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소외된 이들을 위한 로맨스 [도서]

글 입력 2020.11.23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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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가?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대모험이나 지구를 침공한 외계 생명체와의 결투. 생체 실험으로 초월적 힘을 가진 인물의 일대기도 떠오른다. 포털 사이트에 SF를 검색해보면 공상과학 소설이라는 사전적 정의가 나온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SF 역시 이 정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과학보다는 공상에 조금 더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그런데 김초엽의 소설은 다르다. 류드밀라의 이야기에선 어딘가 익숙한 그리움이 짙게 느껴지고, 올리브의 여정을 따라 읽다 보면 본 적 없는 이타사의 풍경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보통 진화한 미래를 이야기 할 때 우리는 고도의 기술로 얻게 될 수혜와 위험에 집중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주체는 흥미롭다. 오래전 폐쇄된 우주정거장에서 가족을 만나기 위해 버티는 백일흔 살의 고집 센 노인부터 부모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불법 시술을 하다 한쪽 귀가 거의 멀어버린 실패한 개조인까지.

 

소설은 빛의 속도로 발전하는 과학 기술 아래서 조금 느리더라도 다른 방향으로 걷는 이들을 조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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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는 과거 개척 행성이었으나 지금은 ‘먼 우주’로 밀려난 행성 슬렌포니아에 가고자 하는 노인 안나가 등장한다.

 

폐기되어야 할 우주정거장에서 버티고 있는 할머니 안나는 한때 촉망받는 과학자였다. 안나가 연구 중이던 딥프리징 기술을 이용한 워프 항법으로 우주 개척 시대의 전성기가 시작됐지만, 웜홀이 발견되면서 워프 항법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웜홀 항법으로 우주여행의 역사가 새로 쓰이는 동안 격변하는 시대의 틈에 많은 사람들이 남겨진다. 한때 우주여행의 선두에 서 있던 안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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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발전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 고들 한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효율성과 경제를 위한 발전은 특히 사회적 약자들을 도태되게 만든다.

 

당장 프랜차이즈 카페에만 가봐도 낯선 키오스크 앞에서 쩔쩔매는 노인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기술은 날로 복잡해져 기프티콘 하나를 쓰는 데에도 눌러야 하는 버튼만 서너 개가 넘는다. 20대인 나조차 처음 방문한 매장에서는 뒤로 가기를 몇 번이나 누른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간격은 기술이 아닌 언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공공장소 푯말부터 버스 하차 벨까지 한국어 대신 영어가 차지하고 있는 시대지만 이전에는 일어가, 훨씬 전에는 불어가 그 자리에 있었다.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의 가치는 뒤바뀌어 있다.


 

“같은 곳에 묻히는 것에 그렇게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하시네요.”

“요즘 젊은이들은 그런 것에 집착하지 않는가 보군. 그럼 세대 차라고 해두지. 자네보다 내가 백 살은 더 먹었으니까.” 178p

 

 

기술의 발전은 잔잔히 흐르는 강물 같다가도 때로는 손바닥 뒤집듯 세상을 격변하게 한다. 찰나의 순간 빛의 속도로 변모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안타까운 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변화하는 세상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어느 순간, 누가 또 다른 안나가 될지 모른다. 안나는 현재의 우리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안나는 할 수 있는 일이 기다림 뿐이던 백 년의 시간 동안 새로운 답을 찾아낸다. 기술에 의해 가치가 뒤바뀐 세상에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비효율적으로 오랜 시간이 걸리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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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tifiction」으로 장르 단어를 정립한 휴고 건스백은 SF를 ‘과학적 사실과 예언적 비전이 뒤섞인 멋진 로맨스’라고 정의했다.

 

김초엽은 SF에 대한 우리의 크나큰 오해 하나를 풀어냈다. 그리고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는 소외된 이들의 로맨스를 통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또 조금 느리더라도 진정 가치 있는 것을 향해 함께 나아가자고 제안한다.

 

그렇다면 내일의 우리는 어떤 답을 고를 것인가. 끌려갈 것인가, 끌고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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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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