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잃어버린 취미를 찾아서 - 파티셰를 잡아라 [TV/드라마]

글 입력 2020.12.17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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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느리고 야무지지 못한 나에게 베이킹이란 늘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과도 같았다. 섬세한 계량과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타이머는 뭐든 되는대로 하는 걸 좋아하는 성미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밀가루 종류는 왜 그리도 많은지, 버터는 다 똑같은 거 아닌지, 가루를 왜 체에 쳐야 하는지. 어떤 레시피는 너무 자세해서, 또 어떤 레시피는 너무 간략해서 도무지 따라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오래된 미니 오븐 위로 켜켜이 먼지가 쌓여갔다.

 

그런 내게 다시금 베이킹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킨 TV 쇼가 있다. 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파티셰를 잡아라(원제: Nailed It)’이다. 실은 식사 중에 볼 무언가를 열심히 고르다가 실수로 눌러서 보기 시작했다. 별다른 기대도 없이 멍하니 화면을 보던 나는 앉은 자리에서 30분짜리 에피소드 3개를 연달아 보고 나서야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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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은 간단하다. 매 에피소드 펼쳐지는 경연에서 세 명의 아마추어 참가자들은 전문가가 만든 복잡한 디저트와 케이크를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해내야 한다. 가장 비슷하게, 혹은 가장 맛있게 만든 참가자가 우승을 차지하고, 우승 상금으로 10,000달러를 받게 된다.

 

다른 대부분의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는 누가 가장 맛있고, 주제와 맞아떨어지면서도 독창적인 음식을 해내는가를 심사의 기준으로 삼는다. 과정은 조금씩 달라도 하나같이 실력 좋은 요리사들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심사위원들은 이들이 내놓는 음식을 깐깐하게 평가하고 점수를 매긴다. 이들의 실패와 좌절은 클로즈업되고 극적으로 포장된다.


하지만 ‘파티셰를 잡아라’는 다르다. 전직 경찰관부터 고등학교 교사까지, 이들 중에는 단 한 번도 케이크를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스탠드 믹서와 전자레인지를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도 있다. 참가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심사위원이 직접 다가가서 조언해주고, 유독 힘들어하는 참가자에게는 추가적인 도움을 주기까지 한다.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 부진했던 사람에게 페널티를 주는 기존의 요리 경연 프로그램과는 완전히 반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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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들도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먹을 수 있다면 통과, 케이크가 먹을 수 없는 수준이어도 ‘버터크림이 맛있네요’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심사기준도 에피소드마다 달라진다. 참가자들이 케이크의 모양을 예쁘게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면 맛이 기준이 되고, 케이크를 맛있게 만드는 데에 실패했다면 모양이 기준이 된다. 그러니 가장 심한 혹평이라고 해봤자 ‘케이크가 좀 말랐네요’, ‘버터크림이 좀 달아요’ 정도가 전부다.

 

내가 이 프로그램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다양한 출신,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베이킹에 대한 열정으로 하나 되는 모습이 좋았고, 이들의 열정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심사위원들의 태도가 따듯하게 다가왔다. 한마디로, 베이킹을 전문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베이킹에 대한 사랑을 스스럼없이 표현하는 모습에 묘한 대리 만족을 느꼈다.

 

이 알 수 없는 ‘대리 만족’은 취미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서 비롯된다. 모든 것이 개인적, 사회적 성취와 연결되는 요즘 사회에서 우리의 취미도 어느새 그 물결에 휩쓸리고 말았다. 분명히 취미인데, 어째선지 더 잘 해야 할 것 같고, 이 취미가 성장의 발판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너무 튀지는 않으면서 적당히 독창적이어야 할 것 같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어떤 형태로든 미래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다.

 

하지만 취미에 이런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지극히 모순적이다. ‘취미’의 사전적 정의는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취미를 ‘잘’ 할 필요가 없다. 취미로 시작한 일을 잘하게 되는 것은 시간과 노력, 열정이 빚어낸 부차적인 결과일 뿐이고,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우선이다. 우리를 즐겁고, 편안하게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취미가 될 수 있다. 이력서나 자기소개서에 쓸 수 없어도, 남 보여주기 부끄러울 수준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취미가 내 곁에서 빛바래 갔는지 생각해보면 조금 서글퍼진다. 재능이 없는 것 같아서 그만뒀던 미술 학원, 몇 개월째 내 책상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타, 그리고 이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 미니 오븐. 나는 자기만족이나 행복은 제쳐 두고, 타인의 시선이나 이 일이 내 앞날에 미칠 영향을 일찌감치 고민했다.

 

내가 먼저 놓아버린 취미들이 다시 처음 같은 설렘과 기쁨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종종 기타를 만지작댄다. 이제는 그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잘하지 못해도, 비싸고 좋은 도구가 없어도, 이 일이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면 취미로서 충분하다.

 

어쩌면 잃어버린 취미를 다시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우연히 본 TV 쇼 덕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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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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