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공주 햄릿의 치열한 왕좌 쟁탈전, 연극 '햄릿' [공연]

글 입력 2021.02.27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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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국립극단의 연극 '햄릿'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 햄릿.

 

 

나에게는 가슴 뛰게 하는 이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먼지가 펄펄 날릴 케케묵은 그 이름.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선보였던 것이 1600년쯤이었으니 고루해 보이고 먼지 날린다는 표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실제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400여 년의 시간 동안 기억해달라는 햄릿의 유언에 따라 햄릿의 이름은 호레이쇼에게로, 그를 본 사람들에게로, 그 후손들의 후손들에게로 전해져 왔다. 이제는 햄릿을 읽지 않은 사람마저 그 이름을 알 정도다.


그러나 너무 유명한 것들은 진부하게만 느껴진다. 햄릿처럼 매 순간 공연되고 있는 작품은 더욱 그렇다. 햄릿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매년 햄릿을 소재로 한 작품이 올라오는데, 올해에도 상반기에만 세 명의 햄릿이 찾아올 예정이다. 수백 년 전 영국의 어딘가에서 공연되고 있었을 햄릿을 지금, 우리가 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원작에 대한 애정으로, 셰익스피어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충실히 극을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객들은 이미 너무 많은 햄릿을 보아왔다. 햄릿의 문장들은 어느새 울림이 아니라 상식과도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400년의 시간 동안 사라지고 변한 것들도 많다. 고뇌하는 햄릿의 이야기는 가져가지만 변화가 필요했다. 수많은 햄릿이 있었기에 햄릿들은 지금 이곳에서 자신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를 고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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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온라인극장 연극 '햄릿' | 국립극단 제공

 

 

이번 국립극단의 '햄릿'은 그런 의미에서 꼭 보고 싶었다. 여자 햄릿이라고 했다. 최근 공연계에서 젠더 프리가 하나의 경향처럼 시도되곤 했지만 무게감이 다르게 느껴졌다. 햄릿이 공주가 된 만큼 오필리어는 남자가 되었고 많은 부분이 각색되었다. 켜켜이 쌓여온 왕자 햄릿들의 이름 사이, 공주 햄릿의 예고는 나를 설레게 했다. 햄릿이 공주가 된다면 과연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기다림이 참 길었다. 연극 '햄릿'은 햄릿을 덮치는 거친 비극의 파도처럼 수많은 풍랑을 만났다. 명동예술극장 화재 복원 작업이 겨우 끝나 공연을 준비했지만 다시 코로나로 극장 문을 닫게 되며 관객들과 만나지 못했다. 그 사이 해가 바뀌었다. 하지만 연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햄릿은 다시 무대에 오른다. 온라인 극장을 통해 공주 햄릿이 무대에 당당히 섰다.


실제로 만나보니 햄릿에게 성별이 중요한 것이 아니더라. 많은 부분이 달라지고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지만 그것이 여성이라는 성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이 극이 성별에 관계없이 공연되었으면 좋겠다는 제작진의 말처럼 그저 햄릿이라는 인간의 이야기였을 뿐이다.


그렇게 어느 곳, 어느 때를 살았던 또 다른 햄릿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1. 어느 곳, 어느 때의 햄릿



햄릿은 다급히 무대에 뛰쳐 오르자마자 광기의 웃음을 터트린다. 우는 것과도 같다. 그녀는 미쳐버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배를 타고 돌아오느라 선왕인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늦었다. 아버지가 왜 죽었는지도 모르겠다. 혼란스러운 햄릿이 마주한 것은 무기질적인 표정으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합리적으로 종결짓는 조사위원회의 발표다. 이것이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결론이라고 했다. 선왕의 이름으로 쓰여지던 역사는 그렇게 단숨에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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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온라인극장 연극 '햄릿' | 국립극단 제공

 

 

숙부 클로디어스와 어머니 거투르드의 결혼식을 보며 햄릿은 분노에 차오른다.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던 자신을 무시하고 클로디어스가 왕이 되는 것에 화가 난다. 아버지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버지의 동생과 결혼하겠다는 어머니도 이해할 수 없다. 이 모든 부조리함은 햄릿만 느끼고 있는 것인가? "이 나라는 정말 최악이다."


햄릿은 아버지의 유령이 바닷가에 나타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간다. 유령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은 것은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며, 계획된 살인이다. 클로디어스에게 복수해라.

 

 

잘 있어라.

"어떻게 잘 있으라는 겁니까." 

