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림책 읽는 어른 [도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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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그 책을 읽는 사람을 멋있어 보이게 만드는 책들이 있다. ‘언젠가 한 번은 읽어봐야 하는데…’라며 벼르기만 하고 있던 유명 고전 소설이나, <정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이른바 ‘벽돌 책’을 읽는 사람을 보며 멋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조금 의외일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림책을 읽는 어른을 볼 때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림책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동화와 그림책에 관한 한 학교 수업을 들으면서부터였다. 수업 첫날, 교수님은 각자가 어릴 때 읽었던 동화나 그림책의 목록을 작성해서 제출해보라고 하셨다. 딱히 수업 주제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강의평에 좋은 후기가 많아서 무턱대고 수강 신청을 했던 나는 난감했다. 첫날부터 빈 종이를 낼 수는 없어서 몰래 인터넷 검색을 해가면서 기억 저편에 떠돌던 몇몇 제목들을 꾸역꾸역 적어냈고, ‘내가 어릴 때 이렇게까지 읽은 책이 없었나?’ 싶어서 앞으로 남은 수업이 험난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고, 교수님이 나눠 주신 책들을 하나하나 손에 집을 때마다 나는 번번이 내 예상이 틀렸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에즈라 잭 키츠의 <눈 오는 날>, 모리스 샌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 등 저자와 제목만 들었을 때는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던 책들을 펼치자, 깊숙이 묻혀 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니 어쩌면 ‘기억’이 떠올랐다고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언제 어디서 읽었다거나, 혹은 어떤 줄거리였는지가 떠오른 것은 아니니까. 대신 내가 떠올린 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하얗고 차가운 것 앞에서 발을 내딛기 전의 두근거림, 낯설게 생겼지만 무섭지는 않은 친구에게서 느껴지는 새로운 포근함, 여럿이 함께 몸을 쓰며 어울려 놀 때의 즐거움 등.
누군가 이 책들의 줄거리를 말해보라고 한다면 한두 마디로 끝날만큼 이렇다 할 서사는 없는 책들이었다. 그러나 어릴 때의 나는, 빨간 옷을 입은 아이가 하얀 눈 속에 서 있는 모습이나, 이상한 괴물들의 색감과 질감 같은 것에서부터 많은 걸 읽어낼 줄 알았던 것 같다.
교수님께서는 이 책들은 어린이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말씀하셨다. 어쩌면 오히려 어른들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이 말이 내게 가장 와 닿았던 건 나카에 요시오의 <그건 내 조끼야>를 다시 읽을 때였다. 이야기는 한 생쥐가 엄마가 짜 준 빨간 조끼를 동물 친구들 앞에서 자랑하면서 시작된다. 생쥐는 오리에게 조끼를 빌려주고, 원숭이, 사자 등 점점 더 큰 동물들이 입어보다가 마지막에는 코끼리가 입어본다. 마치 계란 후라이를 다시 날계란으로 돌려놓을 수는 없는 것처럼, 코끼리 사이즈로 늘어난 옷을 다시 생쥐에게 맞는 옷으로 돌려놓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아끼는 옷을 못 입게 된 생쥐가 상처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지막 판권 페이지를 보면, 늘어난 조끼를 그네 삼아 코끼리와 생쥐가 함께 놀고 있는 모습이 담겨있다.
자, 여기서 퀴즈 하나. 만약 여러분이 판사라면, 생쥐가 상처 받은 것은 이들 중 누구의 잘못이라고 판결을 내리겠는가? 애초에 옷을 자랑하며 오리에게 빌려준 생쥐 자신? 아니면 처음 빌려 달라고 한 오리? 중간에 옷을 입어 본 동물들 모두? 아니면 가장 덩치가 큰 코끼리?
아마 판결을 내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딱히 잘못한 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니었을까. 누구도 잘못하지 않고 아무도 해치려 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 상처를 주고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즐겁게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는 유치할 수도 있지만, 이 책을 통해 나는 빽빽한 글 없이도 충분히 울림있는 메시지를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업을 통해 그림책에 관심이 생긴 나는 그해 추석, 삼촌 댁에 갔을 때 (한때는 내가 읽었지만, 이제는 사촌 동생의 것이 된) 계몽사의 그림책 전집 옆에 앉아서 어릴 때 느꼈던 소중한 것들을 한 장 한 장 떠올리는 재미에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중에 몇 권을 사촌 동생 몰래 뽑아왔다는 것은 비밀이다(미안…).
나는 이제 서점에 가면 둘러보는 코너가 하나 늘었다. 알록달록하고 크기도 다양한 그림책들을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중고서점에서 어떤 어린이가 이미 졸업한 색 바랜 그림책을 물려보는 것도 좋아한다. 이전이라면 '이 나이에 유치하게 무슨'이라며 지나쳤을 그 책들 앞에서, 꽤 오래 머무르게 된다.
여러분도 어릴 때 읽은 그림책들을 다시 찾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관심이 생긴다면 새로운 그림책들을 찾아 읽어보자. ‘어른을 위한’ 그림책이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림책이 아니더라도 좋다. 글자가 아닌 그림에서도 생각보다 읽어낼 게 많다는 사실에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마음에 오래 남는 책들은 또 다른 어른에게 선물해보자. 책 선물은 취향에 안 맞으면 받는 이에게 부담이 되지만, 그림책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으니 선물하기도 좋다. 더 많은 그림책 읽는 어른들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당신에게 그림책을 추천한다.
[조예음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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