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다 아는 이야기,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 영화 '글로리아를 위하여'

글 입력 2020.11.04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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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관점에서 보아도 완벽하지 않다. 어떻게든 굴러가고는 있어도, 사실 이 상태가 지속하길 바라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다들 변화를 원한다. 뭘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힘을 보탤 것인가’인데, 문제는 혁명이란 본질적으로 어려워서 당장은 내게 손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물고기는 목숨을 걸어야만 한다. 앞서 말했듯, 누구도 정답을 알지 못하는 이 문제 앞에서, 누군가는 삶과 사랑, 소중한 모든 이들을 지키기 위해 혁명을 꿈꾸고, 누군가는 정확히 같은 이유로 체제에 순응하고 만다.

 

어디까지가 옳은 선택인지는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하나의 신념을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남들에게 나의 선택을 정당화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낀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더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것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다고 말이다.

 

‘글로리아를 위하여’의 모든 인물에게도 각자의 사정이 있다. 이 영화에서 악역은 없다. 다들 잘살아 보려고,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쓸 뿐이다. 우버 기사로 일하는 니콜라스를 폭행하고 일을 할 수 없도록 팔을 부러뜨린 택시 기사들, 그리고 당장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파업에 동참하지 않는 실비의 모습은 너무 현실적이라 더 씁쓸함을 남긴다. 사는 데에는 돈이 필요하고, 누구도 날 위해 대신 돈을 벌어주지 않는다는 현실 앞에서 싸울 대상은 모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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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와 오로르는 어떻게 보면 이 영화에서 가장 비인간적인 이들이다. 이복동생인 마틸다와 그의 남편 니콜라스가 갓 태어난 아기 글로리아를 보육원에 맡길 돈도 없는 절박한 상황에 부닥쳤음을 알면서도 끝까지 그들을 돕지 않으며, 멍청하게 산다고 비웃기까지 한다. 영화는 사소한 장면을 통해서도 그들의 비인간성을 드러낸다. 오로르가 자신의 가게에 물건을 팔러 온 이민자 여성에게 히잡을 벗어보라고 요구하는 부분이나, 두 사람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끊임없이 마약, 담배, 혹은 술을 손에 들고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들이 무엇을 나타내는 인물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인물 중 가장 좋은 집에서 굶을 걱정 없이 살지만, 이들이 버는 돈은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절박한 이들에게서 온다. 브뤼노와 오로르는 헐값에 중고품을 사들이고 이를 비싸게 되파는 사업 방식, 될 수 있으면 뭐든 내다 팔고 싶어 하는 마음가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이야말로 영리하게 이 사회에서 자기 살길을 찾을 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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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마틸다의 친아버지인 다니엘은 영화 내내 사람을 향해 따뜻한 모습을 보여준다. 일이 갈수록 꼬이자 결국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마틸다 부부를 중재하거나 니콜라스를 위로하기도 하고, 실비의 남편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일 때문에 누구도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아기 글로리아를 가장 따스하게 보살핀 인물이기도 하다.

 

제대로 된 직업과 자기 소유의 집 없이 호텔을 떠도는 다니엘의 모습과 잘 꾸며진 아파트에 사는 브뤼노, 오로르의 모습은 대비를 이룬다. 감독이 생각하는 ‘인간성’이 다니엘이라는 인물에 응축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진심으로 위로하고 희생할 줄 아는 모습이라든가, 남을 속이지 않고, 함부로 자신을 팔지 않는 마음이 그렇다. 모두 브뤼노와 오로르에게는 없는 무언가이다.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은 브뤼노와 오로르로 대표되는 ‘비인간성’, 그리고 다니엘이 보여주는 ‘인간성’이라는 두 극단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다. 적당히 이기적으로 살다가, 죄책감이나 연민을 느끼기도 하는 이들의 모습은 어느 순간에는 브뤼노 같기도 하고, 또 다른 때에는 다니엘 같기도 하다. 인간성은 정확한 기준으로 나눌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때로는 브뤼노처럼, 때로는 다니엘처럼 행동한다. 시스템 앞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분노의 크기도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안정적인 삶을 꾸릴 수 있을 만큼의 수입을 그럭저럭 만드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벼랑 끝으로 내몰지라도.

 

영화가 끝나고 난 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대강은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이 내게 아주 설득력 있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의 철학이나 신념이 표현된 몇몇 방식이 썩 마음에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니엘이 길거리에서 성매매를 하는 한 여성과 함께 밤을 보내는 대신, 돈을 내려놓고 떠나버리는 장면이 그랬다. 내게는 너무 진부하게 느껴졌다. 다니엘의 인간다운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쓸 수 있는 더 나은 장면들이 충분히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또한 다니엘과 함께 비교적 ‘인간다운’ 인물로 비치는 니콜라스에게 이입하는 것 역시 다소 힘들었다.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하다.

 

비록 마틸다와 니콜라스의 선택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모든 선택에 대해 ‘멍청하다’라거나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들이 생각하는 최선이 그런 것이었을 뿐이다. 삶은 어떤 상황에서도 다 굴러가게 되어있으니 일이 그렇게 흐를 수도 있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내가 사람을 능력과 무능력으로 구분하는 질서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에 다니엘과 니콜라스에 이입하기 어려운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든다. 무직이고, 집이나 차 따위의 재산 없이 여관방에 누워 시를 쓰며 하루를 보내는 ‘능력 없는’ 인물이라서 내가 다니엘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마지막 장면에서 ‘내 시계의 바늘을 떼어 버려도 시간은 간다’는 다니엘의 나레이션이 나온다. 결국 구조에 편입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는 다니엘도 거기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이는 인간과 그 삶이 더 큰 구조 아래에 있기 때문이고, 더 정확히 말하면 구조를 이루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당연하고 거스를 수 없는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 그 사실을 알고 있든 알면서도 모른 척하든, 삶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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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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