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주목받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 [시각예술]

-퍼핏 애니메이션의 대가 퀘이 형제를 만나다
글 입력 2020.10.21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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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핏 애니메이션(puppet animation)이란

 

최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퍼핏 애니메이션(puppet animation)의 대가, 퀘이 형제(Brothers Quay)의 전시회 <도미토리움의 초대>를 보고 왔다. 여기서 퍼핏 애니메이션이라는 명칭이 생소할 수 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인형을 조금씩 움직여 한 장면씩 촬영하여 움직임을 만드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움직이는 피사체인 인형뿐만 아니라 인형이 움직이는 공간의 제작까지도 세심한 심혈을 기울인 종합예술이다. 

          


-퀘이 형제(Brothers Quay)에 대해서

 

쌍둥이 형제인 스티븐 퀘이와 티모시 퀘이는 1947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1970년대부터 영국에서 영화감독이자 애니메이션 감독 겸 작가로 활동하면서, 애니메이션, 실사영화, 일러스트레이션, 국립극장의 무대 세트 디자인 등 다방면에 걸친 수많은 작품을 남겨왔다. 그들의 작품들은 산업화, 대량화의 물결 속 소외되어 주목받지 못한 것들에 대해 주목한다. 대표작으로는 칸 영화제 단편 경쟁작<악어들의 거리(Street of Crocodiles)>(1986) 가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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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유리 너머(Through the weeping glass)

 

전시장에 들어서면 제일 첫 번째로 눈에 띄는 작품은 <눈물의 유리 너머(Through the weeping glass)>(2011)이다. 이 영화는 필라델피아 의과 대학 내에 있는 무터 박물관(Mütter Museum)을 배경으로 근육이 뼈로 변하는 희소병을 앓아 유골이 되어버린 해리의 이야기를 그려낸 작품이다.

 

무터 박물관은 아인슈타인의 뇌 조각, 절단된 인체 단면, 샴쌍둥이의 해부도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퀘이 형제는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이 영화의 독특한 특징은 영화의 시점이 관람객이 아닌 유골로 전시된 해리의 시점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영원한 생명의 위로를 (On the Consolations of Life Everlasting)“이란 구절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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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이 되어 전시된 해리는 살아있다. 그의 눈으로 전시장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다른 전시품을 보며 영원히 살아간다. 죽었지만 죽지 못한 것이다. 죽음은 영원한 안식을 가져온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죽었지만, 인간의 욕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강제로 부여받았다. 죽어서도 계속 관찰되고 괴롭힘을 당한다. 이 소외된 자들에게 퀘이 형제는 위로의 말을 건넨다. 산업사회 속 소외된 인간을 비롯하여 버려진 장난감, 죽고 나서도 영원히 박제된 전시표본 등, 세상은 소외된 자들로 넘쳐났다.



-블랙 드로잉 시리즈

 

1970년대 중반 퀘이 형제는 영화 포스터 형식으로 흰 종이 위에 까만 연필로 그림을 그렸다. 퀘이 형제가 동유럽 여행 도중 접한 전쟁, 군대, 유대인 학살 등에 영향을 받아 대체로 어둡고 음울한 그림들이 많다.

 

폭력과 불안, 성적인 요소가 섞인 그림은 산업화한 도시 속 사람이 어둠 속에 홀로 서 있거나, 마리오네트로 전락하였거나, 해부학적이고 그로테스크하게 그려진다. 이는 암울한 현실 속 인간의 자주성 상실과 실존적 의문을 표현하며 초현실적인 표현의 시작점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퀘이 형제는 2차원의 종이로는 표현되지 못하는 음향의 부재, 표현의 한계에 갈증을 느껴 영화 제작의 욕망을 키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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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면 퀘이 형제의 내면을 엿본 기분이다. 동유럽 여행 시기 보았던 수많은 학살과 인권유린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무력감과 상실감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퀘이 형제의 그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블랙 드로잉 시리즈 중 <고문 기술자>란 작품을 보면 인간이 인간을 유린하고 조종하는 모습을 그렸다. 이는 학살과 유린당한 잊힌 자들을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전쟁은 수많은 학살을 일으키고 인간성을 말살시킨다. 이는 인간에게 상실감과 무력감을 불러일으키며 이 시기를 암울한 시기라 지칭하며 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잊으면 안 된다. 그렇기에 퀘이 형제는 이 어두운 면을 표면 밖으로 드러내고 표현한다.

          

 

-악어들의 거리(Street of Crocodiles)

 

퀘이 형제의 대표작 악어들의 거리는 큐레이터가 기계 상자 안으로 침을 뱉는 행위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는 악몽 같은 지하 세계를 통해 주인공의 무의식 세계를 보여주는데 영화 속 지하 세계인 악어의 거리는 도시에 만연한 실패로 인한 패배감, 성공을 이뤄낼 수 없다는 무력감과 함께 현대화되며 부패가 일어나는 대도시의 어두운 모습을 보여준다.

