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그녀에게 바람이 불었다' 작가노트 - 영화 '곡성' 패러디 소설

글 입력 2020.09.14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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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곡성>을 보다 보면 한 가지 질문이 우리의 머릿속을 관통한다. 그래서 저 외지인은 나쁜 놈이야, 좋은 놈이야? 흥미로운 건 외지인의 비밀을 알게 되는 인물이 ‘종구’가 아닌 ‘이삼’이라는 점이다. 왜 하필이면 감독은 이 모든 사건의 전말을 주인공이 아닌 조연 캐릭터가 알도록 만들었을까?

 

신과 종교는 인간의 믿음을 먹고 자란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에게만 신과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믿음이야말로 인간의 주된 본성이기 때문이다. 불행 앞에 선 인간은 필사적으로 묻는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필사적으로 이해하려 든다. ‘요렇게 소문이 파다하면 무슨 이유가 있는 거야’라는 대사는 인간이란 해답을 갈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러니 신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신의 존재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믿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흔히들 생각하길 납득할 수 있는 조건과 증거가 주어져야 믿음이 성립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정말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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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면 주인공 파이는 사고 조사를 위해 찾아온 선박회사의 직원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그들은 호랑이와 함께 바다 위에서 227일을 버텼다는 파이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러자 파이는 이번엔 각각의 동물들을 사람으로 바꿔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선박회사의 직원들은 이번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돌아가 버린다.

 

하지만 우리는 둘 중 어느 이야기가 파이가 실제로 경험한 이야기인지 알지 못한다. 두 번재 이야기가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 호랑이와 망망대해를 표류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두 번째 이야기가 진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납득할 수 있는 조건이나 증거가 주어졌나? 아니다. 오히려 그런 거라면 첫 번째 이야기가 더 풍부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난 몇 시간 동안 호랑이와 소년이 나오는 이야기를 눈으로 보았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두 번째 이야기를 진짜라고 믿는다. 상식적으로 호랑이와 함께 227일을 바다에서 표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실제일 수 없다는 사람들의 믿음이 소설의 진짜 결말을 결정해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보이니까 믿는다고 생각한다. 타당하니까 믿는다고 여긴다. 하지만 실제로는 믿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믿음을 가졌을 때 비로소 이해되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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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를 묻는 이삼에게 외지인은 너는 나를 이미 악마로 확신하고 있다며,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너는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성경 속에 나오는 구절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신은 어찌하여 보지 않고 믿는 자만이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한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믿음은 맹목적이다. 굳건하다. 그러나 동시에 나약하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이해한다. 하지만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우리의 믿음은 손쉽게 흔들린다.

 

가톨릭 성직자인 이삼은 기어코 자신이 믿는 것을 본다. 보려는 것을 본다. 외지인은 악마다. 그것이 이삼의 믿음이다. 그런 그에게 외지인은 손바닥의 성흔을 보여주며 예수의 말을 내뱉는다. 예수의 말을 하는 외지인의 이마엔 마치 악마처럼 뿔이 돋아 있다. 그 이질적인 모습에 이삼의 믿음은 무참히 흔들린다. 흔들리는 이삼에게 외지인은 낄낄거리며 말한다.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대관절 예수의 말을 하며, 악마의 얼굴을 한 당신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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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몇 마디와 눈에 보이는 몇 가지 사실에 우리의 굳건한 믿음은 이리저리 흔들린다. 믿음이 흔들리는 와중에 이삼은 벌벌 떨며 ‘주’를 찾는다. 믿음을 업으로 살아가는 성직자인 그 가 제 자신이 믿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신의 도움을 구한다. 그래서 그는 정말 악마라는 건가? 그렇다면 손의 성흔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해하려 애쓰지만 그는 결국 이해하지 못한다. 믿음과 현실의 도무지 좁혀질 수 없는 간극. 바로 거기서 인간의 비극이 틈입한다. 그 비극의 이름은 무지와 무기력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이러한 ‘믿음’과 비슷한 게 또 뭐가 있을까?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결론지었다. 사랑 역시 믿음과 마찬가지로 그 과정을 자세히 규명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지, 아니면 그/녀가 매력적이기에 그/녀를 사랑하는 건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는 보통 후자가 맞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세상에 권태기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이 식었다는 말은 이별의 사유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여자친구의 외도를 맞닦뜨린다. 싸운 적도 없었고, 특별히 잘못을 한 것도 없다. 같이 여행을 가자고 약속까지 했었다. 이 현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남자는 연인의 친구와 새로 생겼다는 남자친구까지 만나지만 하나같이 모호한 말을 내뱉을 뿐 남자의 궁금증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어렵게 만난 여자친구 조차 남자가 궁금해하던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다. 영화 <곡성>에서 이방인이 이삼에게 너는 내가 악마라는 의심을 확인하러 온 거라고 했던 것처럼, 그녀는 주인공에게 오빠는 내가 바람을 폈다는 사실을 확인하러 온 것뿐이라며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내놓는다. 그렇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채로 주인공을 떠나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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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는 어딘가에 이유는 분명히 있다.’ 주인공은 포기하지 않고 갑자기 변한 사랑에 해답과 이유를 여전히 갈구한다. 그러나 아무도 남자의 물음에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대답을 해줄 수 있는 그녀는 남자의 곁을 떠나버렸다. 결국 남자는 서서히 망가져 간다. 한때 사랑스럽던 그녀는 이제 그에게 악마 같은 년이 된다.

 

소설을 다듬다가 오래전 헤어진 연인이 떠올랐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나와 데이트를 하고, 내 부모님을 만나 식사를 했던 그녀는 1400일 되던 기념일에 거짓말처럼 내게 이별을 선물하고 떠났다.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의 연인처럼 아무런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떠나간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끊임없이 이유를 생각했더랬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아니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그러면서 나는 조금씩 작아졌다. 무려 4년을 만났는데 이렇게 영문도 모르는 이별을 갑작스레 당할 만큼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나? 그녀는 애초에 나를 사랑하긴 했나?

 

아마 그녀가 떠난 이유를 나는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녀에게 물으면 그녀가 알려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떠나버린 연인에게 나는 한 마디의 말도 건네고 싶지가 않다. 정말로 슬픈 건 이러한 일이 앞으로 종종 있을 것이라는 거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불가해한 것들 앞에서 우리의 믿음은 위태롭게 흔들린다. 흔들리는 믿음을 보며 우리는 절망한다. 무지해진다. 무기력해진다. 아, 비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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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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