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당신이 '까먹은' 사실 : 그런데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 [공연]

정교한 세상의 알고리즘
글 입력 2021.02.25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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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인물의 대사 못지않게 동작이 중요하다. 둘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연기하는 캐릭터가 사람이든 동물이든 발화할 수 있는 생명체 간의 서사 전개 방식은 대화 내지는 독백이고, 대화는 언어적/비언어적 형태가 동반된다.

 

<그런데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는 '움직임'에 훨씬 치우친 형태였다. 몸의 언어, 무용. 편집된 이야기에 익숙해진 요즘, 느리면서 설명이 거의 없는 이미지를 오랜만에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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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케이스 사진, 2020 ArkoCreate / ⓒSang Hoon Ok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야기의 키워드는 '사과'다. 빨갛고 둥그스름한 사과. 연극은 과일의 이미지보다 더 깊은 의미를 끄집어낸다. 이브와 아담이 먹은 선악과, 뉴턴이 중력(과학)을 발견한 사과, 스마트폰을 비롯한 여러 전자기기에 새겨진 사과.

 

텅 빈 무대에는 의자 하나, 그 위에 나무 같은 형상이 천장에 거꾸로 매달렸다. 의자에 올라서도 나무가 머리에 닿지 않는 멀찍한 거리였다. 바닥에 깔린 천은 바람을 타고 작은 포물선을 그렸다. 사람의 심장 박동 같은, 균일한 움직임. 의자엔 이브와 아담이 사과를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고민하는 것도 같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먹어도 될까. 이때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뱀이 지나간다.

 

두 사람은 이제 무대 앞으로 이동한다. 각자의 입 사이에 사과를 맞대며. 먹는 것 같기도 하다. 선악과를 먹었으니, 이제 세상을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심장 박동 같던 천이 점차 여러 포물선을 그리고, 꿈틀꿈틀 어떤 존재들이 양쪽에서 나온다. 이브와 아담이 먹은 사과를 주고받는다. 사람으로 자라난 이들 또한 세상의 선과 악을 구분한다.

 

그들은 일렬로 서서 천을 둘둘 말아 옷처럼 덮는다. 그리스로마신화에서 본 것처럼 신체 일부를 가렸다. 그들의 앞에서 이브와 아담은 첫 대화를 나눈다. '만약'으로 시작하는 물음을 이브가 던지고, 아담은 대답한다. 만약 하늘이라면, 만약 바다라면, 만약 바위라면, 만약 형태라면, 만약, 만약, ...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질문거리였다. 대답 중에 묘하게 반복된 말이 있다. '규정하지 않는'. 어떤 틀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는 바람을 이후의 인간들은 지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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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으로 몸을 감싼 이들이 그 둘을 둥글게 가둔다. 천으로 가려진 안을 알 수 없지만 혼란스럽게 요동친다. 움직임이 멎자 세 명의 여성만이 무대에 남는다. 인도에서 자연과 신을 표현하는 손동작, 서로 닮은 듯 다른 몸놀림. 때로 기괴하고, 때로 생동하고, 때로 정적이다.

 

무용은 움직임으로 전개되고, 움직임은 음악에 맞춘다. 기계음이 장내를 메운다. 세그웨이에 올라탄 AI가 등장한다. 뚝뚝, 끊긴 움직임과 반복되는 동작들. 사람이 질문하면 인공지능은 답한다. 막힘 없던 대답은 한 유형의 질문 앞에서 오작동한다. 정치, 경제 등 인간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점과 논란 앞에서 로봇은 어느 입장도 취하지 않는다. 질문의 설명이 부족하다는 게 말할 수 있는 전부인 것처럼.

 

이어진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빠른 비트에 맞춰 사람들이 등장한다.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시선을 화면에서 떼지 않는다. 목을 기준으로 둘로 나뉜 것 같다. 뇌를 포함한 위쪽은 기계처럼 정해진 말과 행동밖에 하지 못하고, 상체와 하체는 인간처럼 자유로이 움직인다. 하지만 뇌는 로봇의 것이어서 정해진 동작을 반복 수행할 뿐이다.

 

이쯤에서 무대를 넓은 시야로 바라본다. 천장에서 거꾸로 매달렸던 나무가 전신을 드러냈다. 푸르른 나무가 아니라 전깃줄로 휘감아진 형상이었다. 그 스산한 전깃줄은 끝도 없이 자라나 이브와 아담이 있던 의자를 뒤덮었다. 강한 조명이 로봇인지 사람인지 모를 이들의 그림자를 만든다. 그림자는 왜곡되었다. 실제 크기보다 과하게 크거나 작고, 서로서로 가리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자신의 뒤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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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케이스 사진, 2020 ArkoCreate / ⓒSang Hoon Ok

 

 

길을 걸어도, 버스나 지하철을 타도, 심지어는 눈앞에 사람을 두고도 까만 화면이 켜지며 알림이 뜨는 순간 모든 시선을 빼앗긴다. 현재, 자신이 사는 공간에서 시공간도 없는 세계로 빠지는 것이다. 무대 위 배우들이 보여준 캐릭터들은 우리의 거울이었다. 저마다의 방향으로 걷다가 누군가가 얼굴을 들이밀고 아는 척하면 곧바로 시선을 빼앗긴다. 사람의 옷을 갖춰 입고 있는 이 '누군가'는 알고리즘이다.

 

더 많은 세상을 알게 되었다는 현재의 풍족함과 편리함에 취해 조종을 당하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지능이나 능력의 부족 때문은 아니다. 알고리즘의 영역을 벗어난 인간은 생존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하고 싶든 하고 싶지 않든 소식, 이미지, 소리, 정보는 매 순간 쏟아진다. 더 '좋은 것'을 갖고 싶다는 열망으로 '정보 과잉의 시대'라는 짤막한 한 단어로 이 모든 현상을 뭉뚱그린다.

 

'맞아. 요즘 정보가 너무 많아서 찾기 어렵긴 하지. 그래서 큐레이션 해주는 서비스들도 많아. 많이 알면 좋잖아.'

 

시작은 눈에 보이는 '사과'였지만, 지금 우리는 사과를 먹은 수많은 사람들만 볼 수 있다. 순간의 기쁨과 즐거움, 웃음에 썩어 문드러진 사과가 감춰졌다. 끝없는 굴레에 갇힌 줄 모르는 행복한 우리들. 모두가 사과를 까먹고, 사과가 있다는 사실을 까먹었다.

 

과학의 발전이 무조건적인 악은 아니다. 사진이나 영상처럼 순간의 행복을 오래도록 보존하고 쉽게 꺼낼 수 있는 저장 기술은 축복이다. 다만 선과 악 중에서 악만 남은 무리가 있음을, 그래서 '타인을 방해하지 않도록 만든 무음 카메라'가 '불법 촬영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까먹지 말아야 한다.

 

이제 연극의 끝이다. 옹알이하던 아기가 사과를 가지고 논다. 먹고서 툭, 사과를 떨어뜨린다. 그리고 다시 줍는다. 아주 느린 동작으로 사과를 던지려고 한다. 하지만 던지지 못한다. 어느덧 시간은 훌쩍 지나 노인이 된 아기.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삿대질이 이어진다. 손안에는 사과를 꽉 잡은 채, 악만 남았다. 이게 우리의 미래가 되진 말아야 한다.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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