 

폴란드 음악가 레흐 얀코프스키의 음악에 맞춰 장면을 편집하고 퍼핏의 움직임을 조종하여 영화의 리듬을 만들어내며 음향과 시나리오가 어우러져 영화의 완벽성을 더했다. 영상 초반부 거울을 가지고 노는 아이를 퍼핏의 유아기(의식세계)로 규정하고 퍼핏이 빛에 이끌려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세계(무의식 세계)를 상징한다. 주인공 퍼핏의 의식세계와 무의식 세계가 교차 되어 편집되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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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의 세계인 악어의 거리는 무력감과 패배감이 만연한 거리이다. 이 거리에는 행복, 기회, 성공이란 단어는 없으며 실패, 절망, 무력감만이 가득하다. 이곳은 주인공 퍼핏에게만 있는 공간은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무의식의 세계는 존재한다. 인간의 깊은 무의식의 심연 속을 들여다보면 인간은 깊은 상실감과 무력감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러한 무의식의 세계를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인간은 무력감이 가득 찬 악어의 거리에 빠지지 않기 위해 바삐 살아간다.

 

그러나 무의식의 세계에 잠기게 되는 건 언제 어디서든 순식간에 가능하다. 타인의 침, 즉 타인이 주는 모멸감과 치욕, 희롱이면 인간은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는 사이 무력감이 가득 찬 무의식의 세계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어른이 되어가면 타인에게 자신의 기준을 맞춘다. 쉽게 타인에 의해 상처를 받고 유린당해지기 쉬운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인간들의 무의식은 무력감과 패배감만이 가득하다.


           

-도미토리움(Dormitrotium)

 

퀘이 형제는 자신들의 퍼핏 애니메이션을 구성한 데코의 전부를 도미토리움으로 명명했다. 작품 속에서 도미토리움은 무의식적 사건들의 무대이자 실존적 불안으로 가득 찬 공간이 되어 의식적으로 꺼내지 못한 뿌연 먼지 같은 불안, 공포, 억압을 꺼내어 마주하게 한다. 도미토리움에는 확대경을 통해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면 일방적인 시선이 아닌 다방면의 시선으로 작품을 볼 수 있게 만드는데 이런 낯선 불편함은 불쾌하지만,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특별함이 있다.

 

퀘이 형제의 도미토리움은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한다. 깨어있을 때는 마주할 수 없지만 잠이 들어 꿈을 꾸면 깊은 무의식의 세계로 빠질 수 있다. 이 세계는 깊고 음습한 낯선 세계이다. 퀘이 형제는 이러한 무의식을 숨김없이 모조리 재현한다. 퀘이 형제 외에도 많은 예술가는 자신들만의 표현방식으로 다양한 무의식의 세계를 그려냈다. 그러나 관객 참여 성격을 지닌 종합예술 도미토리움을 만들어낸 것은 퀘이 형제만의 독자적인 노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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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극의 주 소비대상은 어린아이들이다. 그렇기에 인형은 다 예쁘고 귀여우며 파스텔 동화 속 공간에서 우정과 사랑을 행복한 이야기를 그려낸다. 그러나 퀘이 형제의 작품은 정 반대다. 인형들의 표정은 음울하고 외로워 보이며 인형들을 둘러싼 공간은 기괴하며 초현실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내뿜는다. 퀘이 형제가 보여주고자 하는 건 아름다운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소외된 것들에 주목하며 인간의 무의식 세계에 갇힌 인간의 처절한 무력감과 상실감을 보여준다.

 

산업화가 시작되고 난 뒤 인간은 사회의 한 부품으로 격하했다. ‘내’가 없어도 사회는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한 급격한 변화에 인간은 쉽사리 적응할 수 없었기에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나의 존재에 대한 상실감, 무력감, 두려움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들은 소모품으로 쓰이는 인간이 살아가기에는 불필요한 감정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러한 불안정한 감정들을 깊은 무의식의 세계로 밀어 넣었다. 타인이 볼 수 없고 심지어 본인조차도 볼 수 없는 깊은 무의식의 저편으로 말이다.

           

그러나 퀘이 형제는 이 깊은 무의식의 저편을 기괴하고 처절한 인형과 도미토리움으로 끄집어낸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퀘이 형제의 작품을 보고 무섭고 기괴하고 쳐다보기 싫은 존재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퀘이 형제가 의도한 바를 정확히 담아낸 것이다. 본인에게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더 많은 관심을 주고 사랑으로 보듬어준다. 그러나 소외되고 주목받지 못한 것은 더 망가지고 뒤틀려진다. 우리는 이러한 소외된 것들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고 직면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자신의 깊은 내면의 무의식 세계에 갇힌 외로움, 무력감, 상실감이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시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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