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안녕 빙봉, 너를 잊지 않을 수만 있다면: 기록의 이유

모든 걸 끌어안는 것만이 미덕은 아니지만
글 입력 2021.02.16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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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같이 놀 친구,

로켓을 타고 소리쳐

빙봉 빙봉

 

 

전 세계 수많은 어른이들을 울린 디즈니X픽사의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는 주인공 라일리의 상상 친구인 '빙봉'이 등장한다. 빙봉은 어린 라일리가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캐릭터로, 고양이, 코끼리, 솜사탕, 돌고래의 울음소리 등이 한데 어우러진 사랑스러운 모습을 갖고 있다. 눈물마저 사탕으로 이루어진 신비한 상상 친구 빙봉은 어린 시절 라일리와 늘 함께였지만 라일리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잊힌 존재가 되어 기억의 저장소를 홀로 떠돌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기쁨이와 슬픔이가 예기치 못한 일로 감정 컨트롤 본부로부터 이탈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이들은 빙봉을 만나 다시 본부로 돌아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기쁨이와 슬픔이가 감정 컨트롤 본부에 부재하자 라일리의 감정 상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됨에 따라 기억의 공간들이 무너져버리면서 기쁨이와 빙봉은 기억의 매립지로 추락하고 만다. 기억의 매립지에서 사라지면 라일리는 영영 그것을 기억할 수 없게 된다. 빙봉은 라일리의 행복을 위해 기쁨이의 탈출을 도우며 기꺼이 라일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길 택한다.


영영 사라져 버린 빙봉. 라일리는 이제 빙봉을 잊었다는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게 될 것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어쩌면 어느 날엔가 우리에게도 존재했고, 잊힌 빙봉이 있지는 않았을까 기억의 저장소를 뒤져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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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질 뻔한 빙봉이 떠올랐다.


그것은 라일리의 상상 친구처럼 솜사탕으로 만들어진 사랑스러운 코끼리의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현실에 존재한 적이 없었음에도 너무나도 현실감 있게 내 곁에 있었다.


막상 글로 적자니 조금 민망하지만, 그것은 다름 아닌 낙타였다. (왜 하고많은 동물 중에 낙타였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건물 뒤편 외벽에 화단에나 설치할 것 같은 얇은 철장으로 둘러싸여 만들어진 작은 우리에 낙타가 살고 있었다(고 상상했지만, 당시에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사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지금 와서 생각해 봐야 알 길이 없다.). 나는 오며 가며 늘 그 낙타를 지켜봤고, 꽤 자주 낙타가 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건물 뒤편을 기웃거리곤 했다.


그리고 그 낙타는 어느 순간부터 마치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기억에서 지워졌다.


이것은 인간이 성장하면서 있을 수 있는 필연적인 단계이겠지만, 이렇게 예기치 못한 순간 떠오르는 기억을 돌아보고 있자면 썩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이 만든, 오직 나의 기쁨을 위해 만들어진 상상 속의 세계를 어떤 의심도 없이 마음껏 즐기고 여행할 수 있다는 건 어린 날의 특권과도 같은 것이니까. 잊는다는 것은 잊었다는 사실까지도 잊는 것. 나는 내 인생에 실존했던지 아닌지 간에 있다고 믿었던 어떤 존재에 대해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그리고 아주 말끔히 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을 기억할 수는 없고, 모든 일을 기억하는 것이 단연 좋은 일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망각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과거의 퇴적을 잊으며 허물을 벗고 성장한다. 인간은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졌다. 멀어지면, 그리고 돌아보지 않으면 그것을 잊도록 말이다. 그러니 빙봉의 존재와 부재는 우리의 성장점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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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흘러가지 않도록 붙잡고 싶은 기억들이 계속해서 생겨난다. 기록했음에도 기록했던 날의 감정이 떠오르지 않아 괴로웠던 날이 종종 있었다. 자꾸만 잊고 싶지 않은 것들이 늘어가는데, 잊고 싶지 않은 것을 잊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 답답한 날이 많았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끌어안는 것만이 미덕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잊히는 날들은 내게 자주 슬프다. 친구와 추억을 되짚는 대화를 하다 친구는 잊고 나만 기억하는 장면들이 생겨날 때, 나까지 이것을 잊는다면 그 순간은 영영 태어난 적도 없는 시간이 되어 사라져 버리겠지 하는 마음에 나만큼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기억해주고 싶은 마음이 곧잘 든다.


내가 역리를 따라 기록하고야 마는 이유. 내 상상 속 빙봉이 지워지지 않도록 자꾸만 기억하려고 애쓰는 이유. 어쩌면 끊임없이 나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잊고 싶지 않아서 기억하려 하기보다는 그 경험, 그 사람, 그 대화, 그 분위기, 그 기억과 추억을 잊으면 결국 나라는 사람에게 무엇이 남을까 하는 의심에 대한 약간의 변명 혹은 합리화.


알 수 없다. 그러는 와중에도 일기는 쌓여간다. 심지어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 의미 없이 흘려보낸 시간에 대해서도 적는다. 그저 언젠가 그런 날들이 잊히더라도 일기장에 족적을 남긴 순간부터는 세상에 있었던 적 없는 순간으로 전락해버리지는 않을 거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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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애니메이션 <피터팬>의 마지막 장면에서 웬디의 아버지 조지가 꿈을 꾼 것 같은 웬디의 말에 혼란스러워하다 하늘을 떠도는 배의 형상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있잖아, 저 배를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아주 오래전,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말이야." 


내 안의 빙봉이 가능한 한 오래 내 곁에 머물길 바라면서, 오늘도 오늘의 나를 기록하기로 한다. 결국에는 잊게 되더라도, 두 번 다시 갈 수 없는 네버랜드처럼 꿈결의 잔상만이 남더라도. 그 모든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서 어렴풋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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