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연한 사고들 [도서]

아무도 탓할 수 없는 우연한 사건 사고들
글 입력 2020.08.15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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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우리들의 실패"라는 제목을 붙여두었다. 우연에 미숙하고, 두려워서 모른 척하거나 오직 잃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여서 그랬다.

 

- 작가의 말 중

 

 

삶에 예상치 못한 일들이 발생했을 때, 그 사실을 감당하기 버거워 누군가에게로 책임을 전가한 적이 있을 것이다. 책임을 전가하여 그 사람이 벌을 받게 만들진 않았더라도, 속으로 그 사람 '때문에'라고 생각한 적이 있을 것이다.

 

편혜영 작가의 다섯 번째 소설집이자 열 번째 책인 《소년이로》 속에는 우연한 사건 사고들이 마치 우리를 시험하듯 곳곳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사건사고를 맞은 사람들이 아닌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을 화자로 내세워 우리에게 말한다. "또다시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인생에 속아 넘어갔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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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이 된 사람들


 

《소년이로》에 실려있는 단편소설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소설에 나오는 어느 한 인물은 '식물' 상태란 것이다.

 

〈소년이로〉에는 유준의 아버지가 "숨 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오며, 〈원더박스〉에는 수만이 아파트 11층에서 떨어진 이불을 피하려다 넘어져 허리를 다치게 되어, 하루아침에 팔만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된다. 또한 〈식물 애호〉에는 오기가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고 "두 다리와 갈비뼈, 쇄골이 부러졌"으며 얼굴이 찢어지고 치아가 부러져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턱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상태가 된다.

 

몸이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사람뿐만 아니라, 정신이 식물이 된 사람들도 나온다. 〈개의 밤〉에 나오는 지명과 〈우리가 나란히〉에 나오는 우지가 그렇다. 지명은 돈이 많은 처가댁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어느 날 지명의 처남, 아내의 남동생이 군대에서 후임에게 폭행을 한 사실이 밝혀지자 장인은 지명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탄원서를 받아오라고 지시한다. 지명은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장인의 말을 거부하지 못하고 욕을 먹으면서 동료들에게 탄원서를 받는다.

 

 

처가 식구들의 걱정대로 이 일로 처남의 장래는 완전히 바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누가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처남 스스로 그렇게 했다. 감당하고 정당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물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처가의 도움이 아니라면 새집에 입주하지 못했고 직장을 잡지도 못했다. 지명은 은혜를 알았고 갚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럴 능력이 없다면 적어도 비위는 맞춰야 했다.

 

- 〈개의 밤〉, p151,152

 

 

우지는 알코올중독환자이다. 그는 자신의 실패담으로 강연을 하고 돈을 번다. 살기 위해 자신의 실패담인 치부를 드러내야 하고 팔아야 하는 것이다.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다.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명과 우지는 몸은 움직이지만 정신은 바닥에 붙잡혀 움직일 수 없는 식물과 같은 상태이다. 마치 햇빛이 없으면 광합성을 하지 못하는, 제자리에만 있을 수밖에 없는 식물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다. 소설에 나오는 사건사고는 모두 우연으로 비롯된 것이니 나와 상관없을 거라고. 그러나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씁쓸하게도 주위에서 많이 일어나고 봐왔던 것이다. 즉, 우리는 언제든지 우연한 사건사고와 마주할 수 있고, 육체가 식물인간이 될 수 있으며, 지명과 우지처럼 정신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마치 〈월요일의 한담〉에 나오는 진처럼.

 

 

진은 결정해야 했다. 박처럼 부당함을 주장하며 고통받거나 아니면 포기하며 고통받기를. 둘 다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 〈월요일의 한담〉, p202

 

 

 

누구의 책임인가


 

이 우연적인 사건과 사고들은 누구의 책임인 걸까. 〈원더박스〉에서의 상황은 이랬다. 이불을 널어 말리는 집이 많을 정도로 볕이 좋은 날, 11층 베란다 창틀에 걸려있던 이불이 아이들의 스타워즈 광선검으로 인해 조금씩 바깥으로 밀려갔다. 차렵이불은 창틀에서 벗어났고, 때마침 밑을 지나치던 수만은 머리 위로 그늘이 진다는 걸 알아챘다. 그래서 그것을 피하려다 넘어지면서 인도와 차도 경계석에 허리를 세게 찧었고, 하루아침에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법적으로 아무에게도 책임이 없었다. 하지만 척수 마취에서 깨어난 수만은 "누구 책임이냐"라고 물었다. 하루아침에 일어난 끔찍한 불행에 책임자가 없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던 것이다.

