 년 뒤에 내 시를 읽을 독자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지금 이 화려한 봄날 아침

내 정원에 만발한 꽃 한 송이도

그대에게 전해줄 순 없습니다.

저기 저 구름 사이에 비쳐 나오는

눈부신 황금 햇살도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창문을 열고

창밖의 정원을 내다보세요!

바로 당신의 꽃 피는 정원에서

백 년 전에 사라진 이 꽃향기의

흔적으로 찾아보세요.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시를 매개로 해서 과거와 현재가 이어진다. 시인은 말한다. 시 안에서만 시를 읽지 말고 자연 속에서 찾으라고. ‘당신의 꽃 피는 정원에서/ 백 년 전에 사라진 이 꽃향기의. 흔적으로 찾’으라고. 그것이 진정한 시다.

 

P.95

 


시간을 초월하고 자기 안의 시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 시의 본질이라면 우리는 모두 시인이 될 수 있다.

 

출근길에 마주한 개나리를 보고 봄을 실감하고, 빵집 옆을 걷다 맡은 빵 냄새에 여유로운 주말 아침을 떠올리곤 한다. 무심코 재생한 음악에 헤어진 연인을 떠올리고 마음 한 켠이 텅 비어버릴 때도 있다. 시가 말하는 것은 이런 순간들이다.

 

일상적으로 여기는 모든 순간은 언제든 시가 될 수 있기에, 우리는 시 쓰는 사람을 말할 때 화가나 소설가처럼 집 가家 자를 쓰는 대신 시인, 사람 인人 자로 부르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사람들이 살아가며 쉽게 흘려보내고 마는 사소한 것들을 붙잡는다. 그리고 명확하지 않은 언어로 담은 삶의 장면을 우리에게 건넨다.

 

그것은 때로는 무용해보이지만 선명한 감각을 남긴다. 그게 우리가 시에 위로받는 이유일 것이다. 누군가가 ‘그 무엇도 하찮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시’라고 말한 것처럼 나는 그렇게 무용함의 유용함을 시를 통해 배운다.

 

 

나태주 시인 이미지.jpg

 

 

그런 것이 시라면, "시가 사람을 살리는 좋은 약이라는 믿음을 나는 한순간도 놓아본 적이 없답니다."라는 나태주 시인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 길을 잃어 앞이 막막할 때, 마음의 상처로 외로울 때, 세상을 살아갈 힘을 잃어버렸을 때 마주한 시 한 편이 그 어떤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안다.

 

두보와 심보르스카, 셰익스피어와 작자 미상의 시인까지 담아낸 이 책의 한 페이지가 언젠가의 나에게 길잡이이자 위로가 되어 줄 거란 확신이 든다. 시의 힘을 믿고 싶고, 믿고 있는 당신에게도 이 책을 전해주고 싶다.

 

 

 

신소연.jpg

 

 

[신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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