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힘으로 살겠다'고 도망친 겁쟁이

나라는 궤적을 쫓아가는 소녀, [백만엔걸 스즈코]
글 입력 2020.10.22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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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턴 내 힘으로 살 거야!


사람은 얼마나 나이를 먹어야 자기 인생을 감당할 수 있게 될까? 그 나이는 아마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떻게 보면 보통의 경우보다 불운할 수는 있어도 결코 불우하지 않은 환경의 소녀 스즈코는, 만 21세의 나이에 오롯이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겠노라 다짐한다.

 

길 잃은 새끼고양이를 죽여 버린 자식의 복수를 해 주고 싶다는 마음가짐 하나로 벌인 일에 하루아침에 전과자가 되어 버린 스즈코는 백만엔이 모일 때마다 그곳을 떠나겠다는 무기한적이고 반복적인 인생 계획을 세운다. 백만엔을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천만 원. '전과자'라는 낙인 자체보다도 그녀를 견디지 못하게 한 것은 주변의 '시선'이었다.

 

결국 스즈코가 떠나야만 했던 이유는 얼핏 알쏭달쏭하면서도 명확하다. 스즈코는 자신을 향한 주변의 시선을, 스스로의 시선을 견디지 못해 자기를 데리고 '도망쳤다'.

 

 

 

겁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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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사람이면 바다든 산이든 가리지 않고 떠나는 어쩌면 무모한 여행 속에서 스즈코는 작은 재능들을 발견한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라는 말처럼, 잘 지낼 것만 같았던 스즈코는 그곳에서 듣는 칭찬들에 오히려 의기소침해진다.

 

누나는 빙수를 만드는 데 재능이 있다나 봐. 누나는 복숭아를 따는 데 재능이 있다나 봐. 근데 그게 쓸 만한 재능은 아니니까, 누나는 기분이 이상해져. 빙수를 잘 만들고, 복숭아를 잘 따는 재능이 오히려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재능이라고 정해 놓은 사람은 누구일까?

 

사실 그런 재능 자체가 스즈코를 우울하게 만든 것은 아닐 것이다.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힌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해 도망친 곳에서 스스로의 작은 재능들을 마주치는 순간들은 마치 내내 거울을 피해 다니던 겁쟁이가 유리벽 너머로 나의 눈코입을 마주치는 순간과 같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스즈코가 도망치고 싶었던 원인은 전과자 낙인 하나는 아니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알바를 전전하며 번듯한 앞길을 찾지 못했다며 조용히 웃는 스즈코의 얼굴은 사실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마 이 영화를 보고 사랑하게 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스즈코의 처지에 동감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어쨌든, 좋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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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코가 백만엔을 모으기 위해 머무르는 여러 장소들에서 스즈코는 꼭 그를 좋은 인상으로 기억하는 사람을 만들어낸다. 백만엔을 모으고 떠다니는 동안 세상의 좋지 않은 일들도 여럿 겪었지만, 어쨌든 스즈코가 머문 곳에는 스즈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는데도 스즈코는 번번이 그들을 뒤로 하고 도망친다.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더는 도망치지 않겠다고 타쿠야에게 편지를 한 그 날의 스즈코도 따지고 보면, 도망치고 있는 중이다. 그것도 백만엔이 채 모이기도 전에. 하지만 홀가분한 스즈코의 표정, 그리고 '역시 올 리가 없지'라는 대사와 함께 지어지는 미소는 설령 지금 도망치고 있더라도 한층 성장한 스즈코의 모습과, 어쨌든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

 

그는 남의 짐을 멋대로 버린 탓에 전과자 낙인을 얻어야 했지만, 적어도 떠난 장소마다 좋은 인상을 남기는, 성실하고 따뜻한 청년이라는 사실을. 어쩌면 이 부분 역시, 스즈코가 우리 모두와 닮아 있는 부분이다. 전과자 딱지가 붙었더라도, 취준생 딱지가 붙었더라도, 변변한 내 자리 없이 떠돌기만 하는 중이더라도 우리는 모두 나름 열심히 살아가고 세금 꼬박 내고 모르는 사람의 사연에 가슴 아파하고 화를 내는 좋은 사람들이다.

 

*

 

물론 사람은 영원히 도망만 치고 다닐 수는 없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너 언제까지 그렇게 도망만 다닐 거냐고 비난당하기에 21살은, 우리는, 아직 너무 젊지 않은가?

 

한 노래가사처럼 인생은 마치 비뚤은 동그라미 같고, 자아를 찾고 싶지 않아 도망친 곳에서조차 우리는 우리를 만나게 된다. 자아를 피하기 위해 도망친 사람이야말로, 그만의 방식으로 '진짜 나'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사람이라 박수쳐 줄 수는 없을까? 동그라미를 달리고 있는 모든 겁쟁이들을 응원하며, 글을 마친다.

 

 

[김현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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