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랜 짝사랑 끝에 깨닫게 되는 것 (feat, 진눈깨비 소년) [도서]

네이버 웹툰 진눈깨비 소년, 오강재의 이야기
글 입력 2021.02.01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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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첨부된 모든 그림의 출처는 네이버 웹툰 '진눈깨비 소년'과 작가 '쥬드 프라이데이'님께 있습니다]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웹툰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진눈깨비 소년'이라고 말할 것이다. 모두에게 인정받는 최고의 웹툰은 아닐지 몰라도, 나에게만큼은 최고의 웹툰이다. 쥬드 프라이데이 작가님만의 잔잔한 서사와 유쾌한 유머, 그리고 깊은 감성을 담은 대사 하나하나가 웹툰을 보는 내내 마음을 울렸다.

 

진눈깨비 소년은 다른 웹툰과 달리, 잔잔한 수채화의 그림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낯선 그림체가 신선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잔잔하고 따뜻한 스토리와 잘 어우러지는 수채화의 감성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림체가 정말 별로라고 생각했다. 한창 웹툰을 좋아했던 시절, 대부분의 만화를 다 보고 나서 도저히 볼 게 없을 때 "이건 뭐 그림이 이래?"라고 투덜거리며 들어갔던 금요 웹툰이, 바로 '진눈깨비 소년'이었다. 그런데 그 웹툰이 내 인생 최고의 만화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처음엔 거부감이 들었던 그림체도, 이야기 자체에 깊이 빠지면서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되었다.

 

지금은 오히려 쥬드 프라이데이 작가님의 수채화 그림이 주는 촉촉한 감성에 푹 빠져, 무엇보다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심지어 작가님의 그림이 그려진 폰 케이스도 사용하고 있다. '진눈깨비 소년'이 매주 금요일마다 나를 행복하게 해줬던 2014년부터 2018년까지. 그때의 감동과 그 시절의 나를 잊고 싶지 않아서. 나는 지금도 쥬드 프라이데이 작가님의 그림을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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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웹툰의 매력 중 하나가, 잠시 스쳐 가는 조연들도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점이다. 주연들의 주변 인물, 모든 캐릭터 하나하나의 서사를 담고 있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게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했던 캐릭터는 '오강재'다. 주인공에 비하면 그리 멋있지도 않고, 한없이 서툴렀던 이 캐릭터가 그때는 왜 그리도 좋았을까. 아마도, 그 당시 내 삶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강재의 모든 대사 하나하나가 크게 내 마음을 울렸다.


주인공인 우진과 해나, 철민과 수연의 이야기. 그 외에도 여러 인물의 다채로운 이야기가 '진눈깨비 소년'에 담겨 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강재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주제가 짝사랑이니까. 그리고 도저히 내 능력으로는 '진눈깨비 소년'의 깊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모두 한 번에 담아낼 자신이 없다. 오강재의 이야기만 해도, 아주 조그만 부분을 간신히 담을 수 있을 뿐이다.

 

그만큼 다채롭고 깊은 감성이 담긴 이야기, 각자 저마다의 잔잔하고 따뜻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꼭 한번 '진눈깨비 소년'으로 향하는 문을 직접 열어보길 바란다. 촉촉하고 따뜻한 수채화로 가득한 세상은, 다양한 삶의 이야기로 지친 당신을 위로하고, 때로는 힘과 용기를 가져다주고, 때로는 힘든 사랑에 가슴 아파하는 당신께 소중한 것을 깨우쳐 줄지도 모른다.

 

미처 이 글에 담지 못했던 강재의 속 깊은 이야기도, 다양한 인물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도, 여전히 많이 남아 있으니 직접 보고 느끼는 행복을 누리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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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재의 이야기



오강재는 전형적인 고등학교 모범생이었다.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 학창시절 내내 공부에만 매진했고, 전교 1등을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시골에서 전학생이 찾아온다. 그의 이름은 '양철민'. 철민은 오자마자, 학교의 전교 1등을 갈아엎었다.


강재는 그에게 열등감, 질투심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자신과 전혀 다른 색깔을 가진 그에게 끌리기도 했다. 매일매일 공부밖에 모르던 삶을 살았던 강재에 비해, 철민은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즐기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 간절하게 1등을 원했던 자신과 달리 철민은 1등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좋은 성적을 받는 철민을, 강재는 도무지 좋아할 수 없었다. 반드시 찰스로부터 다시 1등을 뺏어오리라. 그런 다짐을 하면서 치열하게 공부했다.


