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장마의 한가운데, 프린지페스티벌에서의 어느 저녁 - 서울프린지페스티벌2020 [공연]

글 입력 2020.08.25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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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프린지페스티벌] 8종 포스터.jpg

 

 

8월 15일, 프린지 페스티벌이 열리는 서울문화비축기지를 찾았다. 며칠간 후덥지근한 날씨가 계속된다 싶더니, 운 나쁘게도 프린지 페스티벌을 위해 날을 비워둔 전날 밤부터 엄청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오까지 해가 뜨지 않아 어두컴컴한 창밖의 풍경을 보고 '아 이러다 못 가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오후가 되자 빗줄기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오후 늦게 비가 완전히 멎는다는 소식에 합정역에서 내려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오후 5시쯤, 우산 없이도 거뜬히 다닐 수 있겠다 생각했고, 문화비축기지로 향했다. 날은 어마어마하게 습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습기 때문에 시야가 온통 막혀 있었다. 처음 찾는 문화비축기지였는데, 특유의 분위기에 을씨년스러운 날씨까지 더해지자 과연 이곳에서 페스티벌이 진행될 수 있을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프린지페스티벌 현수막이 보이더니, 매표소와 함께 드문드문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T2앞에 위치한, 광장 같은 공간에 다다르니 궂은 날씨의 한가운데 마치 무슨 상관이냐는 듯 ‘indist’ 명찰을 단 스탭들이 우릴 반기고 있었다. 어떤 공연을 찾아 왔냐며, 찾으시는 공연이 취소되지 않았기를 바란다며 반갑게 맞는 스탭들의 안내에 따라 공연 시간표를 훑었다.


아니나다를까, 몇몇 공연들이 우천으로 인해 취소가 되었었다. 그러나 그보다 많은 공연들이 장소를 옮기는 방식으로 어쨌든 계속되었다. 제발 비가 더 이상 안오기를 바라며 저녁 7시 반 예정된 ‘스튜디오 212’의 ‘인곡 : 종말 앞에서’라는 공연을 보기로 같이 간 동생과 결정하고, 카페에 앉아 기다리다가 시간이 되어 습한 공기를 마스크 너머로 들이마쉬며 솔방솔방 공연장으로 향했다.

 

 

 

스튜디오212, ‘인곡 : 종말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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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튜디오212' 인스타그램 (@studioll1ll)

 

 

‘인곡 : 종말 앞에서’의 무대 배치는 독특했다. 월드컵 경기장과 서울을 향해 트여있는 무대가 있었음에도, 관객석의 한 가운데를 무대로 사용했다. 배우들과의 거리는 보다 좁혀지게 되고, 배우들이 사용하는 무대의 공간은 훨씬 더 넓어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공연장이 왜 이리 더럽지’ 싶을 정도로 의자를 온통 뒤덮던 쓰레기 더미들이 알고보니 무대를 꾸미고 있다는 소품이라는 것을 알고 재미있어했던 기억이 난다.

 

삼면이 숲으로 둘러싸인 T2의 야외 무대 앞에 드디어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늦었지만, 내가 본 프린지페스티벌의 첫 공연이었다. 저녁이 다 되도록 해가 뜨지 않던 하루, 자리에 앉자 거짓말처럼 하늘이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산 너머로 넘어가는 해가 그제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다섯 명의 배우가 우산을 쓰고 무대 위에 자리를 잡았다.

 

상의를 탈의한 배우도 있었고, 흰색과 붉은색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배우도 있었다. 강렬한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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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튜디오212' 인스타그램 (@studioll1ll)

 

 

‘인곡 : 종말 앞에서’는 저마다의 종말을 앞둔 다섯 인물의 이야기룰 담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세상 속 유일하게 마지막 남은 인류인 A는 무대의 끝과 끝을 뛰어다니며, 종말 앞에서 이제껏 쌓아온 인생의 모든 의미를 잃어버린 고통에 몸부림치며 절규한다. 모든 시간이 멈춰버린 세상에서, 홀로 과거의 시간을 그리워하며, 흘러가는 시간을 고스란히 맞는 A의 고통은 어떠할까.


