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작품 보존과 보존할 작품은 다르다: 예술가의 손끝에서 과학자의 손길로 [도서]

작품의 보존을 둘러싼 이야기들
글 입력 2020.12.12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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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년 전의 일이다. 처음으로 미술 관련 서적을 자발적으로 찾아 읽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발적'은 아니겠다. 외부 동기가 컸다. 당시 3주간의 유럽 여행을 앞둔 상태였다. 런던-포르투갈-스페인. 다소 생소한 여행지를 고르긴 했어도 정보는 넘쳐났다. 무얼 봐야 하고, 이건 꼭 먹어야 하고, 기념품으로는 이런 게 좋다. 어떤 기준을 잘 아는 상태에서 다양한 정보를 받아들이는 건 선택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과거의 나는 나를 거의 몰랐다. 그래도 좋아하는 것 같은 공간이 있었다. 미술관.


포르투갈은 미술관이 거의 없고, 스페인에서는 피카소나 달리, 호안 미로를 좋아하지 않아서 흥미가 없었다. 남은 곳은 런던. 이때 '런던 미술관 산책'을 추천받았다. 런던의 미술관 다섯 곳을 가볍게 둘러보는 책이었다. 열심히 읽었는데도 큰 도움은 못 받았다. 계획과는 다르게 미술관을 한 곳밖에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점심도 거른 채 한 미술관에서 장장 4시간을 보낼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미술관을 좋아했다.


여행의 여운과 복학생의 패기가 합쳐져 덜컥 큐레이터 전공 수업을 들었다. 작품을 보고, 해석하고, 의미를 서술하는 게 관건이었다. 작가는 무슨 생각으로, 어떤 자세로, 붓을 움직였을까. 그리고 내 눈에는 이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가. 색, 명암, 음영, 질감, 부피, 크기 등 눈에 보이는 모든 것과 배경지식을 종합하여 의견을 제시하고 풀이하는 과정이었다. 이게 작품 감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작품을 즐기는 새로운 방법을 배웠다. 도서 '예술가의 손끝에서 과학자의 손길로'를 통해서다.


책 이야기에 앞서, 런던 여행에서 보았던 뭉크의 작품을 이야기해본다. 핸드폰으로 보았던 그림이 눈 앞에 펼쳐진 그때, 나는 미술품 자체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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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는 크기를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가로세로 140cm 가까이 되는, 생각보다 큰 그림이다. 한눈에 담기지 않는 캔버스를 훑고 나니 가장 먼저 초록이 보인다. 상징적으로 악, 죽음을 상징하는 색임을 몰라도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선과 인물의 자세에서 충분히 분위기가 느껴진다.

 

제목인 '아픈 아이'와 까맣게 물든 검은색까지 합쳐서 다시 본다. 죽음, 절망, 고통, 무력감. 그런데 본질적인 질문은 한 번도 던지지 않았다. 이 작품은 19세기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오래된 작품을 어떻게 21세기에 '그대로' 전시할 수 있을까?


보존은 작품의 비하인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숨겨진 세계가 아니다. 미술을 보고, 이야기하는 모두가 한 번은 관심 가져볼 관점이다. 물론 이 책으로 실무 전체를 알 수는 없다. 수박 겉핥기식 배움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게 어렵다고 느껴질 때 가장 쉽게 접근 가능한 방식이기도 하다. 오래된 작품일수록 파악하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고 느낄 것이다.


자, 그럼 책의 첫 장을 펼쳐본다. 보존. 아는 단어이지만 묘하게 낯설다. 저자도 알고 있는지 여러 사례를 들어 작품 보존은 무엇이고, 언제부터 시작했고, 어떻게 달라졌는지 말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보존가의 역할도 생각해볼 수 있다.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에 맞춰 변화하고, 그림 또한 마찬가지다. 보존가는 작품을 무엇으로부터, 왜 지키려 드는가?

 

 

당시 미술관에 정식으로 소속된 보존가가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외부의 보존가들이 미술관에 와서 보존 작업을 했는데, 전쟁 중에는 이 임시 수장고에서 진행되었다. 온 세상이 떠들썩하게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던 중에도 오래되어 누렇게 변한 바니시와 먼지를 제거하는 클리닝 작업을 조용히 진행했다. 1940년부터 1946년까지 총 9명의 보존가가 이 작업에 참여했고, 다시 런던으로 그림들이 돌아왔을 때 전시장에 온전히 걸 수 있었다.

 

p. 51 첨예하게 격돌하는 보존가들

 

 

나는 그들의 임무가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연결은 추상적인 개념이고, 추상은 대개 주관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 작품의 무엇을 제대로 살려야 하는지, 제대로 살린다는 건 또 뭔지, 지금 기술로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지, 그 최선이 지닌 위험성은 얼마나 큰지, 부작용을 감내하면서도 행하는 게 의미 있는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과학적 원리를 잘 안다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보존에는 단 하나의 원칙이 있다.

