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 또한 우리가 고찰해야 할 역사 - 일제의 흔적을 걷다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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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것은 없고, 변하지 않는 것도 없다지만 어떤 풍경들은 너무나도 익숙해서 처음부터 그런 모습이었던 것 같다는 착각을 주기도 한다. 그렇게 내게 익숙함의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장소 중의 한 곳이 광화문 광장이다. 내 기억 속에서 처음 발을 디뎠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광장의 모습에 조금씩 변화는 있었지만 적어도, 경복궁과 청와대, 북악산이 이어지는 그 미관은 마치 처음부터 그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이어왔다는 듯한 안정감을 준다.
이러한 광장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광화문과 경복궁과의 사이에 거의 70여 년 동안 조선총독부 청사가 자리했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렵다. 1907년 남산 왜성대 통감부 청사를 사용하다가 공간 부족을 이유로, 1926년 경복궁 근정전 바로 앞에 세워진 청사는 1995년 광복절을 맞아 그 첨탑을 뜯어내는 것을 시작으로 철거되었다. 1995년의 나는 아직 미취학 아동이었으니, 기억이야 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살던 세상에 그 건물이 공존했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이질적으로 여겨진다.
광복 이후 철거에 이르기까지 아니, 이제 본디 그 자리에 건물이 있었는지도 상상하기 어려운 지금까지도 조선총독부 청사의 처리 방식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자리한다. 건물을 철거한 것이 당연하다는 의견이 대다수인 듯하지만, 그 또한 역사의 흔적임을 말하며 다른 방식으로 그를 후손들에게 남기는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는 의견도 있다.
700년 역사를 품은 나라 조선의 중심에 자리하며, 영원할 것 같은 위엄을 과시하던 일제 제국주의의 상징은 무너졌고 본래 자리했던 것들이 그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강제 합병 기간이 36년이었음에도 총독부 청사가 거의 70여 년간 서울 한복판에 머물렀듯이, 일제는 이 땅을 떠났지만 그 흔적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다.
일본식 언어 표현이나 풍습 같은 경우는 계속 지양하자는 의견이 대세이고 많은 사람이 그에 동의하며 습관을 바꾸려는 등의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불운한 역사의 흔적은 지워버려서 원래 없었던 것처럼 해야 한다는 것이 대부분의 생각이고 모두가 동의하는 바와 같이 여겨지고 있다.
"일제의 흔적을 걷다” 책에서는 분명히 자리했으나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일제가 우리 땅에 남긴 건축의 흔적들을 비춘다. 이 땅에 남겨진 외세 침략의 흔적을 찾는 여정, 저자는 그 여정의 시작은 호기심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부산 남쪽 가덕도 끝자락에 일제가 러일전쟁 때 만든 포대가 남아있다는 이야기에 답사를 떠난 저자는 우리 땅에 남겨진 아픔의 흔적을 마주한다.
그날을 계기로 관련 답사 및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저자는 광복 70년이 지났지만, 이 땅에 일제의 수탈과 외세로 인한 혼란을 상징하는 건축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음을 확인한다. 미처 몰라서, 어쩌면 무관심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인지하지 못했을 뿐, 흔적은 곳곳에 남아 그 아픔의 시간을 증명하고 있다.
책은 저자와 그 일정에 함께 한 공저자들의 조언과 동행의 기록이다. 서울에서 시작해 인천과 부평, 그리고 경상도와 전라도를 이어 마지막으로 제주까지, 지금까지 분명히 자리하고 있는 우리 역사의 어두운 흔적을 소개한다.
[서울역사박물관 뒤편의 경희궁 터 일제 방공호(서울시 제공)]
조선의 수도, 중심지인 한성이 갖는 그 상징성에 대해서는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일제는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한성에 개발을 이어갔으며 동시에 그 상징성을 무너트리고 지배하려고 하였다.
용산에서는 일본군 시설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일제는 철도역 및 대규모 군대가 주둔할 수 있는 병영과 보급창을 설치했다. 그때 일제 아래 있던 시설들은 미군의 소속으로 남겨져 지금은 일반인이 찾을 수 없는 공간으로 남아있다.
해방촌에는 일제강점기 때 거주한 일본인들의 가옥들이 남아있다. 앞서 언급한 두 사례만큼 선명하지는 않지만, 당시 경성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남산에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신을 모셔 놓고 정신적으로 우리 민족을 지배하려고 한 흔적이 아직 남아있다.
태평양 전쟁의 일환으로 공습에 대비해 지어진 방공호들은 대부분 철거되었으나 경희궁 뒤편에 하나가 아직 남아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아있다기보다는 철거하지 못한 이 방공호는 크고 거대한 규모로 경희궁 아래에 숨어있다. 경희궁 복원 계획에 차질처럼 여겨지는 이 방공호를 두고 갑론을박이 진행 중이다. 현존하는 궁궐 중 가장 많이 훼손된 경희궁, 그리고 그 아래 거대하게 자리한 방공호. 저자는 방공호를 가리켜, 아마 조선총독부 청사 다음으로 가장 일본의 흔적이 많이 담긴 건물이 아닐까 하고 말한다.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 지점(문화재청 제공)]
우리의 근현대사는 조선 후기 개항을 시작으로 급변의 물결을 타게 된다. 그 급변의 시작이자 중심지는 항구 도시었고 그중 가장 큰 변화를 마주한 곳이 인천이었다.