A는 과거에 세상과, 사람과 함께함으로써 존재했던 삶의 의미들을 하나하나 짚는다. 그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며, 우리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긍정적인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친한 이들과 함께 나누는 일상의 소소한 농담들, 내가 몸담는 분야에서 노력하며 실현해내는 나의 자아,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겨있는 순간 같은 것들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 느끼는 얄팍한 시기와 질투,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감정, 분노하는 것에 대한 투쟁 등, 그 모든 삶을 잃어버렸다고 A는 소리치며 자신조차 누군지 모르는 신에게 그 모든 것들을 돌려달라고 말한다.

 

빠른 호흡으로 쉬지 않고 삶의 의미들을 되짚는 A. 그가 나열하는 삶의 의미들 하나하나가 나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A는 그렇게 각자의 삶을 부름으로써, 추상적으로 다가오기 쉬운 ‘종말’이라는 테마를 눈 앞에 생생히 그려낸다. 그 모든 장면들을 잃어버린 삶을 나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어, 내 옆에 자리한 동생의 옷자락을 쥐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어 형태를 알 수 없는 방안에 갇힌 두 연인이 등장한다. 두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우리는 행복하다”를 밝은 표정으로 외치던 둘은 어느샌가 강박적으로 “행복하다”고 외치더니, 이어 “행복했다”라고 소리친다. 한때 열렬히 사랑했으나 이제는 서로의 가장 수치스러워 숨기고 싶은 내밀한 부분까지 원치 않게 내보이게 된 둘은, 남아있는 사랑의 기억과 서로에 대한 혐오로 고통스러워 한다.

 

남자의 죽음 이후, 여자는 자신의 분신과 함께 종말을 앞둔 고통스러운 춤을 춘다. 앞서 등장한 A가 존재 자체의 종말을 말했다면, 이들은 무너져내려가는 사랑과 그 인물들을 보여준다고 느껴졌다. 물론 사랑의 종말은 어느 정도 존재의 파괴와도 이어져있다는 점에서 전혀 별개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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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튜디오212' 인스타그램 (@studioll1ll)

 

 

그리고 어디선가 음악이 울려퍼지더니, 무대 뒷편에서 투쟁의 옷을 입은 P가 등장한다. 그는 전쟁에서 적들을 무찌르고 혼자 남았다. 그의 앞에는 그와 함께 싸웠던 전우들의 시체들이 쌓여있고, 그 역시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는 승리했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들이 죽은 상황에서 그의 생존과 승리는 고통 만을 남길 뿐이다. 그는 그 옛날 격렬한 전투의 현장과 당시 함께 싸웠던 동지들을 추억하다, 승리했음에도 그 누구보다 고통받는 현실 앞에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된다.


세 이야기 모두 매우 신화적이고 상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국 : 종말 앞에서’ SF적인 구체적 종말을 상상하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 사랑의 파괴, 투쟁 뒤에 버려진 것들을 그리며 각각 이야기는 조금 다르지만 결국 한 인간이 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존재의 종말을 그리고 있었다. 나의 존재가 끝난 것만 같은, 생이 끝난 것만 같은 바로 그 순간.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곳에서 그 어느 때보다 살아있음을 의식했다. 연극이 시작할 무렵 타는 듯한 붉은색으로 뒤덮여있던 하늘은 어느새 어둑해져 있었고, 또렷한 배우들의 대사들 너머에서는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들이 들려왔는데, 그것이 종말을 그리는 연극의 장엄한 분위기와 묘하게 어우러지며 괜히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지나간 하늘과 숲을 배경 삼아 연극을 펼치는 배우들, 그것을 보러 도시의 외곽으로 사람들이 함께 모여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의식되던 순간이었다. 함께 인간의 종말을 보지만, 그 너머로 보이는 하늘과 서울의 풍경이 너무 넓게 트여 있어서 나는 그 때 너무도 살아있었다.

 

많은 공연 현장들이 문을 닫는 상황에서, 예술가들의 무대를 지켜내고자 프린지 페스티벌을 만들어내는 수많은 사람들 역시 같은 생각이었을까. 비를 뚫고 어쨌거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역시 나와 비슷한 행복한 기분을 느꼈을까. 코로나19라는 힘든 시간 속에서,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장마 속에서 문화비축기지에는 밤 늦은 시간까지 불이 켜져 있었고, 사람들은 모였고, 예술가들의 무대는 계속되었다.

 

프린지 페스티벌과, 힘든 시기를 겪고 있을 예술가들에게 응원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다시금 서로를 만나는 것이 힘들어진 우리 모두가 이전처럼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날이 조금이라도 빨리 찾아오기를 기대한다.


 

 

장은재.jpg

 

 



[장은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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