저렇게 빈둥거리면서 찰스는 어떻게 1등을 할 수 있었던 걸까. 명문대 과외 선생님에게 수업을 받는 걸까. 특별한 공부 비법이 담긴 교재를 쓰는 걸까. 강재는 그가 어떻게 1등을 하는지 궁금해서, 방과 후 미행을 해보기로 한다. 그런데 철민은 방과 후 어느 미술 학원에 들어가는 게 아닌가?


"여기에서 비밀과외를 하는 걸까?!" 싶었지만, 철민은 그저 즐겁게 그림을 그릴 뿐이었다. 특별한 비결이 있을 것 같았던 그곳에는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걸 마음껏 즐기고 있는 녀석이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묘한 질투심과 열등감이 강재의 마음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라이벌 의식에 불타올라 공부 비결을 밝혀내기 위해 미행까지 했지만, 특별한 소득은 없었고 막 돌아서 집으로 가려던 찰나. 그 미술학원에서 '수연'을 만난다.


그것이 길고 긴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난 미국으로 떠났다.

수연에겐 작별인사를 하지 않았다.

시험을 망치고 도망치는 모습이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래도 수연의 생일에는 편지를 보냈다.

긴 편지는 역시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인사를 하고 오지 못해 미안하다는,

지금 생활하는 곳과,

공부하고 있는 것들과,

가끔 너를 생각한다는,

그리고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썼다.

두 장을 넘기진 않았다.


주소를 몰라 미술학원으로 보냈다.

보낸지 2주일 정도가 됐을까, 이메일로 답장이 왔다.

수연의 답장에는 온통 양철민 얘기뿐이었다.


수연은 똑똑한 아이다.

그 단 한 번의 메일로, 내게 X표가 적힌 메시지를 남긴 것이었다.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매년 12월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년에 더 좋은 한 해를 보내라고 썼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걸 바랐다.

그 정도면 그녀가 부담을 가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것만을 바랬다.


- 네이버 웹툰, 진눈깨비 소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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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이야기가 그렇듯, 아름다운 그녀와의 사랑은 주인공과 이루어지는 법이다. 수연은 철민을 좋아했고, 둘은 그렇게 연인이 된다. 그래서 강재는 좋은 오빠 동생 사이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유학을 가 있었던 강재는 간간이 편지를 보냈지만 한참 동안 수연을 만날 수는 없었다. 그렇게 길고 긴 시간이 지나, 학창 시절은 가고 사회인이 되었다. 강재는 방송국 PD가 되었고 수연은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방송국에서 수연과 함께 일을 진행하게 되면서 다시 재회한다.

 

오랜만에 만나 기쁜 마음도 잠시, 그녀의 모습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오랜 시간 연인으로 깊이 사랑했던 수연과 철민은 바쁜 업무와 잦은 출장으로 떨어진 시간이 길어지면서,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고 결국 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수연은 사랑과 일,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도 오랫동안 방황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주고 싶어서, 방송국 PD였던 강재가 먼저 일을 제안했다. 힘들어하던 그녀의 옆에서 강재는 묵묵히 그녀를 위로했다.

 

 

전에 받은 편지에서 수연은 철민과 사귀고 있다고 말했다.

축하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람이 솔직해야지.


수연은 나의 취업을 축하하며, 자신은 글을 쓰고 있는데 역시 생활을 해야 하니

방송국에서 글을 쓰는 아르바이트가 있으면 언제라도 알려달라고 했다.

난 회사를 샅샅이 뒤져, 라디오국에서 보조 작가 자리를 찾아내 수연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그 면접 자리에서 수연과 7년 만에 재회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어쩐지 조금은 지쳐 보였다.

생기 없는 그녀의 표정이 마음에 걸려, 

난 가능하면 최대한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그녀를 돕고 싶었다.


우연을 가장해 아침에 커피를 전했고,

우연을 가장해 점심을 같이 먹었고,

우연을 가장해 전철을 같이 탔다.

타인의 아픔을 이용해 기회를 잡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누가 뭐래도 이건 진심이다.

 

- 네이버 웹툰, 진눈깨비 소년 -

 

 

그리고 강재와 수연이 함께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끝나갈 때쯤, 오랫동안 자신이 품고 있었던 솔직한 감정을 수연에게 고백한다. 몇 년이었을까. 그녀를 향한 마음은. 어쩌면 다시 전처럼 지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용기를 냈다. 그렇게 진심을 담은 말을 그녀에게 전했다.


수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없이 강재의 곁을 떠났다.