 

 
작품을 절대 손상하지 않는다.
 


마땅한 방법이 없으면 아예 건들지 않고 보관한다. 작품과 작가, 관람객, 그리고 후세대를 위한 존중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물질 또한 명칭과는 달리 무조건 제거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작가의 기획 의도나 생각, 기술의 한계, 작품의 대중적인 의미 등을 고려한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이물질 제거나 작품 보완을 결정했다면 방법을 찾는다.

 

책에서는 두 번째 장에서 몇 가지 방식을 소개한다. 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풀이했지만 짙게 묻어나는 과학 이야기라서 페이지를 넘기기 쉽지 않았다. 마지막 장은 공간과 보존을 엮는다. 미술관은 익숙한 공간이지만 수장고는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다. 그곳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끝난다.


다 읽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앞서 말했듯 모든 예술 작품은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 직물, 나무, 안료 등 습도와 온도에 예민한 물질들이 뒤엉켰다. 사람이 늙듯 작품도 세월의 흔적을 남긴다. 하지만 미술관이 소유한 작품들은 정성스럽게 보존된다. 며칠 혹은 몇 달 동안 전시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술관의 어느 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니 어떤 작품을 보존할지 가리는 것도 미술관이 내릴 중요한 판단이다.

 

작가의 의무도 있다. 후대에 남길, 즉 보존할 의미가 깃든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범위의 제한이 아니다. 사회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제작했으니 작품에 대한 책임은 자연스레 따라온다.


이와 관련해서 국립현대미술관이 떠오른다. 매년 이곳에서는 올해의 작가상을 뽑는다. 후보에 오르면 제작비 4천만 원으로 작품을 만들어 최종 수상자를 가린다. 이번에 논란이 된 건 정윤석 작가의 "내일"이다. 작가는 '리얼돌' 제작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리얼돌, 그 무던한 네이밍 때문에 '진짜 같은 인형' 정도로 인지하기도 한다. 본질을 드러내는 명명은 '섹스돌'이다. 좀 더 풀어서 말해본다. 여성의 신체를 남성의 판타지 충족을 위해 획일화된 형태로 창조한 성 착취 도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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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은 거셌다. 국립이라는 이름을 단 미술관이니 대중의 관심이 더욱더 뜨거울 수밖에 없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설명했다. 작가는 '돈으로 인간 대용의 인형을 사고파는 당면 사회적 이슈'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그려냈다고. 작품의 소재가 자극적인 것에 집중한 나머지 중요한 의도를 잊었다고 여겼나 보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발은 의도와 소재를 연결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나왔다. 섹스돌은 여성이 완전히 타자화되었기에 생겨난 결과물이다. 동등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면, '이상적인' 여성의 신체와 얼굴을 본떠서 성행위를 하겠다는 발상이 가능할까? 돈으로 사는 인간의 대용물이 아니라 인간 취급받지 못하는 인간의 실태가 '리얼돌'이라는 무해한 이름에 담겼다. 이미 타자화된 결과물-게다가 '관람' 자체가 모욕적인-은 다시 한번 프레임에 갇힌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럼 섹스돌은 예술에서 다뤄서는 안 될 영역인가? 아니라고 본다. 다만 사회 이슈는 민감한 소재다. '민감하다'는 것은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비판하려는 대상과 자신이 똑같음을 스스로 증명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그만큼 여러 관점-특히 당사자성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을 들어보며 조심히 접근해야 한다. 무례와 무지를 예술로 포장해서는 안 될 일 아닌가.


덧붙여, 창작자의 의도를 주석처럼 달아야 오해가 풀린다고 판단했다는 건 작가가 내세운 고고한 의미와 결과물 사이의 이질감이 크다는 방증이다. 감상자들의 의견이 한 방향이고 그것이 모욕감과 분노를 만들었다면, '여러분들의 다양한 의견'으로 대신할 게 아니다. 진심으로 성찰해보아야 한다. 옳지 않은 행태를 비판한다는 '좋은 의도'를 충분히 작품으로 녹이지 못한다면, 그건 전시가 아니다. 단순한 나열에 불과하다.

 

책을 통해 미술관의 소장품이 얼마나 극진한 대우를 받는지 알게 되었으니 미술관이 어떤 작품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잘 지켜봐야겠다.

 

 


 

 

예술가의 손끝에서 과학자의 손길로_표지_입체.jpg

 

 

지은이

김은진


크 기

140*215mm

(신국변형)


쪽 수

304쪽


발행일

2020년 11월 6일


가 격

17,000원


분 야

과학 > 교양과학


펴낸곳

생각의힘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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