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평론의 종말 - 더 라스트 오브 어스2

글 입력 2020.08.14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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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9일, 많은 게이머들의 기대를 모았던 <더 라스트 오브 어스2>가 출시되었다.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정체불명의 곰팡이로 인해 멸망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쓰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동명 게임의 7년 만의 후속작이다. 전작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출시 일주일 만에 북미에서만 무려 130만 장이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전 세계적으로는 약 800만 장이 팔렸다.

 

게이머와 평론가들의 호평도 쏟아졌다. 오죽하면 영국의 영화 잡지 ‘엠파이어’에서 이 게임을 영화 <시민 케인>에 비유했을 정도다. IGN에서는 10점 만점을 부여했다. 메타크리틱 기준으로는 95점을 받았다. 유저 평점도 9.1점에 달한다. 당시 쟁쟁한 경쟁작 [GTA 5], <바이오쇼크 인피티트>, <배틀필드4> 등을 제치고 그 해 가장 많은 GOTY를 수상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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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전작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게임성으로나 작품성으로나 정말 뛰어난 게임이었다. 그러니 이 게임의 후속작에 이목이 몰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예약 구매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평론가들의 극찬도 더해졌다. IGN에서는 이번에도 이 게임에 10점 만점을 부여했다. 메타크리틱 점수는 94점으로 측정되었다. 비록 코로나19로 발매가 연기되고, 게임의 스토리 라인이 유출되는 등 홍역을 치르긴 했지만 게이머들의 기대는 여전히 높았다. 그렇게 대망의 출시일이 다가왔다.

 

하지만 막상 게임이 공개된 후, 게이머들의 기대는 곧 실망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이해할 수 없는 스토리 전개와 기대에 미치지 못한 플레이에 게이머들이 혹평을 쏟아냈다. SNS에는 <더 라스트 오브 어스2>를 비판하는 게시물들이 마구 올라왔다. 그러자 판매량도 영향을 받았다. 게임 출시 첫 주에는 400만 장 이상이 팔리며 흥행의 조짐을 보였지만, 2주 차가 되자마자 판매량은 급격하게 떨어졌다. 영국에서만 80%, 일본에서는 85%가 깎여 나갔다. 설상가상으로 디렉터인 ‘닐 오브만’이 게임을 비판하는 유저들을 비하하는 듯한 발언을 하면서 논란은 더욱 뜨거워졌다.

 

한편 흥미로운 점은 게이머들의 분노가 게임 평론가들에게도 향했다는 것이다. 공감할 수 없는 평점을 매긴 그들에게 제작사인 소니의 압박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평론가로서의 자질도 의심받기 시작했다. 급기야 누군가는 평론가라는 직업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며 직업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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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평론가와 대중 사이의 대립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꾸준히 있어 왔다. 빌 헨더슨과 앙드레 버나드가 쓴 <악평>이라는 책을 보면 ‘햄릿’, ‘위대한 개츠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같은 책에 남겨진 평론가들의 악평을 읽을 수가 있다. 물론 이 작품들은 악평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사랑을 받아 오늘날에도 회자되는 고전이 되었다.

 

한편 영화계에서는 이러한 대립이 더 비일비재하다. 오히려 없으면 섭섭할 정도다. 우리에겐 방송과 라디오로 널리 알려진 이동진 평론가만 하더라도 <아메리칸 스타이퍼>, <인천상륙작전>, <박쥐> 등을 비평하면서 대중과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적지 않은 곤욕을 치렀다. 최근엔 많은 이들이 비판했던 영화 <반도>에 대해 별점을 무려 3점이나 주고(이동진 평론가 기준에 별점 3점이면 꽤 높은 점수다), GV까지 진행했다는 이유로 제작사로부터 홍보를 부탁받은 것 아니냐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결국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이번 일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게시했다).

 