 

 

난 어쩌면,

네가 거절하리란 걸 알면서도,

그렇게 되면 지금의 이 소소한 즐거움도 영영 사라지게 될 거라 확신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해"

 

-

 

어쩌면 짝사랑이란 건,

그녀 몰래 그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어떤 모습이더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 네이버 웹툰, 진눈깨비 소년 -

 


강재의 고백에 대한 대답을 듣지 못한 채, 수연과 연락이 끊기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우연히, 수연과 강재가 재회한 건 이듬해 4월이었다.

 


"미안해요. 

내가 강재오빠 마음을 이용했다는 걸 인정하고 사과할게요.

분명 오빠한테 위로받으면서,

다행이라고....

이 사람이라도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불안한 심정이, 결정하는 걸 방해했다고 생각했어요.

 

다시 제주도에 가서 걸으면서 생각했어요.

이기적이었다는 걸 알았고, 나답지 않다는 걸 느꼈고,

철민오빠에게, 또 강재오빠에게 상처를 준 죄로, 나도 벌을 받기로 했어요.

그게 내 결론이에요"

 

-

 

그녀는 자신의 외로운 마음이

나로 인해 흔들렸다는 이유로,

철민을 기만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좋아하는 내 마음을 이용했다는 이유로

두 사람 모두 사랑하지 않기로 했다.


난.. 난 너와 같은 여자를 본 적이 없다.

너처럼 아름다운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너와 같은 마음을 가진 여자를 본 적이 없다.


양철민, 너 이 자식, 내가 너를 다시 만나면...!

내 주먹이 바스러질 때까지 널 후려갈겨 줄 테다.


그녀가 멀어지고 있다.

후회는 없다.

난 진심으로 고백했고,

그녀는 진심으로 거절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감정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널 만나서,

풍요롭고,

참 고마운 시간이었다.


네가 있어,

난 사막이 아니라

초원을 걸을 수 있었다고,

그래서 조금도 지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다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고백한다.

 

- 네이버 웹툰, 진눈깨비 소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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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20대 초반, 나는 금사빠로 악명을 떨칠 만큼 외로움에 허덕이는 한 마리의 똥개였다. 당시 소유의 '썸'이라는 노래와 함께 '썸을 탄다'라는 말이 막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 나도 참 열심히 썸을 타기 위해 분주히 돌아다녔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만 같은 공허함과 대학 입시 실패로 부서진 자존감을 어떻게든 채우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연애'였다. 괴로운 현실을 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물론, 그렇게 노력한 것에 비해 결과는 엉망이었지만.


어쩌면 그때 나는 사랑이 뭔지 몰랐던 것 같다. 그저 가슴의 떨림, 손을 잡고 싶다는 욕구, 긴장과 설렘이 적절하게 섞인 도파민 덩어리의 그 어떤 호르몬 작용을 '사랑'이라 생각했던 걸지도.


그런 나의 열정이 점차 식어갈 때쯤, 그녀를 만났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서 주인을 잃어버린 지갑을 하나 줍게 되었다.

 

누가 알았을까, 그게 오랜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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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으로 잠깐의 설렘이 아닌, '진심으로 사랑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찌질하고 소심했던 혼자만의 사랑이었지만. 처음에는 이게 사랑인 줄도 몰랐다. 봄비가 내리는 그 날 지갑을 처음 주운 이후 1년이 지나고 나서야, 내가 느끼는 이상한 감정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땐 이미 아주 절친한 친구였기에, 또 그녀가 나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내 감정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원하는 걸 해주는 것이 내겐 사랑이었다.

 

주변 친구들이, 왜 그렇게 미련하고 바보 같은 짓을 하느냐고 매번 잔소리했다. 호구 같은 나를 보며, 진심으로 안타까워서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이 나는 정말 행복했다. 사랑이란 건 보답 받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란 걸,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내가 이때까지 한 건, 사랑이 아니었구나. 사랑이란 건, 하면 할수록 오히려 내가 더 행복해지는 것이구나.


물론 그 과정은 지금 내가 회상하는 것만큼 즐겁고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전할 수 없는 마음을 두고 괴로워하기도 했고, 사랑받지 못하는 나를 두고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단순히 설렘과 자극으로만 점철되어 있었던 금사빠 시절보다,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진심으로 상대를 위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그때의 내가 훨씬 더 멋있고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단지 혼자만의 사랑이었다는 점이,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는 엔딩이 타인이 봤을 때 조금 안타까운 감정을 자아냈을 뿐.


