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태연의 '사계'말고 노찾사의 '사계' [음악]

글 입력 2021.02.17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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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기계를 돌리는 하나의 부품이 된 것 같아요"

 

점심시간, 3년 차 대리님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최근 업무량이 많아진 그녀의 눈에는 피로가 역력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일개 직원인 내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도 다른 파트의 부품에 불과했으니까.

 

퇴근 후 지친 몸을 지하철에 실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말라비틀어진 동태 같았다. 그런데 그 옆에 수많은 동태가 비쳤다. 다들 이렇게 사는 걸까, 길게 한숨을 내쉬며 지하철에 내렸다. 그때 어디선가 경쾌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흰 구름 솜구름 탐스러운 애기 구름

짧은 셔츠 짧은 치마 뜨거운 여름

소금 땀 비지 땀 흐르고 또 흘러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저 하늘엔 별들이 밤새 빛나고

 

찬바람 소슬바람 산 너머 부는 바람

간밤에 편지 한 장 적어 실어 보내고

낙엽은 떨어지고 쌓이고 또 쌓여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흰 눈이 온 세상에 소복소복 쌓이면

하얀 공장 하얀 불빛 새하얀 얼굴들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도록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공장엔 작업등이 밤새 비추고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지하철 앞 광장에서 7080 길거리 공연이 한창이었고, 거리에는 아주머니로 가득했다. 손뼉을 치고 가볍게 리듬을 타며 옛 추억을 떠올리고 계신 듯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그날은 왜 그랬을까.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깔깔 웃으시는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제목도 모르는 노래를 끝까지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노래를 검색해봤다. 1989년에 발매된 『사계 -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곡이었다. 내가 아는 '사계'는 걸그룹 소녀시대로 유명한 태연의 '사계'에서 그쳤고, 이런 '사계'가 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1989년과 2019년의 사계는 30년의 세월만큼,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80년대 민중가요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줄여서 '노찾사')의 사계』는 365일 밤낮없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애환을 담았다.

 

아름다운 꽃이 피는 계절에도, 치마가 짧아지는 뜨거운 계절에도, 소슬바람이 부는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에도,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덮인 계절에도, 한결같이 공장에 갇혀 미싱을 돌려야만 했던 사람들을 묘사한다.

 

서글픈 마음을 경쾌한 리듬과 담담한 어조로 표현하여, 신나는 분위기의 멜로디와 상반되는 현실의 냉혹함이 역설적으로 더욱더 두드러져 나타난다. 그렇기에 오히려 "슬프다, 외롭다, 힘들다."라는 말 한마디 없이, 듣는 이로 하여금 오히려 더욱 큰 여운과 슬픔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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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에 태어나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내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그때를 생각하며 천천히 곡을 음미했다. 365일 밤낮없이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지금 보다 더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던 세대들, 그분들에게 '일'은 지금보다 더 절박한 생존이었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해서 몰랐던 것들, 그 시절의 처절하고 고단했던 모습들은 지금은 대부분 사라진 지 오래였다. 태연의 사계와 노찾사의 사계의 차이만큼 너무도 달라진 삶의 모습을 바라보며, 지금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은 그 당시에는 결코 당연하지 않았음을 기억했다. 그때의 아픔을 딛고 현재의 우리가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아래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끊임없는 투쟁과 희생이 있었다. 이 노래가 그날의 역사를 담고서, 30년이 지난 오늘의 나에게 전해졌다.

 

2021년에 이 노래를 들으며 위로를 받는다면 내가 이상한 걸까? 미싱을 컴퓨터로, 공장을 사무실/건물로 고치면 오늘을 위로하는 노래가 된다. 물론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좋아진 근무 환경과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일'이 주는 힘듦과 직장 내 부당한 대우는 여전히 존재한다.

 

천천히 노래를 곱씹으며, 나아진 환경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고, 동시에 오늘날의 일이 주는 괴로움을 위로할 수 있었다. 우리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이전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다음 세대에는 더 멋진 일을 물려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마지막엔 그런 물음만이 가슴에 남았다.

 

다음 세대의 아이들은 이 노래를 듣고 위로받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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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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