하지만 이러한 대립이 ‘평론가’라는 직업의 종말을 주장하고 나선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실 의견 차이 정도야 일상생활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는 평론가와 대중 사이에 의견 대립을 넘어 어떤 앙금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둘 사이의 관계가 새로 정립되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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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평론가들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던 시대가 있었다. 그들이 쓴 한 줄의 문장에 해당 콘텐츠의 흥행이 좌지우지되는 경우도 많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과거엔 지금처럼 매체가 다양한 것도 아니었고, 콘텐츠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창구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지인들끼리 해당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 다였다. 결국 일반 대중들이 작품에 대해 의견을 구하거나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신문이나 잡지에 수록된 평론가들의 평론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당 작품에 좋고 나쁨을 평가하는 평론가들의 힘은 자연스레 세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다르다. 인터넷 기술의 발달로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의 SNS들이 등장하면서 매체의 범위가 한층 넓어졌다. 사람들이 서로의 생각이나 의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창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러자 대중의 힘이 세졌다. 평론가는 아니지만 마치 평론가처럼 매체에 나와 특정 콘텐츠를 소개하고 자신에 대한 견해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어려운 단어들로 가득한 평론가들의 글 대신에 그런 인플루언서들의 견해에 더 열광한다. 콘텐츠의 생산자들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제 그들에게 평론은 자신들의 콘텐츠를 더 많이 판매하게 도와주는 마케팅의 일환에 불과하다. 만약 어떤 평론가가 비판을 가한다면 생산자들은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2>에서도 그랬다. 그동안 평론가들이 유지해오던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권위가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물론 오늘날 평론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게 된 데에는 환경 탓만 있지는 않다. 평론가들의 잘못도 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비평도 거기에 맞춰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하지만 일부 평론가들은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자신들의 예술적 권위를 내세워 대중을 억압하려 든다. 일부러 어려운 글을 쓴다. 무조건적인 비판과 독한 말로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으려 한다. 그런 그들에게 대중이 반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비평은 우리에게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평론을 읽지 않는다. 네이버 영화 페이지에 나와 있는 별점과 한 줄 평이 평론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만약에 지금 내가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평론가의 이름을 말해주세요’라고 묻는다면 아마 99%가 한 사람의 이름을 말할 것이다. 바로 영화평론가 이동진 씨다. 좀 더 관심이 있다면 듀나, 박평식, 임준모, 황현산 씨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설령 그들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글까지 읽어본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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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정말 이대로 평론가는 필요없는 직업이 되어버리는 걸까? 평론은 이대로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평론의 가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요즘 같은 세상이라서 평론가가 필요 없는 게 아니라, 요즘 같은 세상이기에 평론가가 더더욱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양성이 존중받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곳이 민주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흑인이 죽어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어느 흑인의 죽음에 다 같이 슬퍼하며 무릎을 꿇는다. 여성과 아이들의 인권을 주장하고 소수자들의 삶을 위해 힘쓴다. 동물의 생명을 위해 세상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듯 다름을 차별이 아닌 차이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하는 세상 속에서 모든 개인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평론가와 대중도 마찬가지다. 평론가나 대중이나 멀리서 보면 한 개인의 의견에 불과하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해서 전문성과 객관성을 담보한들 취향을 반영할 수밖에 없는 예술의 특성상 모두의 의견은 소중하다.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예술적인 권위를 내세워 타인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다수의 의견과 다르다는 이유로 소수의 의견을 배척하는 것 역시 정당하지 못하다. 특히 민주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런 식의 다수결주의는 차라리 전체주의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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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이 여전히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평론가들은 그 분야에 있어서 오랫동안 공부를 해온 전문가들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평론가들의 해석은 우리에게 콘텐츠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비평 이론의 모든 것>이라는 책을 쓴 로버트 타이슨은 비평 이론을 두고서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에 비유했었다. 그녀에 따르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비평 이론만큼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하다. 그런 의미에서 평론가들의 의견이 나와는 다를 수는 있을지언정 무시할 이유까지는 없다.

 

한편 평론가와 대중의 대립을 꼭 예술성과 상업성의 대결구도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게임이나 영화처럼 상업성이 중요한 콘텐츠는 예술성이 끼어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아무리 대중적인 콘텐츠라 하더라도 충분히 예술을 논할 수 있다. 하나의 콘텐츠에는 그것을 이루는 수많은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영화만 하더라도 스토리 외에도 영상, 음악, 미술, 연기 등의 요소가 덧붙는다. 스토리는 단순하지만 영상미나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난 작품도 충분히 예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도 스스로를 사업가가 아닌 예술가라 생각한다. 예술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잡은 콘텐츠도 많다. <더 라스트 오스 어스1>이 그랬다. 예술 영화들의 아이콘인 칸 국제영화제과 베니스 영화제에선 <기생충>과 <조커>가 각각 대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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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평론가와 대중의 관계도 다시 정립되고 있다. 그러니 우리도 그 변화에 발을 맞춰야 한다. 다가오는 시대에 평론가들은 자신들이 이제껏 누려온 예술적 권위를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소통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글을 더 잘 써야 한다. 모두가 평론을 할 수 있는 시대에 평론가가 전문성을 드러내는 방법은 오로지 ‘글’ 밖에 없다. 전문적인 지식을 동원해서 어려운 글을 쓰라는 게 아니다. 약간의 배려를 담아 충분히 소통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가치 있는 평론이 되기 위해선 결국 남들에게 읽혀야 한다. 설득은커녕 이해도 되지 않는 평론이라면 그 평론은 차라리 실패작에 더 가깝다.

 

한편 우리도 변화해야 한다.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고려해야 한다. 다수의 의견이 절대적 기준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나와 다른 견해를 인정할 수 있는 포용력을 갖춰야 한다. 평론가의 의견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평론을 거른다던가, 무시해도 된다는 소리는 아니니까.

 

예술의 본질은 표현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가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표현할 자유가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특정인이 아니라 누구나 자유롭게 평론을 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야기에 전문 평론가들의 새로운 시각이 종종 더해진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욱더 다채롭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바로 이것이 평론의 미래가 종말이 아닌 ‘성장’에 더 가까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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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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