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on] '무지개 시리즈-주황' 오스트리아의 오렌지빛 단면들 [여행]

글 입력 2020.08.0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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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

 

빨강과 노랑의 중간이다. 강렬하고 자극적인 빨강과 밖으로 뻗어나가는 질주의 빛 노랑 사이에서 따뜻함을 유지한다. 영어로는 orange, 다른 말로는 당근색, 귤색으로도 불린다. 보통 주황을 보고 떠오르는 성질은 자유분방, 활력, 명랑, 편안함, 적극성, 온화, 안락 등이 있다.

 

‘빨강’에서도 얘기를 했듯이 색은 양면적인 성격을 지닌다. 빛은 어둠과 함께 존재하듯 긍정과 부정은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주황의 부정적인 면은 공격, 강요, 과장의 의미를 지닌다.

 

색은 기분을 대변하기도 한다. 내게 여행은 주황의 기분을 선사한다. 여행을 떠난 생생한 그 순간보다는 지난날을 되새겨봤을 때 뚜렷하게 떠오르는 여행의 기억이 주황이다. 눈을 감고 그 순간을 머릿속에 비추면 생기가 돋고 편안하다. 힘들고 고생했던 시간은 바래져서 내게는 그저 아름답게 보이는 장면으로 변한다.

 

온화하고 따뜻한 복합적인 여행의 이미지는 마치 30분 동안 우려낸 루이보스 티를 5분간 식힌 뒤, 약간의 따뜻함을 유지한 채 마시는 목의 넘김과 같다. 작년 12월 말 떠났던 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 여행이 그랬다. 영화의 필름처럼 연결된 여행기에서 여러 단면을 하나씩 비집어 보면 주황의 기분을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

 

벨베데레 궁전을 가는 것만으로도 설렜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와 <키스> 작품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박동의 춤은 나날이 격렬해졌다. 고대했던 작품을 내 두 눈으로 본다는 건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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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찍었던 클림트, 유디트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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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찍었던, 클림트, 키스 (1908-1909)

 

 

항상 인터넷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유명 작품을 실제로 본다면 작가의 섬세하고 정성스러운 붓 터치, 오랜 세월의 흔적을 견뎌낸 색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모바일과 pc의 여러 버전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변화는 색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있다. 기뻤다. 그 시간이 내게 찾아왔을 때, 내 주위는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믿기지 않았지만, 곧 실감했다. 내가 정말 지금 오스트리아에 있구나.

 

벨베데레 궁전의 거대함에 눌려 미련을 가득 담아 정원을 둘러보는 데 2020년을 알리는 조형물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일행들과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기다리는데 영화 같은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 커플이 조형물 단에 올라섰고 남자는 주머니에서 커플링을 꺼냈다. 그러자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프러포즈.jpg
모두가 진심으로 축하해줬던 프로포즈 장면

 

 

무릎을 꿇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벨베데레 궁전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이 됐다. 여자는 남자의 갑작스러운 프러포즈에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사람들의 반응에 응답하듯 황홀한 기쁨의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내는 축복 속에서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키스를 나눴다. 낯선 공간에서 일어난 로맨틱한 장면은 내게 오렌지빛 기분을 머금게 했다.

 

2019년 12월 31일은 내게 기념적인 날이다. 세계 3대 오페라극장 중 하나인 빈 국제 오페라 하우스에서 오페레타 <박쥐>를 봤기 때문이다. 내 생애 첫 오페라였다. 기대를 가득 품고 들어선 오페라 극장은 모든 게 신기한 거투성이었다. 오페라를 관람하는 사람들의 격식 있는 태도와 옷차림, 화려하고 우아한 양식을 뽐내는 오페라 극장의 내부 모습, 영화로만 보던 고대 프로시니엄 무대는 마치 내게 새로운 세계를 안내해주는 듯했다.

    

12월 31일에 오페레타 <박쥐>를 보는 건 의미 있는 관람이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끝자락, 1년 동안 있었던 걱정과 고민거리를 훌훌 털어버리자는 취지에서 <박쥐>는 세계 여러 오페라 극장에서 레퍼토리처럼 12월 31일에 공연했다. 유쾌하고 센스 있는 대사와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박쥐>가 연말의 공연으로 제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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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레타 <박쥐>의 스탠딩석 티켓과 뒤로 보이는 극장의 모습

 

 

비록 스탠딩석에서 3분의 2밖에 보이지 않은 무대에 잠깐의 실망도 있었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자의 리드에 환상적인 호흡을 보여주는 오케스트라와 능숙하고 노련미가 돋보이는 배우들의 연기는 홀린 듯 집중하게 했다. 무엇보다 이렇게 제대로 성악을 듣는 건 처음이었는데, 소리의 울림이 온몸으로 느껴져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악기는 인간의 목소리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오페라를 보는 나의 곁에 분명 주황빛 기운이 감싸줬을 것 같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시골이다. 자연은 내게 어디서든 내 곁에 당연히 머물러 있었고 자연과 어우러진 나의 모습은 자연스러웠다. 나는 도시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우물 안의 개구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도시의 삶은 나를 더 발전시키고 잠재되어 있던 감각을 깨우는 경험이라 여겼다.

 

도시의 삶에 점점 물들어 갔을 때 깨달았다. 자연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오스트리아 여행 중에도 수없이 느꼈다. 그중에도 수려한 장관을 자아냈던 이름 모를 호수가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할슈타드를 가던 길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맑고 투명하게 보여주는 아름다운 풍경에 저절로 발걸음이 멈춰졌다. 한겨울이었는데 차디찬 호수를 배경 삼아 수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모든 요소가 조화로웠고 그저 신비로울 따름이었다.

 

 

호수.jpg
이 호수의 풍경을 사진으로 제대로 담지 못해 안타깝다.

 

 

그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순간에 모든 감각이 역동적으로 요동치는 경험을 받았다. 그때의 추억은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렌지빛 구슬로 탄생하여 핵심 기억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가끔 우리의 일상은 지루하다. 무의미한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사람은 금방 지친다. 지친 마음에 활력을 불어주는 역할을 여행을 한다. 기억의 서랍 속에서 여행은 예쁘게 포장한 선물 박스로 전시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너만이라도 온갖 긍정적인 덩어리로 뭉쳐있길 바란다고, 그렇게 내게 잠깐씩 꺼내 볼 수 있는 위로가 되어달라고 여행에 속삭였다. 잘못되고 왜곡된 기억이어도 좋으니 그렇게 내 옆에 있어 주면 된다고 말했다. 그것이 내게 여행이 주황빛 기분을 선사하는 이유다.

 


 

에디터 이지윤.jpg

 

 

[이지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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