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내가 나로 존재하기 위한 운동 Feminism -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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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 페미니즘
이 책의 저자는 ‘페미니즘과의 만남 이후, 모든 것들은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경험하게 된다.’라고 말한다. 정말 그렇다. 페미니즘이라는 학문을 접하고 나면, 더 이상 그것을 알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설령 본인의 페미니즘적 기준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기준 밖의 일이라는 것을 알기 전으론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즘은 이전과는 다른, 또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과 같다. 그 문밖의 세상은 이전과 다를 것이 없지만, 그 세상을 바라보는 본인의 시각이 달라짐으로써 그것은 분명히 다른 세상이 되어 다가온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삶과 존재방식에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이 사회 속에서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생활이 어떤 가를 돌아보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분명 나 자신의 일상이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 우리는 사회적인 관습과 가치관을 학습해왔고, 그것은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사회적으로 학습된 행위를 우리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했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 행위는 때로 해롭거나, 우리의 시간을 빼앗아 가기도 하지만, 그것을 쉽게 그만둘 수 없는 것은 여태까지 그에 대한 선택권이 우리 자신에게 온전히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면, 나는 오늘 아침 한 시간 가량을 들여 화장을 하고 머리를 손질했다. 물론 누군가가 내게 그렇게 하기를 강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 나의 이 행동이 온전히 내 스스로의 의지였냐고 묻는 다면 선뜻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오랜 시간 여성은 스스로를 가꾸어야 하며, 화장이나 머리 손질은 다른 이들을 위한 매너라는 사회적 가치를 학습해 왔다. 그것은 나의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내재화 되었고, 너무나 자연스러워져 그것을 학습했다는 사실 자체가 희미해졌다. 그리하여 나는 1시간가량의 아침잠을 포기하고 피부에 좋지 않은 화장품을 얹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 행동을 쉽게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페미니즘을 접하고 배운다고 해서 한순간에 이러한 사회적 가치관의 내제화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되거나,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듯, 개별인으로서의 ‘나’는 한 사회의 가치관이나 제도로부터 분리되어 살아갈 수 없고 그럼으로 내가 누리고자 하는 ‘자유’는 사회의 가치관과 의식, 제도화된 평등의 정도에 따라 침범 받기도 하고 보장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사회적 가치관으로부터 분리되어 살아갈 수는 없기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그 사회적 가치관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행위와 태도에 대한 인식은 이전부터 꾸준히 변화해왔다. 조선시대 까지만 해도 여성은 사회적 진출을 할 수 없었고, 남성을 섬기고 따르는 역할을 해왔다. ‘남성은 하늘이고, 여성은 땅이다’ 혹은 ‘거안제미(밥상을 눈썹 높이로 들어 공손히 남편 앞에 가지고 간다는 뜻으로, 남편을 깍듯이 공경함을 일컫는 말)’라는 문구만 해도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에 비해 현대의 여성에 대한 인식이 어떤가를 살펴보면 분명한 차이점을 인식할 수 있다.
이렇게 여성에 대한 인식이 변화해 온 것은 꾸준한 투쟁의 결과이다. 이는 여성의 참정권 쟁취를 위한 노력으로 대표된다. 여성은 남성과 달리 참정권을 가질 수 없었다. 참정권은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 주권을 행사하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자, 사회가 그 사람을 어떤 인식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이러한 참정권을 여성은 약 72년의 시간 동안의 투쟁을 걸쳐 1920년경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인식을 바꾸기 위한 노력과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만약, 우리가 한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한 투쟁을 이어가지 않았다면 여성은 아직까지 사회적으로 미성숙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을 것이다.
성차별은 여성됨과 남성됨의 역할과 기대를 고정하고 절대화함으로써 여성과 남성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왜곡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 p. 8
성차별이 잘못되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성차별은 여성됨과 남성됨의 역할과 기대를 고정하고 절대화하여 각 개인이 개인 스스로 의미 있는 존재로 인정받을 수 없도록 한다. ‘여성’ 혹은 ‘남성’이라는 케이스 속에서만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주의가 아니다. 여성의 권리를 위해 남성의 권리를 ‘빼앗아’ 오거나, 여성의 권리 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각 개인이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성안에 갇혀 원하는 대로 사유하고 발화하며 판단하고 행동할 수 없도록 하는 성차별을 타파하기 위한 이론 및 운동이다.
