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모델] 모르

글 입력 2021.01.17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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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여행을 해.”

 

“사람이 없으면?”

 

“그럼 성장을 못하는 거지. 원래 존재 라는 단어의 라틴어는 ‘사람 사이에 있다’라는 뜻이래. 관계를 가졌을 때에만 존재하는 것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 그래서 사람을 많이 만나는 건 내면을 다듬는 것이라고 생각해."

 

“너랑 대화하니까, 책이랑 대화하는 느낌이야. 재밌고 흥미로워.”

 

“하하, 다들 그 소리 해. 원래 경험과 지식이 합쳐져셔 지혜가 나온다고 하잖아.”

 

 

모르 1.jpg


 

대화를 들으면서, 강의를 듣는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일까. 어쨌든 들으면서 그림을 그렸다. 파란색이 진하게 느껴진다. 일단 칠했다. 파란색을 칠하고, 노란색과 다른 색들을 마구 넣었다.눈을 가렸다. 그리고 입은 흥미로워서 선으로 그렸다. 대화의 깊이와 다양성은 왼쪽 상단 점으로 그려넣어봤다. 옷의 주름에 따라 모양이 나있는데, 각자 다른색으로 칠해봤다. 이 친구는 유난히 더 추상적으로 표현하게 된다. 복잡하고 진지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담겨있어서 그런걸까. 그리는데 참 재미있고, 또 형태가 잡히지는 않았다. 목에 있는 타투를 그렸다. 세상에 목이라니. 정말 대단하다. 목숨을 건 느낌이 든다. 알파벳을 그리면서 물었다.


“목에 있는 타투는 무슨 뜻이야?”

 

“memento mori ‘네 죽음을 기억하라’ 라는 뜻이야.”

 

“아, 네 닉네임 ‘모르’가 이 단어에서 나온 거구나.”

 

“모르는 morte 죽음 이라는 뜻이야. 사람은 언제나 죽고, 매일 아침 새롭게 태어난다고 생각해. 그래서 자고 일어나면 웬만한 고민이 사라지는 거야. 그런데 자고 일어나도 사라지지 않는 장기적인 고민은, 적고, 나중에 틈틈이 봐. 시간이 지나고 경험을 하면서 시야를 넓게 보면, 좀 더 쉽게 풀릴 수가 있으니까. 경험을 하면 파악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져서- 그때의 내가 해결하면 돼. 그래도 되지 않는다면? 그대로 두고 또 경험하면 돼. 그럼 나중에는 해결할 수 있게 되거든. 그렇게 살면 돼.”


“오 좋은 방법이야. 정말. 이거 메모할래.”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해. 시간은 프레임을 붙여서 이은 것이거든. 불연속적이야. 매 사건들이 모인 집합체일뿐. 그래서 나는 현재의 순간을 밀도 높여서 지내고, 그래야 많은 걸 받아들일 수가 있어.”


너무 멋있는 친구이다. 인스타그램에서 매번 장문의 글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짐작을 하긴 했었지만. 그 이상으로 너무 멋있다. 마치 교수님과 대화하는 느낌도 들고, 철학 수업인 것 같기도 하고. 내 느낌보다는 친구의 철학이 너무 좋아서 최대한 그대로 남겨보려고 한다. 매 순간 죽음을 기억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친구. 그래서 그렇게나 열정적이고 불태우듯이, 멋있게 사는 구나.

 

*

 

“너에게 의미있는 신체 부위는 어디야?”

 

“손. 나는 손이 본격적인 관계의 시작점이라고 보거든. 언어보다는 행동이 더 무게감있잖아. 인사로 하면서 악수를 한다던지, 친해지면 포옹을 하고. 실제가 강하잖아. 그래서 손이 난 의미가 있다고 봐.”

 

“난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신체부위를 물어보고, 그걸 그리려고 하는데- 왜냐하면 각자 다를 테니까! 그런데 네 손은 어떻게 그리면 좋을까?”

 

“나는 이 모양 대로 그려줘. 엄지는 지식, 머리를 뜻하고 나머지 네 손가락은 행동을 뜻해. 통제하기 가장 힘든 손이 약지야. 그래서 약지를 가장 깊숙하게 누른 이 자세를 좋아해.”



모르 2.jpg


 

특이한 자세의 손가락이었다. 먼저 파란색으로 칠했다. 너는 파란색이구나 정말로. 파란색을 너무 강하게 칠한걸까, 손가락을 그리려는데 잘 안보이네. 콩테로 거의 긁어내다시피 그렸다. 연두색과 노란색도 같이 느껴져서 손등과 팔목 이어지는 부분에 그렸다. 신체를 그리는 건 즐겁다. 규칙과 불규칙 사이의 아름다운 선들. 손톱과 주름을 긁어내고, 실팔찌를 회색으로 표현했다. 모르와 하는 대화는 왜인지 색색의 점과 같다. 그래서 앞 그림처럼 이번에도 점들을 찍었다. 색깔들 점을 찍고 그림을 마무리했다.


“파란색과 까만색이 많네. 이번 그림은 우주 같아서 좋다. 별자리 같기도 하고.”

 

“너무 덮어서 그런지 잘 안보이네. 그래도 열심히 긁어내긴 했는데.”

 

“그래서 좋은걸? 가까이 보아야 잘 보이잖아. 가까이 간다는 것은 관계를 가진다는 거니까. 나랑 관계를 맺어줘서 고마워.”


힘든데도 서귀포에서 제주시까지 보러 와준 친구이다. 오는데 고생하지 않냐고 하니까,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 가는 것’이라고 대답한 친구. 항상 생각이 넘쳐나서 기록을 많이 남기고, 다 따라가는데도 벅차긴 하지만, 항상 많은 감명을 줘서 애정하는 친구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주옥같아 책으로 담겨지면 좋겠다. 울트라마린 블루 색 그대로, 네 모습 대로 있어줘.



[최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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