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생각하기 - 투명사회 X 롭 프루이트_긍정사회의 이면에 대하여

글 입력 2020.10.05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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롭 프루이트는 색색의 그라데이션으로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2011년경의 Faces시리즈는 나중에 “The Suicide Painting”으로 발전되는데, 이 과정을 한병철의 투명사회와 함께 이해해보고자 한다. 한병철의 투명사회는 투명함이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사회, 정치, 경제를 만들어낸다는 믿음 아래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전시하며 디지털 통제사회를 완성해나가고 있는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물은 모든 부정성을 떨쳐버릴 때, 매끈하게 다듬어지고 평탄해질 때, 아무 저항 없이 자본과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의 흐름에 순응할 때 투명해진다.


- 한병철, 투명사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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롭프루이트, Massimo De Carlo, London Exhibition, The Suicide Paintings October 14 – November 30, 2013

 

 

제목이 심상치 않다. 자살그림들이라니, 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걸까. 이 자살그림은 롭 프루이트의 전작을 발전시키며 수렴하는 작업이다. 전작에서는 그라데이션 되어 있는 바탕에 이모티콘과 같은 뚜렷한 감정의 개성 있는 표정들이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와서는 그 어떤 이야기도, 표정도 찾을 수가 없다. 매끈하게 획일화 된 감정들만 마치 스크린 세이버처럼 불명료하게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롭은 대중문화, 소셜미디어에 의해 열렬히 소통하며 단조롭게 닮아가고 있는 우리들 자신에 대해 묻고 있다.

 

과연 우리가 소통하고 있는 디지털 대중문화를 벗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나’는 무엇이며 나의 이야기는 또 어떤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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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 Pruitt, Us,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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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 Pruitt

 

 

 

디지털 파놉티콘의 시대



영국의 법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제레미 벤담은 원형 파놉티콘에 대하여 이야기 한 바 있었다. 파놉티콘이란 일종의 감옥 건축양식이다. 파놉티콘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를 뜻하는 ‘opticon’을 합성한 말이다. 이러한 파놉티콘에서는 원근법적인 감시방식이 적용된다.

 

보이지 않는 소수의 감시자는 모든 수감자를 감시한다. 즉, 수감자는 보이지 않는 감시자의 현존을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비원근법적인 특수한 디지털 파놉티콘의 구조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한병철은 그의 책에서 말한다.


 

오늘의 통제사회는 특수한 파놉티콘적 구조를 보여준다. 서로 격리되고 고립되어 있는 벤담식 파놉티콘의 수감자들과는 반대로 현대 통제사회의 주민들은 네트워크화되어 서로  맹렬하게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 고립을 통한 고독이 아니라 과도한 커뮤니케이션이 투명성을 보장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특수성은 무엇보다도 그 속의 주민들 스스로가 자기를 전시하고 노출함으로써 파놉티콘의 건설과 유지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같은책 95page

 


이러한 투명성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시스템이 필요한데, 시스템이 안정되고 가속화 되기 위해서는 타자와 이질적인 것은 제거 되어야만 한다. 곧 투명성에 대한 강박으로 말끔하게 정돈되고 통제되는 획일적인 사회가 되는 것이다.


 

즉, 투명사회는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새로운 통제사회다.


- 한병철

 

 

 

그렇다면 시스템은 어떻게 통제되는가?



그 일차적인 모습은 긍정사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그는 진단한다. 최근 나는 유행하고 있는 긍정확언을 배우고 있는데, 여기에는 절대적인 룰이 있다. 이런 확언을 할 때 있어서 그 어떤 부정성도 개입이 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고통으로 명상도 해보고 종교도 가져보았다.

 

하지만 그 어떤것도 실제적인 삶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 탐구의 연장선상에서, 나는 이제 만트라처럼 긍정확언을 되뇌일 수 밖에는 없게 되었는데, 이는 긍정적인 정신 상태를 가까스로 유지하면서 삶을 지속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중 하나였다.


 

긍정사회에서 일반화된 판정의 형식은 ‘좋아요’이다. 페이스북이 ‘싫어요’버튼을 도입하는 데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고수해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긍정사회는 모든 종류의 부정성을 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부정성은 커뮤니케이션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가치는 오직 정보교환의 양과 속도로만 측정된다. 커뮤니케이션의 대량화는 경제적 가치의 증가로도 이어진다. 그런데 부정적인 판정은 커뮤니케이션을 손상시킨다. '좋아요'가 '싫어요'보다 더 빠르게 후속 커뮤니케이션을 유발하는 것이다. 거부에 담긴 부정성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효용성이 없다.


같은책 26page

 


긍정적인 것은 투명하게 통제되는 시스템 속에서 마구 증식하고 다량화 된다. 하지만, 정보의 증가와 축적만으로 어떤 진리가 성립되지는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정보에는 방향, 즉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진리는 다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하고 관철하는 부정성을 가지고 있는데, 방향이 없는 과다 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에는 바로 그러한 진리가 결핍되어 있고, 존재가 결핍되어 있다. 결국, 롭프로이트의 자살그림처럼 감정들만 남은 불명료한 전체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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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 Pruitt, suicide painting 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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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 Pruitt,  suicide painting 1,  2016


 

영혼의 긍정화 흐름 속에서 사랑 역시 안락한 감정들, 복잡하지 않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흥분들의 평면적인 배합으로 전락한다.


같은책, 2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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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 Pruitt, sucide painting XCIII, 2016

 

 

롭 프루이트의 색연구는 마치 디지털로 조합된 것처럼 보이지만 아크릴물감으로 세심하게 그라데이션 된 것이다. 함께 배치한 창틀은 마치 다른 세계로 연결될 것 같은 포탈Portal 처럼 보이기도 한다. 변증법적인 무게 없이 무한긍정의 정보만이 강요되며 점차 가볍게 그리고 불명료해져가는 이 디지털세상의 너머에는 또 어떤 세상이 있을까? 문득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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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ments and Feelings, 2017

 


[임지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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