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림책 읽는 어른 [도서/문학]

글 입력 2021.02.22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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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그 책을 읽는 사람을 멋있어 보이게 만드는 책들이 있다. ‘언젠가 한 번은 읽어봐야 하는데…’라며 벼르기만 하고 있던 유명 고전 소설이나, <정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이른바 ‘벽돌 책’을 읽는 사람을 보며 멋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조금 의외일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림책을 읽는 어른을 볼 때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림책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동화와 그림책에 관한 한 학교 수업을 들으면서부터였다. 수업 첫날, 교수님은 각자가 어릴 때 읽었던 동화나 그림책의 목록을 작성해서 제출해보라고 하셨다. 딱히 수업 주제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강의평에 좋은 후기가 많아서 무턱대고 수강 신청을 했던 나는 난감했다. 첫날부터 빈 종이를 낼 수는 없어서 몰래 인터넷 검색을 해가면서 기억 저편에 떠돌던 몇몇 제목들을 꾸역꾸역 적어냈고, ‘내가 어릴 때 이렇게까지 읽은 책이 없었나?’ 싶어서 앞으로 남은 수업이 험난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고, 교수님이 나눠 주신 책들을 하나하나 손에 집을 때마다 나는 번번이 내 예상이 틀렸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에즈라 잭 키츠의 <눈 오는 날>, 모리스 샌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 등 저자와 제목만 들었을 때는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던 책들을 펼치자, 깊숙이 묻혀 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니 어쩌면 ‘기억’이 떠올랐다고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언제 어디서 읽었다거나, 혹은 어떤 줄거리였는지가 떠오른 것은 아니니까. 대신 내가 떠올린 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크기변환]눈 오는 날.jpg[크기변환]괴물들이 사는 나라.jpg

 

 

하얗고 차가운 것 앞에서 발을 내딛기 전의 두근거림, 낯설게 생겼지만 무섭지는 않은 친구에게서 느껴지는 새로운 포근함, 여럿이 함께 몸을 쓰며 어울려 놀 때의 즐거움 등.

 

누군가 이 책들의 줄거리를 말해보라고 한다면 한두 마디로 끝날만큼 이렇다 할 서사는 없는 책들이었다. 그러나 어릴 때의 나는, 빨간 옷을 입은 아이가 하얀 눈 속에 서 있는 모습이나, 이상한 괴물들의 색감과 질감 같은 것에서부터 많은 걸 읽어낼 줄 알았던 것 같다.

 

교수님께서는 이 책들은 어린이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말씀하셨다. 어쩌면 오히려 어른들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이 말이 내게 가장 와 닿았던 건 나카에 요시오의 <그건 내 조끼야>를 다시 읽을 때였다. 이야기는 한 생쥐가 엄마가 짜 준 빨간 조끼를 동물 친구들 앞에서 자랑하면서 시작된다. 생쥐는 오리에게 조끼를 빌려주고, 원숭이, 사자 등 점점 더 큰 동물들이 입어보다가 마지막에는 코끼리가 입어본다. 마치 계란 후라이를 다시 날계란으로 돌려놓을 수는 없는 것처럼, 코끼리 사이즈로 늘어난 옷을 다시 생쥐에게 맞는 옷으로 돌려놓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아끼는 옷을 못 입게 된 생쥐가 상처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지막 판권 페이지를 보면, 늘어난 조끼를 그네 삼아 코끼리와 생쥐가 함께 놀고 있는 모습이 담겨있다.

 


[크기변환]그건 내 조끼야.jpg

 

 

자, 여기서 퀴즈 하나. 만약 여러분이 판사라면, 생쥐가 상처 받은 것은 이들 중 누구의 잘못이라고 판결을 내리겠는가? 애초에 옷을 자랑하며 오리에게 빌려준 생쥐 자신? 아니면 처음 빌려 달라고 한 오리? 중간에 옷을 입어 본 동물들 모두? 아니면 가장 덩치가 큰 코끼리?

 

아마 판결을 내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딱히 잘못한 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니었을까. 누구도 잘못하지 않고 아무도 해치려 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 상처를 주고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즐겁게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는 유치할 수도 있지만, 이 책을 통해 나는 빽빽한 글 없이도 충분히 울림있는 메시지를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업을 통해 그림책에 관심이 생긴 나는 그해 추석, 삼촌 댁에 갔을 때 (한때는 내가 읽었지만, 이제는 사촌 동생의 것이 된) 계몽사의 그림책 전집 옆에 앉아서 어릴 때 느꼈던 소중한 것들을 한 장 한 장 떠올리는 재미에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중에 몇 권을 사촌 동생 몰래 뽑아왔다는 것은 비밀이다(미안…).

 

나는 이제 서점에 가면 둘러보는 코너가 하나 늘었다. 알록달록하고 크기도 다양한 그림책들을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중고서점에서 어떤 어린이가 이미 졸업한 색 바랜 그림책을 물려보는 것도 좋아한다. 이전이라면 '이 나이에 유치하게 무슨'이라며 지나쳤을 그 책들 앞에서, 꽤 오래 머무르게 된다.

 

여러분도 어릴 때 읽은 그림책들을 다시 찾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관심이 생긴다면 새로운 그림책들을 찾아 읽어보자. ‘어른을 위한’ 그림책이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림책이 아니더라도 좋다. 글자가 아닌 그림에서도 생각보다 읽어낼 게 많다는 사실에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마음에 오래 남는 책들은 또 다른 어른에게 선물해보자. 책 선물은 취향에 안 맞으면 받는 이에게 부담이 되지만, 그림책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으니 선물하기도 좋다. 더 많은 그림책 읽는 어른들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당신에게 그림책을 추천한다.

 

 

[조예음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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