기억하라. 

"아버지, 뭘요. 뭘 어떻게요."

 

 

망령은 허공으로 떠도는 말들을 내던진 채로 대답 없이 무책임하게 사라지고 만다. 햄릿은 복수를 계획하기 시작한다.


배우 이봉련이 연기하는 햄릿은 첫 등장부터 다른 햄릿들과 사뭇 다르다. 그녀의 햄릿은 아버지를 위한 복수보다 당연한 왕좌를 차지하지 못한 현실에 대한 복수에 무게가 실린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려 자기 연민에 빠져있지 않다. 복수를 할지 말지 끝까지 망설이는 우유부단한 햄릿도 아니다. 처음부터 복수할 대상과 복수로 얻어내야 하는 것이 명확하다.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밝혀 클로디어스를 무너트리고 햄릿이 왕이 된다. 그 자리는 자신의 것이었으니.


공주 햄릿은 모든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정치적인 햄릿이며, 현실적이다. 절대 광기로 도피하지 않는다. 광기는 복수를 피어나게 하는 자양분이다. 아버지의 망령마저 햄릿에게 복수할 확신을 준 도구 같았다는 건 착각일까?


미친 사람의 말처럼 부유하듯 느껴졌던 원작 햄릿의 대사들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사느냐, 죽느냐라는 대사는 공기처럼 맴돌지 않는다. 이는 현실에 대한 냉혹한 고민이다. 모든 말이 창처럼 날카롭다.

 

아이들 역할놀이 마냥 장난감 왕관을 쓰고 이불을 왕의 망토처럼 두르고 쏘다니면서도, 햄릿의 눈빛은 생생하다. 햄릿과 폴로니어스가 마주치는 장면에서는 모든 단어와 단어 사이가 아슬아슬하다. '아빠가 아끼던 신하'라고 폴로니어스를 비꼬는 장면이나, 역사서를 보며 역사는 계속해서 기존의 세력이 젊은 세력에게 쫓겨나는 것이라며 경고하는 부분은 그런 햄릿을 아무 타격 없이 대응하는 폴로니어스가 대단할 정도다.




2. 인간의 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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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온라인극장 연극 '햄릿' | 국립극단 제공

 

 

자신의 편인 것 같던 사람들은 자신을 배신했고, 자신이 믿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피해를 줄 수 없었다. 햄릿이 유일하게 매달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연극이었다. 연극은 세상의 창이요,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시대의 부조리를 말할 수 있는 도구였으니. 햄릿이 연극 배우들에게 걸고 있을 희망만큼 배우들의 모습은 진지한 이 극 너머에 존재하는 것 같다. 색색깔의 옷과 우스꽝스러운 연기는 이들이 비극의 밖에서 발언할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햄릿은 '인간의 덫'이라는 연극에 왕과 왕비를 초대한다. 왕을 독약으로 살해한다는 이 연극은 클로디어스에게 동요를 일으키는 동시에 빈 왕의 집무실에서 선왕 살해의 증거를 찾아올 덫이다. 햄릿은 연출가로서 왕과 왕비는 객석의 가장 좋은 자리인 R석에, 나머지는 S석에 앉히도록 명령한다. R은 로열이 아니라 리벤지이며, S는 사일런스를 뜻하는 말이다. 침묵으로 동조하며 행동하지 않으면 한 패라고 생각한 그녀는 리벤지 석과 사일런스 석에 앉은 모두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그러나 연극은 클로디어스에게 큰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며 실패한다. 다행히 집무실에서 선왕의 편지를 찾았지만 말이다.


햄릿은 왕비를 만나 이 모든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순간 화를 참지 못해 폴로니어스를 살해한다. 이 일로 클로디어스는 햄릿을 해외로 보내 죽이려고 했지만 햄릿은 꾀를 내어 돌아온다. 그 사이 폴로니어스의 아들이자 햄릿의 애인인 오필리어가 비극에 휩쓸려 자살한다. 복수를 위해 형 레어티즈가 햄릿과의 싸움을 기다리고 있다.


조사위원회는 햄릿에게 심신미약을 주장하라고 하지만 햄릿은 자신이 멀쩡하다고 말한다. 미친 햄릿의 짓이라고 자기를 용서하라던 원작의 햄릿과 달리 죄를 묵묵히 받아들인다. 햄릿은 레어티즈와 마지막 결투를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자신을 향한 덫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에게 칼이 주어질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포기하지 않는다. 어머니 거투르드에게도 도움을 청한다.

