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안전함을 선택한 페미니즘 책 -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

글 입력 2020.09.21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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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페미니스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최선의 단어일까?


 

2015년 이래 페미니즘은 하나의 강력한 사상으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필요를 호소했다. 구시대적인 사상에 피해를 받은 여성들은 페미니즘의 사상에 뜨겁게 반응했다. 여성들의 강렬한 분노에 남성들은 보수화를 선택했지만, 지속적인 담론을 통해 많은 부분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 작게나마 형성된 공감대의 확장으로부터 사회의 발전이 시작된다. 확장시켜야 할 문제는 많지만, 공감대를 형성한 시점에서 페미니즘은 성공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페미니즘의 유행은 인권감수성의 확대로 이어졌다. 전 세계와 함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고찰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성별, 연령, 장애여부, 성적지향을 초월한 한 인간의 존엄성을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페미니즘 운동이 성별로 인한 차별에서 확대된 것은 아니다. 2020년 2월, 페미니즘 이슈에 가장 민감한 여대생들이 생물학적 여성만이 여성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고 외쳤다. 트렌스젠더 여성의 여학교 입학 거부 사건은 페미니즘 운동이 곧 세계시민주의로 이어지지 않은 사건 중 하나다.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분명한 성과를 올렸다. 전례없이 여성과 남성들은 어떤 것이 차별이고 차별이 아닌지 곤두세우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온전한 여성해방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고작 오년 정도 되는 시간동안 하나의 산을 넘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전히 생물학적 '페미니'즘에 갇혀있는 현상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페미니스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최선의 단어일까?"

 

 

 

'안전한 선택'이 가져오는 보수성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생물학적 여성에 국한된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비판을 가한다. 저자가 페미니즘의 방향으로 제시한 것은 세계시민주의다. 책은 페미니즘이 어떤 역사를 통해 형성되고, 어떤 논리를 가졌는지 기술한다. 나아가 얼마나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남성과의 관계를 정의하는지도 기술한다. 페미니즘의 과제에 이르러서는 세계시민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내용에 대한 감상에 앞서, 이 책의 전체적인 구성을 먼저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구성과 의도는 다분히 교육적이다. 페미니즘의 흐름을 목차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각 섹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요약 박스로 마무리하고 있다. 책이 선택한 방식은 가독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완전학습이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반대로, 급진적인 의견전개를 하고있진 않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 책은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 건네는 가벼운 역사지도와 같다. 방향성을 가리키긴 하지만, 그 곳에 어떤 것이 있는지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감상을 조금 드러내보자면, 이런 방식이 너무 안전한 탓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자는 세계시민주의를 향한 방향성을 제시하지만, 이전 세대의 '페미니즘'에 대한 논리를 집요하게 반박하지는 않는다. 페미니즘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표현으로 이 흐름을 자연스럽게 넘어가고 있지만, 어떤 사상이 진보하기 위해선 더 확실한 논쟁과 확인이 필요하다.

 

오늘날 끝없이 생산되는 페미니즘 도서는 문제제기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다. 흔히들 '공부'라는 말로 페미니즘을 권하곤 한다. 페미니즘 사상이 가진 계몽성을 인정하지만, '공부'라는 단어의 집착은 보수성으로 이어진다. 보수화는 이전 세대의 고통에 반항하고 혁신하려는 페미니즘이 피해해야할 것이다.

 

 

 

나는 세계의 시민이다.


 

디오게네스는 출신지가 어디냐의 질문을 받고 자신을 세계의 시민이라는 뜻의 "코스모폴리테스"고 대답했다. 그는 그리스인 남성이면서도 혈통, 출신도시, 사회계급, 심지어 자유인이라는 태생적 신분이나 성별로 자신을 정체화하지 않는다. 그는 남자와 여자,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 노예와 자유인을 포함한 모든 이와 공유하는 특성으로 자신을 이야기 한다. 이 모든 이와 공유하는 특성,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평등한 가치가 세계시민주의 철학의 핵심이다.

 

세계의 시민으로서, 페미니즘은 제한적이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수많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여성의 안에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복수심을 품고, 다른 여성들과 숲속을 뛰어다니는 아르테미스도 있지만, 배우자를 만나고 아이를 양육하길 바라는 헤라나 데메테르적 자아도 있다. 여성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있다. 단순한 '남성성'과 '여성성' 담론을 넘어서 우리는 어떤 계층, 어떤 역할로써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물학적 여성의 연대를 외치는 것은 공허하다. 페미니즘에 갇혀서는 진정한 여성해방을 맞이할 수 없다.

 

여성이 어떤 여성에게 연대를 느낀다면, 그것은 그 여성 안에 있는 아르테미스적 경험이 공유된 것이다. 하지만 그 경험에만 매몰되어서는 한 여성의 삶은 완전해지지 않는다. 이 문장이 양육하지 않은 여성이 완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 한 존재 안에는 언제든 존재할 수 있는 임신하고 양육할 수 있는 존재가 들어설 수 있다고 읽히길 바란다. 그것이 구태여 어떻게 표현되든 상관없다. 한 인간의 정신은 여성과 남성의 모습을 다양하게 가질 수 있다. 세계의 시민들은 우선 이러한 것들을 인정해야한다. 한 인간의 자유를 위해, 사회는 여성성과 남성성에 정형화된 족쇄를 채우면 안된다.

 

문제가되는 것은 그로 인해 발생되는 현실적인 차별이다. 페미니스트의 과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어머니를 모성적 존재로 고정하고, 남성을 자본가로 고정하는 생각들은 인간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고정한다. 하지만 어떤 뚜렷한 여성상을 규정하는 페미니스트의 시도도 인간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고정하기는 마찬가지다.

 

문제제기에 머무르는 수많은 페미니즘 도서 속에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저자로서는 이러한 비판들에 억울함을 느낄 수 있겠다. 저자는 앞서 기술한 생물학적 성별에 국한된 페미니즘을 온유한 어조로 비판하고, 세계 시민주의에 반하는 다른 페미니즘 경향에 대해서도 그렇게 한다. 저자의 시도는 분명 의의가 있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다른 방향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마사 C 누스바움의 <세계시민주의의 전통>은 멋진 모범을 보였다. 그녀는 이제 하나의 섹션으로 분류된 '페미니즘' 도서가 아닌, 새로운 시대의 시민철학으로 '세계시민주의'를 소개한다. 누스바움은 페미니스트지만, 그 자신을 세계의 시민으로 정의한다. 오늘날 수많은 페미니즘 공부책이 쏟아진다. 한 사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논의는 공허할 수 밖에 없다. 여성해방을 위해 '페미니'즘에 머무르는 페미니즘의 보수성은 극복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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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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