옛 어른들이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면 결과에 상관없이 배움을 얻는다'라고 하셨던가? 진실된 사랑은 '내 감정, 내 욕구만 중요하게 생각했던 자기중심적인 나'에서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상대의 마음을 먼저 헤아릴 줄 아는 성숙한 나'로 변화시켰다. 힘들었지만 나를 성숙하게 만들어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는 사랑했고, 그로써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하면서 자신을 잃어버린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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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나를 위로하고 이해해 준 것은, 가장 가까운 친구도 가족도 아니었다. 그림체가 너무 이상해서 "뭐 이런 게 다 있어?"라고 투덜거리며 클릭한 웹툰이었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내 마음을 웹툰이 알아준 것이다. 진눈깨비 소년의 오강재를 보며, 내 마음을 정리했다.


그래, 이걸로 됐다. 보답 받지 못했던 이 마음은, 어쩌면 이미 보답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나는 너로 인해 풍요롭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므로, 너를 향한 마음에는 오직 고마움이면 충분하다. 질척거리는 미련도, 내가 준 마음을 돌려받겠다는 욕심도, 모두 쓸데없는 감정이다. 모두 고마움으로 승화시키고 이제 그만하겠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온 마음을 다했으므로 후회는 없다.


그렇게 정리되지 않는 마음을 차곡차곡 접어가기 시작했다. 완전히 접은 것은, 봄비가 내리던 그 날 지갑을 주운 지 무려 4년이 지난 뒤였다. 결국, 짝사랑은 고백을 해야만 끝이 난다. 그동안 친구인 척 속여왔던 그녀에게 서툰 말로 솔직한 마음을 전달하면서, 길고 긴 내 짝사랑은 끝났다. 금사빠라 생각했던 내가 은근 순애보였구나. 허탈한 웃음과 함께, 새로운 나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진눈깨비 소년에서 강재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새드엔딩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는 비록 이뤄지지 못한 사랑일지라도, 그 속에서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발견했다. 좀 호구 같고, 찌질해 보이면 어떠랴. 내가 좋으면 그만인걸. 그리고 스스로 그 마음에 떳떳하면 그만인걸. 가벼운 사랑이 즐비한 세상에서, 순수하게 온 마음을 다하는 사랑의 가치에 대해 『진눈깨비 소년』은 이야기했다. 나는 오강재를 위로했고, 강재도 나를 위로했다.


무엇이든 손익을 따지고, 값을 붙이기 좋아하는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나와 강재는 적어도 '사랑'만큼은 값을 매기지 말자고, 재고 따지며 계산하지 말자고 약속했다. 우리가 아직 철이 없는 걸까, 그 순수한 마음이 오히려 더 큰 행복과 성장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우리는 잘 알기 때문이 아닐까. 오랜만에 '진눈깨비 소년'을 다시 보고 싶다.

 

 

 

세상의 모든 짝사랑에게



바다를 좋아한다고 바다가 더 행복해지지 않고, 산을 좋아한다고 산이 더 행복해지지 않는 것처럼, 어쩌면 사랑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결국 더 많이 행복해진다. 다만, 내가 준 것을 받으려는 조바심. 나의 정성과 노력에 보답받고자 하는 욕심. 그게 우리를 아프게할 뿐이다.

 

혹시 오랜 짝사랑에 가슴아파하고 있다면, 이제 그만 솔직한 마음을 담아 고백하자. 그리고 그 어떤 미련도 아픔도 남기지 말자. 그저 당신 덕분에 행복했으므로, 사랑할 수 있어서 행복했으므로 고맙다는 마음. 그거 하나만 남기자.

 

결과가 잘 되었다면 축하한다. 그러나 혹시 잘 안됐다면 이 사실을 잊지 말자. 당신은 진심으로 고백했고, 상대는 진심으로 거절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감정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후회 없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다면, 그리고 최선을 다해 그 진심을 전달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 마음에 꼭 보답받아야만, 행복한 것은 아니다. 나는 사랑했으므로, 그렇기에 행복했으므로 괜찮다. 그리고 상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까지 존중해주는 것이 사랑이 아닌가. 그렇게 최선을 다하고 나면, 후회도 미련도 남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일이든 후회가 남는 것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때다.


당신은 온 마음을 다하는 사랑을 통해서, 상처와 슬픔만 얻은 게 아니다. 나보다 상대를 더 생각하는 배려심. 내 기준에 갇히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넓은 시각. 나와 다른 생각과 의견, 심지어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마음까지도 존중할 수 있는 깊고 따뜻한 마음. 이런 값진 성장을 차치하더라도, 그저 그 사람이 있었기에, 사랑할 수 있었기에, 그 시간은 분명 행복하고 풍요로웠을 것이다. 한층 더 깊어지고 성장한 당신에게, 훨씬 더 풍요롭고 아름다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듯, 반드시 당신에게 새로운 인연이 찾아오리라.


지금도 홀로 가슴 앓이를 하고 있는 짝사랑들에게, 소소한 위로와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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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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