서울에 남겨진 일제의 흔적이 주로 행정, 군사 시설이었다면 인천에는 금융, 해운과 관련된 건물들이 남아있다. 조선의 육지를 넘어 바다까지 장악하고자 한 야심으로 세워진 일본우선주식회사의 인천 지점 건물이 그중 하나다. 이어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호텔이자 최초로 커피를 돈을 받고 팔았던 대불 호텔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일합병 이후에도, 당시 경성의 성장과 함께 호황을 누리며 많은 관광객이 몰렸던 인천의 당시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서울과 인천의 중간에 위치한 부평은 그 교통의 편리함으로 공업지대이자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반도 최대 일본육군 조병창이 있었고 이후 주한미군의 보급을 책임지던 병참기지 애스컴이 자리하면서 용산에서와 마찬가지로 일제가 세운 곳에서 계속 자리한 미군의 흔적은 한국으로 곧 반환될 부평 미군 캠프 마켓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19년 12월 한미 합의에 따라 캠프마켓 전체 44만㎡ 중 21만㎡가 시에 우선 반환되었으며, 2단계로 나머지 23만㎡도 추후 한미 협의를 거쳐 돌려받을 예정이다.)
[부산 가덕도 외양포 포대 전경(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일본과 가까이 있단 이유로 한일합병 이전부터 시달렸던 경상도, 그 경상도의 두 섬에는 특히 그 상처가 짙게 남아있다. 외진 곳에 자리한 가덕도의 남쪽 마을인 외양포는 일본 연합함대를 보호할 수 있는 위치라는 이유로 주민들이 쫓겨난 자리에 일본군의 포대가 설치되었고 뒷산에는 관측소와 대공진지가 남아있다. 동백꽃으로 그 아름다움이 알려진 지심도에도 포대가 설치되었으며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났다. 향기로운 동백꽃이 만개한 풍경에 조금 더 발을 디디면 침략의 역사가 선명히 드러난다.
[목포일본영사관(목포시 제공)]
한반도의 곡창지대 역할을 하던 전라도에 일제는 그 토지를 빼앗아 대규모 농장을 차렸다. 쌀과 면화, 소금의 산지인 목포에는 영사관이 들어섰고 남겨진 창고와 별장, 그리고 확장된 항만까지, 모두 쌀을 빼앗아 일본으로 보내려고 했던 일제의 약탈 흔적이다. 그 약탈 아래 조선의 문화유산을 자신만의 보물로 빼앗고 소유하려 한 일본 지주들의 금고까지, 영원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들의 몰락과 그 이후 이어진 수탈의 시간이 저자의 설명으로 더 분명히 전해진다.
[제주일출봉해안 일제동굴진지(제주특별자치도 제공)]
태평양전쟁으로 몰락의 길로 접어든 일본은 미국의 공격에 방어하기 위해 제주를 요새화했다. 그리고 그를 확인하며 저자는 일본이 제주에 남긴 흔적들은 저주에 가깝다고 말한다.
제주 동쪽 끝자락에 있어 제일 먼저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는 성산일출봉 근처에는 자살 특공 무기를 배치한 동굴진지가 선명히 남아있다. 그 동굴진지에서 가미카게 특공 부대원으로 차출되어 제주에서 죽음을 불사한 전투를 준비한 요카렌들이 휴일에 유일하게 들렀던 성산읍의 두 위안소는 지금은 철거되거나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그렇게 어느 것은 또렷하게 그리고 어느 것은 존재했었는지도 모르게 사라진 곳에서, 오늘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은 즐거운 마음으로 관광을 위해 제주를 찾는다. 그 관광객들 사이에서 저자는 제주에서 있었던 일제의 침략과 4.3 민간인 학살의 아픔을 언급하며 그 아픔이 담긴 곳을 찾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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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된 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군사시설을 바라보며 저자는 이 견고하고 단단한 결과물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탈과 폭력이 우리 민족에게 가해졌는가를 지적한다.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이 그저 지나쳤을, 세월에 덮여 빛이 바랜 가옥 및 다른 건물들의 경우 세심하게 관찰해 어떤 용도로 쓰였을지 독자에게 전해주는 저자의 모습은 선명하게 남아있지 않지만,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날들을 짚어주는 듯하다.
원치 않는 역사의 흔적을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광복 75주년을 맞이한 지금까지도 우리는 일제가 이 땅에 남긴 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분명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남겨진 역사의 공간을 어떻게 보존하고 기억해야 할지 그 뚜렷한 길을 찾지 못하는 나날 속에서, 역사의 흔적은 우리와 계속 공존한다. 어쩌면 그 흔적은 과거의 아픔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한 우리의 현실을 비추는 것일지도 모른다.
더 나은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제를 돌아보는 것은 필요한 과정이다. 비록 그것이 되새기기 씁쓸하고 아프다고 해도, 지난날의 어두움이 다시 드리우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주해야 한다. 저자의 말처럼,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고, 잊어버리면 다시 반복하게 되기 때문이다.
[강지예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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