우리는 ‘왜?’ 라는 불편한 질문을 이어갈 수 밖에 없다
‘왜?’라는 질문은 가장 많이 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나는 어린이라고 생각 한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들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설령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더라도 그것의 원인과 배경, 그것이 작용하는 매커니즘을 알고 싶어 한다. 이 ‘왜?’라는 질문은 결국 한 사람의 가치 체계와 내적인 사고 기제를 이루는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성인 우리는 어떤 이유로 ‘왜?’라는 질문을 이어가야만 하는 가의 답은 우리의 어린 시절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여성은 자신이 기억하기 훨씬 오래 전부터 사고의 방식, 행동의 지침 등을 사회로부터 배워왔다. 처음 배울 때에는 이해하고 내제화 하기 위해 끊임없이 의문점을 물고 늘어지지만, 한번 익숙해지면 그것은 우리의 사고 체계속으로 깊숙이 침투하여 ‘당연한 것’ ‘자연스러운 것’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그래서 한번 받아들인 개념이나 가치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거나 깊은 사고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 없이 ‘왜?’라는 불편한 질문을 해야 한다. 이미 익숙해진 일에 다시 의문을 제기 하는 것은 분명히 불편한 일이다. 이전의 인지 과정을 전부 부정해야 하며, 다시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유는 익숙해진 그 개념이나 기준이 성차별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면, 우리는 꼼짝 없이 그것에 의해 차별 받고 억압 받을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을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의 시작은 ‘왜?’라고 묻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건 우리가 일상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들, 혹은 스스로 선택하고 좋아하는 일이라고 생각 했던 것들일 수도 있다.
‘여성의 주민 등록 번호는 왜 2로 시작하고 남성의 것은 1로 시작하는가?’, ‘왜 여남차별이 아닌 남녀차별이라는 말을 쓰는가?’ ‘왜 예쁘다라는 말은 칭찬이 될 수 없는가?’ 등등의 질문들을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너무 예민하고 불편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할 것이다. 분명 이런 질문들은 불편할 수 있다. 여태까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것이 었고, 그리하여 이상함을 느낄 수 없던 것들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명확하게 답을 할 수 있을까? ‘이유가 없어. 원래 그런거지.’ 라는 말이 아니라, 분명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를 다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은 하나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페미니즘을 상식적이고 자명한 것으로 생각한다. 어떠한 한가지 맥락으로 정의 될 수 있고, 그리하여 모두가 얼마든지 이해하고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생각은 지금까지 우리가 쌓아온 페미니즘에 대한 수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한가지로 정해진 것, 고정된 것이라는 편견은 페미니즘 이론을 강경하고 유연하지 못한 생각으로 치부하도록 만든 것이다.
페미니즘은 각기 다른 시대와 정황, 페미니스트들의 다양한 사회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매우 상이한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그만큼 페미니즘의 전제와 목적은 지속적으로 변화되어 온 것이다. 페미니즘은 전혀 자명하지 않으며 오히려 매우 복합적인 이론이자 운동이다.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 p.38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페미니즘은 매우 복합적이고 또 사람마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그 내용과 형태가 다르게 존재해왔다. 페미니즘이 어떤 한가지 맥락만을 고집하며, 그 외의 것들은 배제한다는 생각은 페미니즘이 자명하다는 이 오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페미니즘은 ‘단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담기는 곳에 따라, 온도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른 형태를 띄는 물이 한가지 형태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생각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하고 복잡하게 존재하고 있는 페미니즘을 완벽히 이해하려고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수록 그 개념에 대한 오해를 빚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이 복합적인 것임을 인정하고 각자의 방식과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페미니즘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박다온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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