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당신은 투사적 혐오를 일삼진 않았나요? - 타인에 대한 연민 [도서]

글 입력 2020.09.22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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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다른 타인의 존재는 어떠한 순간에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을 발하며, 또 어떤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적대의 대상으로 변모해버릴까. 그 한 끗 차이는 생각보다 쉽다. 연민과 외면은 단어만 보아도 그렇듯 정말 한 끗 차이다. 우리는 모든 게 '한 끗'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좋고 나쁨이 한순간에 뒤바뀌어버리는 그런 세상에서 말이다.

 

사람들은 마치 하이에나 같다. 서로를 헐뜯고 깎아내리는 데 먹잇감이 놓여있듯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 그렇게, 혐오와 증오의 감정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가는 모습이다. 지금 우리 옆을 당장 돌아보아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현상으로 자리한 감정이 사회의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자신의 처지를 남 탓이라 여기며 타인을 이유 없이 미워하거나 해를 가하려 하는 사회 문제도 뉴스를 통해 보도되기 일쑤인 걸 보면, 혐오와 분노는 더이상 보편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미국의 저명한 학자이자 이 책의 저자인 마사 누스바움은 이러한 현상을 두고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대해 주목한다. 자식 세대가 자신보다 더 성공하고 부유해질 거라는 희망, 즉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과 함께 노동자 계급의 절망, 최근 전 세계를 뒤덮은 코로나19의 공포 앞에서의 두려움. 그 감정이 바로 '나'와 '타인'을 극악무도하게 편 가르기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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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누스바움

 

 

성별, 종교, 직업, 장애 등 다양한 사회적 편 가르기의 근본에는 이처럼 인간의 내밀한 감정이 배어 있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우선되며 두려움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거나 파고들려 하지 않는다. 그저 순간적인 본능의 충돌에 더 크게 반응하며 잘못된 연대를 일삼아 타자를 비난하며 공격하려 든다. 이렇듯 개개인의 두려움은 셀 수 없이 모여 증오로 번져가 세상을 위협하고 분열되게 한다. 저자 누스바움이 속한 미국 사회에 국한되지 않는, 전 세계의 실상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두려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타인에 대한 연민>은 내포된 두려움의 감정적인 본질을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 조차 짐작하지 못한 채 본능의 페달을 있는 힘껏 밟아가는 어떤 이들에게 전하는 저자의 호소문 같이 느껴진다. 그렇게 사회의 전반에 서린 혐오의 태도를 지적하지만, 그와 함께 연대하여 나아감의 중요성을 마무리로 끝맺음하기에 서론에서 결론까지의 근거를 충분히 제시한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읽은 현대인들은 불확실한 삶 앞에서 두려움에 잠식당한다. 이성적 사고 대신 손쉬운 타자화 전략을 선택해 나와 타인의 경계를 짓는다. 계급 간 갈등, 여성 혐오, 진보와 보수의 대립 등 이러한 정치적 감정들은 늘 이면의 권력자들에 의해 조종되어왔다.

 

현시대를 대표하는 지성 마사 누스바움은 이 책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인 두려움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암울한 혐오의 시대를 넘어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서, 저자는 인문학과 예술에서 희망의 실마리를 찾으려 애쓴다. 인류애에 기반한 연대를 주장하는 저자의 차갑고도 뜨거운 시선이 가득하다. 결국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우리'였다.

 

 

 

고통은 타인의 탓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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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분노를 두려움이 낳은 괴물이라 정의한다. 이때, '괴물'이라 칭할 수 있는 분노의 형태는 보복성을 띤다. 부당함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 아닌, 개인이나 집단이 받는 고통을 되갚아주고자 하는 보복 욕구를 시도 때도 없이 표출하는 것이다. 그게 마치 세상을 바꿀 거대한 힘인 양, 맞지도 않는 논리로 어떻게든 맞서려 한다. 그 과정에서 아무런 잘못 없는 피해자가 희생되기도 하며, 더 많은 가해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세상이 점차 모순적으로 돌아가는 모습이다.

 

이런 분노의 시대를 대처하는 방법. 두려움을 순화하기 위해 마사 누스바움은 과거의 역사 및 문학적 예들을 통한 문제 제기와 최적의 논의 방법을 제시한다. 바로, 그리스 비극 중 하나인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에서다. 특히 그중 3부 '자비로운 여신들'에서 나오는 시대착오적인 형법 제도를 예로 든다. 응보적 분노의 저주를 민주주의와 법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탐구하는 내용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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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 Rahl, <오레스테스를 쫓는 복수의 여신들>

 

 

복수의 여신들이 지닌 '보복의 어두운 본성으로부터 비롯된 억제되지 않은 분노'는 본 내용의 주된 화두다. 본래, 흉측하고 혐오스럽게 묘사된 복수의 여신들은 희생양을 잡아먹으며 사냥에 나선 맹수의 모습에 가까웠다고 서술된다. 아폴론의 생각처럼, 그들의 극단적인 분노는 민주주의에 결코 결속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던 복수의 여신들은 민주주의 사회에 함께 발맞추어가기로 한다. 아테나의 현명한 제안 덕분이었다.