 

 

"착한 공주는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악한 공주는 뭐든지 할 수 있지.

내 연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나는 다시 무대에 오른다."

 

 

복수를 위해 두 시간 내내 달려온 햄릿이 마주하는 것은 결국 모두의 죽음이다. 전부 너절한 최후를 맞이하고 있다. 햄릿 역시 마찬가지다. 마침내 클로디어스를 찔러 죽이며 미소 지었지만 클로디어스는 사실일지 아닐지 모를 말을 남기고 죽었다. 진짜 원수에게 복수는 못하겠다고. 햄릿은 믿지 않는다.


햄릿은 드디어 왕관을 쓴다. 그러나 광기가 그녀를 다 태워버렸다. 왕궁의 한가운데 위치한 왕좌에 앉아 허물어지며, 햄릿은 친구 호레이쇼에게 말을 건넨다. 이 자리는 복수석이며, 이젠 침묵석에 앉아 입을 다물어야겠다고. 마지막으로 자신과 이 시대를 기억해달라고 말한다. 호레이쇼는 공주의 마지막을 지킨다.


이들의 시대는 끝이 났지만 시간은 흐른다. 국민들은 역사의 남은 잔해들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햄릿의 아버지에게 원한이 있던 젊은 포틴브라스가 이곳의 1대 총독이 된다. 햄릿이 꿈꾸었던 왕좌의 나라는 전쟁 뿐인 미래로 흐려진다.




3. 각자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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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온라인극장 연극 '햄릿' | 국립극단 제공

 

 

연극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무대 위에는 수많은 의자들이 존재했다. 그중 가장자리에 다른 의자들과 달리 옆으로 세워져, 모두를 바라보고 있는 의자가 있다. 햄릿이 쓰러트려도 거투르드가 일으켜 세우고, 다른 의자 뒤로 숨어봐도 결국 돌아가야 했던 그 의자는 햄릿의 몫이었다. 그렇게 각자의 자리가 운명처럼 정해져 있었다.


햄릿은"사느냐, 죽느냐. 어느 쪽이 나다운 것일까?"고민하며 죽음의 흙을 몸 위로 뿌려보았지만 결국 도달하는 생각은 "왕이 되면,"이었다. 아직 죽을 수 없었다. 당연히 왕이 된다는 생각은 오만한 것이라 많은 이들이 반박했다. 그러나 햄릿은 그 자리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복수했다.


햄릿의 의자가 있었듯이 이 극의 등장인물들에게는 각자의 의자가 있었다. 원작에서 동기가 모호했던 클로디어스와 거투르드는 각색을 통해 납득할만한 인물들이 되었다.


클로디어스는 형이었던 선왕에 의해 햄릿 대신 적대국에 볼모로 끌려가 죽을 뻔했다고 한다. 이는 선왕의 편지를 통해서도 밝혀진 바 있다. 그가 손을 씻으며 살기 위해 그랬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그가 완벽한 악인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게 만든다. 죽음의 순간, 선왕은 자기가 죽인 것이 아니라 포틴브라스의 자객에게 죽었다고 말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모든 일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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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온라인극장 연극 '햄릿' | 국립극단 제공

 

 

햄릿의 어머니인 거투르드는 궁금해지는 캐릭터가 되었다. 이 왕비는 대체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얘기를 듣고 싶어졌다. 거투르드는 명예를 지키고 싶고 왕비로서의 자리를 유지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던 인물이었다. 예상과 다르게 정치적 입지가 점점 좁아지는 것에 불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싶다는 광기가 햄릿의 것과 다른 것은 무엇인가?

 

거투르드의 입으로 묘사되는 선왕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그는 국민들의 신임을 잃어가는 전쟁광이었다고 한다. 명분도 끝도 없는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 과연 이 나라에 필요한 왕이었을까?


거투르드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햄릿에게 햄릿을 지키고 싶었다고 말한다. 자신은 왕궁에, 햄릿은 바다 한복판에 갇혀있는 동안 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이 유일했다고. 그런 그녀의 마음은 꽤 많은 장면에 새겨져있다. 쓰러진 햄릿의 의자를 일으켜 세워주는 것은 상징적이며, 햄릿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레어티즈에게 독약을 먹이는 행동은 강인하다. 그 과정에서 거투르드 역시 죽음을 다짐했다. 거투르드의 마지막 말은 "햄릿, 살..."이었다. 아마 살아남아라, 였을 것이다.