 

 

수만은 그저 운이 없었다. 짐작할 수 없고 모르는 채 당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애를 스거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준비하거나 노력할 수도 없었다. 그냥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기민하고 착실하고 선량한 것과 상관없는 사고여서 도덕이나 양심을 문제 삼을 수도 없었다.

 

- 〈원더박스〉, p111

 

 

불행은 갑작스레 찾아오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우리를 위협하듯 천천히 다가온다. 〈소년이로〉에 나오는 유준의 아버지처럼, 규모가 큰 공장 대표로 일하던 사람에서 근처에만 가도 약 냄새가 나는 사람이 되고, 결국에 쓰러져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다. 무엇이든 조금씩 변한다. 그럼 이 우연처럼 보이지만, 단순히 우연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이 일에 우리는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이러한 일이 타인에게 발생했을 때, '나'는 어디까지 책임을 질까.

 

타인은 '나'의 불행에 책임지지 않는다. '나' 또한 타인의 불행에 책임지지 않는 것처럼. 〈소년이로〉의 소진은 아무도 없는 유준의 집에 혼자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혼날까 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유준의 아버지를 못 본 체하고 집을 몰래 빠져나온다. 〈우리가 나란히〉의 '나'는 같이 술을 먹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우지의 보호자가 되고 싶지 않아서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말에 여길 정리하고 가겠다며 딴청 부린다. 〈잔디〉에는 이러한 것들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있다.

 

<잔디>에 나오는 화자의 남편은 중학교 교감이었는데, 임시교사와 관련된 일로 정직 중이다. 화자의 남편은 정직 중에 집 마당 잡초를 관리하려 제초제를 사용한다. 그런데 제초제가 잡초는 죽이지 않고 잔디만 죽여서 마당은 엉망이 되고 만다. 남편은 제초제 제조사에 전화해 항의하지만 결국 사과 한 마디도 듣지 못한다. 즉, 책임을 묻고 사과를 요구하지만 제조사에선 그건 제품 문제가 아니라며 남편이 물으려던 책임을 떠안지 않는다. 그렇다면 작 중 노골적으로 책임을 묻던 남편은 얼마나 타인의 불행에 책임감을 느끼는 인물일까?


남편은 과거 교통사고 뺑소니를 목격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당시 바빴고 다른 목격자들이 있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하여 경찰에 가서 뺑소니를 진술하지 않았다. 이렇게 쉽게, 간단하게, 타인의 불행에 책임을 지지 않은 것이다. 남편은 제조사 쪽에 사과 한 마디가 그렇게 어렵냐는 식으로 말했다. 그러면 반대로 남편은 경찰서에 가서 뺑소니 목격 진술을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웠을까.

 

책임이란 참 무겁다. 단어 자체로도 무겁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책임지는 것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책임진다는 것 자체가 불행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건 잘못된 행동으로 여겨야 할까. 함정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책임을 전가하는 것 또한 살아남는 방법이라 여겨야 할까. 책임을 전가하더라도 그 '선택'을 한 책임은 최종적으로 '내'가 져야 한다. 〈원더박스〉에 소영이 생각했던 것처럼, 〈개의 밤〉에 지명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고 〈잔디〉에 등장하는 '나'가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명은 감은 눈을 떴다. 고개를 조아리며 기도하는 아내에게 말하고 싶었다. 하느님은 아무도 벌하시지 않는다고, 우리를 벌하는 건 우리 자신일 뿐이라고,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선택해서 거기 있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 〈개의 밤〉, p154

 

 

[김승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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