 

그 제안은 이러하다. 아테나는 민주주의에 힘을 보태면 명예와 시민들의 숭배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고, 설득의 목소리를 앞장서서 낸 결과는 예상대로 좋았다. '부드러운 성질에도 관심이 많았다'라는 복수의 여신들의 답변을 들을 수 있었으며 아테네 시민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게 했다. 그들의 사악했던 이름마저도 자비로운 여신들, 즉 에우메니데스로 바뀌었다. 분노의 감정을 주체 못 하던, 사회에 동떨어져 있던 한 개인이 사회로 귀속되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까지가 첫 번째 변화에 속한다.

 

두 번째 변화는 '보복의 방지' 단계에서 인간적인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의 전개다. 비록 복수의 여신들은 처리해야 할 범죄 상황을 위하여 근거 없는 분노를 내뿜어왔지만, 정의의 기능을 수행하는 작용으로는 그것을 순화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저 퇴색된 정의 구현에 불과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고 곧이어 인간의 안녕과 정의의 수단으로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걸 눈치채야만 하는 시간이 도래했다. 그렇게, 두 번째 단계를 거치자 진정 자비로운 여신들로서 '진보적 정의'를 가진 실체가 그리스 사회에 나타났다. 비로소 '지목된 타자화'가 사라져버린 성숙한 사회가 한 발짝 더 다가오게 된 것이다.

 

이렇듯, 저자인 마사 누스바움이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오랜 역사를 예로든 건 현대의 민주주의에 적용할 가치가 마땅히 있어서다. '민주주의'라는 뜻이 무색하게, 오늘날 역시 고대 그리스와 같이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된 분노와 갈등이 점철돼있다. 인간의 안녕과 민주적 제도를 파괴하는 주범이자 악화의 주요인이 우리 사회에 계속해서 수면 아래로 쉽게 가라앉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내면의 분노에 저항하고 억제하려는 노력이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고, 그저 부당함에 대한 합당한 목소리라고만 생각한 채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행위는 차별과 죽음의 결과를 불러오기 마련인데도 말이다.

 

 

이 진보적 운동에서 중요한 점은 킹이 그랬던 것처럼 행위와 행위자를 구분하는 것이다. 타인의 인간성을 포용하면서 그들이 저질렀을지 모르는 잘못된 행동만을 반대해야 한다. 그래야 동료 시민들의 말과 행동에 찬성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친구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두려움과 비난, 보복을 통해서는 타인에게서 어떤 선함도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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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혐오와 투사적 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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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내면의 정화되지 않은 불안함은 어느샌가 타인을 희생의 목표물로 설정해 순식간에 겨눈다. 누구에게나 자리한 원초적 혐오가 투사적 혐오로 바뀌는 순간이 바로 앞서 말한 일이 벌어졌을 때이다. 먼저, 원초적 혐오는 오염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접촉에 대한 극도의 증오다. 대변이나 혈액, 토사물 등 특정 대상에 관한 반사적인 거부 반응의 일종이다. 타인 또는 심지어 본인의 내부로부터 비롯된 것인데도, 자기 자신이 더럽혀질 거라는 심리적 불안으로부터 도출된 행위의 결과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투사적 혐오는 과학적으로 설명 불가한 사회문화적 영향이 결합하여 차별의 문제까지도 초래할 수 있는 큰 위험성을 지녔다. 이때, 자칭 지배의 주체가 설정한 차별의 대상은 취약한 집단이며 동물적 특성을 그들에게 투사하는 경향을 보이며 '그들은 냄새가 나고 짐승 같다'고 한심하듯 말하면서 혐오스러운 특성을 타인에게 돌린다. 경제 수준, 인종과 성별, 가치관의 차이 등 셀 수 없이 많은 요소를 혐오자의 정형화된 틀로써 규정해 박해하고 웃음거리로 만들며 사회에 동떨어진 존재로 만들어버리곤 한다.