남자가 된 오필리어의 역할은 아쉬웠다. 오필리어는 원작의 순진하고 가련하기만 했던 모습을 벗어나 햄릿과 동일한 갈등을 겪게 되는 인물로 그려진다. 아버지의 죽음이 정말 햄릿과 관련이 없는지, 그렇다면 아버지가 선왕의 죽음에 무언가 연관 되었는지.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왜 죽어야 했냐고 물어보는 모습은 햄릿을 닮아있었다. 내내 검은 상복을 입고 있던 햄릿과 대비되어 흰옷을 입은 모습을 보고 오필리어가 어떤 행보를 보여줄지 눈여겨 보았다. 그러나 오필리어는 잠시 진실을 찾아다니다 죽어버렸다. 정의를 찾는 행위는 복수가 아니었기 때문일까?


햄릿은 원작부터 많은 아이러니로 가득한 소설이다. 복수는 항상 쌍으로 존재한다는 말처럼 햄릿과 클로디어스, 레어티즈와 햄릿, 포틴브라스와 선왕의 복수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얽힌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로 가득 찬 이들의 세계가 서로를 향해 돌아간다. 각색을 통해 햄릿의 유지가 아니라 점령되듯 이 나라를 차지한 포틴브라스의 군대를 생각하면 더 아득해진다. 전쟁에서 벗어났던 국민들은 다시금 끝없는 전쟁과 죽음으로 내몰리게 될 것이다.


햄릿이 이 복수로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 햄릿은 가만히 있었어야 했나?


 

 

4. 무덤 위에 세워진 왕좌



어느 곳, 어느 때에 위치한다는 이 '햄릿'은 시공간을 초월해 모든 시대의 이야기가 된다. 내면으로 침잠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 분출하며 햄릿은 보다 정치적이 되었고, 햄릿의 어깨 너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고뇌하는 인간을 넘어 복수하는 햄릿을 보며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적어도 나는 조금 더 객관적으로 햄릿을 바라보게 된 것 같다.


더불어 이 연극은 햄릿이 극중극을 활용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활용한다. 정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필 조사위원회를 첫 장면으로 시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총 세 번의 조사결과에서 진실이 담겨 있던 적은 언제였는가? 역사는 어떤 식으로 기록되는지, 복수는 정의를 실현하는 것인지. 선왕의 아래에서 전쟁으로 고통 받았을 국민들은 이 일들에 대해 뭐라고 생각했을까? 역병 때문에 거리두기로 무대를 찾아다녔던 애환마저 녹아있다. 국가와 예술가의 관계도 흘려들을 수 없다. 레어티즈와 오필리어가 예술 활동을 했다는 것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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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온라인극장 연극 '햄릿' | 국립극단 제공

 

 

햄릿의 말처럼 연극은 시대를 담는다. 시대의 여러 성난 파도들을 넘어 빽빽한 밀도의 '햄릿'이 우리에게 닿았다. 다시 연극의 힘에 대해 생각하며 햄릿으로 시작한 모든 질문들을 끌어안는다. 여전히 햄릿이 살아야했는지, 죽어야했는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햄릿이 어떻게 했어야 옳았던 것이냐고. 어쩌면 연극이 되어온 400년 간 이어진 질문일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파도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안개가 되었다가 비가 되었다가 눈물이 되어 흐른다. "인간은 정말 최악이다." 살인을 혐오하던 햄릿은 자신이 혐오하던 살인자가 되었고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클로디어스는 선왕의 죽음 위에 세워진 왕좌에 올라섰었다. 이제는 클로디어스의 시체를 밟고 무덤 위에 세워진 왕좌가 햄릿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아직 연극은 끝나지 않았다. 햄릿의 연극은 계속된다. 햄릿은 몇 번이고 왕좌에 다시 오른다. 그 자신이 답을 찾을 때까지, 그리고 우리가 답을 찾을 때까지. 오늘의 무대를 찾기까지 노력했던 이들과, 많은 관객들의 마음처럼 이어져가며 몇 번이고 세상을 비춘다.

 

그렇게 이어지는 수많은 햄릿의 역사 사이에 이제 새로운 햄릿의 이름이 쓰인다. 가장 치열하게 행동하고 쟁취하려했던 이봉련이라는 이름의 햄릿으로. 그녀의 광기 어린 이 시대의 햄릿에 찬사를 보낸다. 한쪽 눈에는 광기를, 다른 쪽 눈엔 눈물을 머금었던 공주의 격렬한 싸움을 나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최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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