 

이러한 혐오의 속성은 영화 '기생충'에서도 드러난다. 영화의 장면 중 사장 직책을 맡고 있는 부유한 동익은 가난한 기택을 운전기사로 채용한다. 채용 후 상황에 있어 동익은 기택의 일 처리를 보고 만족감이 들었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왠지 모를 냄새는 참지 못한다. 동익은 아내인 연교에게 운전기사 기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면서 안 넘어. 그런데 냄새가 선을 넘지."라고 말이다. 장면 장면마다 동익은 코를 막는 행위를 꽤 여러 번 반복한다. 그와 동시에 '냄새'라는 속성을 기택의 이미지 자체에 투사함으로써 자신보다 낮은 계급의 사람인 양 바라본다.

 

"행주 삶을 때 나는 냄새", "지하철 타는 놈들 특유의 냄새"라며 동익은 얼토당토않은 소리도 해댄다. 이는 원초적 혐오가 한 개인, 더 나아가 집단에까지 투사돼 투사적 혐오로까지 이어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무의식적으로 코를 막고 인상을 찌푸린 채, 상대를 은연중 무시하고 비판하며 깔보기까지 한다. 이건 비단 영화의 판타지적인 내용에만 그치지 않기에, 주목해야 할 근본적인 혐오의 감정인 셈이다. 나는 누군가를 투사적 혐오의 존재로서 바라본 적은 없었는지, 그러한 상황을 목격한다면 우리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다시 한번 뒤돌아보게 해주는 감정의 분석이 영화 '기생충'에서도 중요한 지점의 측면에서 묘사된 것이다.

 

 

 사람들이 혐오를 느낄 때 원하는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회피다. 혐오는 법적인 목적으로도 신뢰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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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의 결말처럼, 오늘날 사회 역시 회피하기보다는 서로가 마주한 채 대안을 의논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저자인 마사 누스바움은 "생각으로 멈추지 않고 실제로 행동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한다. 희망이 없을 것 같은 혐오의 시대에서, 모호한 감정인 희망의 실체를 찾아야 한다고 호소한다. 그러면서 희망과 두려움을 거부하는 스토아학파의 회피형 관점을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입장을 내세운다.

 

결국, 두려움 뒤에는 희망이 있다. 희망은 두려움의 반대편에 있으며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마음들이 모여 전진해가는 형태이다. 반면, 두려움은 자기 자신과 타인을 어두움의 끝자락으로 내몰며 낭떠러지의 끝까지 물러서게 한다. 두 감정 모두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추상성을 띠지만, 과정과 결과에 있어 전반적으로 드러나지는 모습은 극히 다르다. 한쪽은 세상을 연대의 힘으로 쌓아 올림으로써 유토피아적인 세계를 구축하지만, 다른 한쪽은 세상을 분열하게 하며 모두를 부정적인 상황으로 내몰 수 있는 악한 힘으로서 작용된다.

 

이런 과정과 결과에 대한 분석을 텍스트로 읽고 난 뒤, 마사 누스바움이 과연 혐오의 시대에 동조할 수 있는지, 동조 해야 하는지 독자들로 하여금 재차 확인하려는 듯했다. 잘못된 걸 알면서도 여전히 정당하지 않은 분노로 덮여 차별의 시선을 조장하려는 사람이 있는지, 그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에 관한 자기 성찰을 저절로 하게 한다. 텍스트로 마주한 마사 누스바움의 입장이었지만, 마치 실제의 호소를 듣는 듯 글자 하나하나는 처절했고 간절했다. 전 세계의 사회가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지는 모두가 조금씩은 느끼고 있기에 텍스트만으로도 큰 감정의 울림을 건네받을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한다.

 

강력한 믿음이 기반으로 자리한 희망이 우리의 노력으로 우뚝 서야 함을 느낀다. 믿음은 비현실적이거나 이상적일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행동하는 순간순간에서 포착할 수 있는 희망을 바라야 한다. 기본적인 사랑을 바탕으로, 인간의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연대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타인에 대한 연민>을 통해 우리 사회에 도래한 혐오, 그리고 그와 맞닿아 있는 비슷한 맥락의 감정을 분석해보고 시대에 대한 통찰을 함께 곁들여봄으로써, 전 세계가 나아가야 할 '희망'의 구체적인 틀을 그려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공공의 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현실 경험이 없는 내성적이고 허약한 철학자가 아닌, 세계를 위해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본문 중에서

 

 

 

**

 

 타인에 대한 연민

-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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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 대한 인류의 두려움을 탐구하는

세계적 석학의 지혜로운 시선

 

*

 

지은이

마사 누스바움(임현경 역)

 

출판사 : 알에이치코리아

 

페이지 : 296쪽

 

 발행일

2020년 9월 15일

 

정가 : 16,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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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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