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삶은 소설보다 우연적이라서 - 식물의 이름 [문학]

글 입력 2020.07.31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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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가상적이지만 독자는 소설을 현실처럼 받아들이며 읽는다. 물론 소설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은 인공적인 것이다. 작가의 상상력으로부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모습을 창작되기 때문에, 예술은 기본적으로 작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장르마다 차이는 있을 것이다. 현대의 추상화나 실험음악 같은 것들은 현실에서 마주할 수 없는 아주 낯선 형태를 하고 있어 작위성이 극대화된 예술이다. 반대로 다큐멘터리 작품들은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동시에 작품 의도를 완성하기 위해 각 장면을 적절하게 배열한다. 작위성의 측면, 현실과의 간극의 측면에서 본다면 소설은 아마 다큐멘터리 작품의 쪽에 가까울 것이다. 소설의 독자는 자신이 그것에 몰입하고 공감하여, 작품 속의 현실이 자신의 현실이 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독서를 한다.

 

소설에 있어서 ‘개연성’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소설의 개연성은 독자가 각 장면과 이야기를 친절하게 연결해줘서 독자가 인물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이며 읽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억지스러운 설정이 등장하거나 인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때 작품에 대한 매력이 반감하게 되는 것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결국 소설이 매력적인지 아닌지는 독자의 경험과도 관련이 있다. 소설의 구조가 나의 경험, 나의 사고방식에 부합하지 않으면 나에게 개연성이 떨어지는 작품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내가 감동받으며 읽은 소설을 친구에게 읽혔을 때 친구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서로의 경험이 다르고 서로의 현실이 달라서 소설로부터 기대하는 바도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독자의 독서를 어렵게 하는 서술 방식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시간 순서대로 서술을 하지 않거나(액자식 구성) 인물의 생각을 두서없이 늘어놓는(의식의 흐름) 식의 전개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낯섦이 극대화되어 서술의 개연성을 도저히 찾기 힘든 소설도 있다. 오늘 소개할 한유주 작가의 「식물의 이름」이 그러한 소설이다. 「식물의 이름」은 작년에 출간된 한유주 작가의 소설집 『연대기』에 수록되어 있으며, 문예지 《문학과 사회》 (2016년 봄호)를 통해 발표되었던 작품이다.

 

이 단편소설의 인물은 갑자기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이혼하고 갈 곳 없는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다가, 새로 거주하게 된 집의 분위기를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특별한 사건 없이 이러한 이야기들이 계속 맞물리며 반복된다. 일반적으로 독자는 이러한 소설을 읽을 때 자신의 기대와 다른 서술에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한유주 작가는 실험적인 문체와 구성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오묘하면서 긴밀한 분위기 때문에 사랑받고 있는 작가이다. 개연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차원에서 이야기를 전해주는 한유주 작가의 이 소설은 독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경험적 삶에 부합하지 않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이러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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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 주홍색, 노란색, 연두색, 녹색, 모래색, 흙색, 분홍색, 혹은 그 모든 색이 뒤섞인 색이었어요. 죽어가는 잎의 색. 선명하게 도드라진 초록색과 연한 옥색으로 이루어진 작은 잎사귀는 비교적 분명한 형태였죠. (p.63)

 

 

이 소설에서 말해지는 것은 증언에 가깝다. 식물을 마주한 주인공의 감상을 늘여놓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이어서 어째서 이 식물을 마주하게 되었는지, 어째서 이 식물과 같은 방에 오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고, 그것은 그녀가 이혼을 해서 머물 거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방주인은 한동안 방을 비울 예정이라 몇 달간 방에서 지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주인공과 만나게 되고 이야기를 나누고 방을 내어주게 된다. 주인공은 이 방의 분위기, 화장실과 부엌과 커피머신과 침대 매트리스 같은 것들의 느낌을 찬찬히 살펴보고 이 방에 적응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 집으로 온 편지를 마주하고는 문득 방주인과 자신의 이름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더더욱 이 방의 주인이 된 느낌으로 편안하게 생활을 하게 된다. 시간은 계속 지나고 어째서인지 방주인을 돌아오지 않는다. 이불의 촉감, 커피설탕의 뭉개짐 등으로 이어지는 일상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소설에는 줄거리가 없다. 주인공의 진술 속에서 단편적인 사건들이 등장하지만, 소설을 이끄는 중추적인 극적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건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소설의 곁줄기를 이루어준다. 큰 줄기는 없고 곁줄기만 있는 소설. 사건은 없고 배경만 있는, 대화는 없고 발화만 있는 작품인 것이다. 물론 이 단편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 새로운 장면으로서 소설은 마무리되지만(이는 직접 확인해보길 추천한다), 기본적으로 이 소설은 무의식적인 발화의 연결로 계속 이어져 나간다.

 

한유주 작가는 독자에게 있어서 친절한 작가라고는 하기 힘들다. 일반적인 대중의 독서 양상을 배려하지 않은 글쓰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문학 독해 방식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난해한 작품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메시지를 찾기 위해 노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독서에게 새로운 방식의 독서를 요구하고 있다.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을 천천히 따라가며 스스로에게 발생하는 감정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식물의 이름」에서 매력을 느낀 부분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소설의 문체이고 또 하나는 주인공의 태도이다. 인물의 진술 속에서 이 둘이 밀접하게 연결되는데, 한편으로 인물의 진술은 이 소설의 전부이다. 그렇게 때문에 본래 소설을 읽으면서 고려하게 되는 소설 바깥의 모든 것들(예컨대 사회적 배경이나 시사점)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이 독서의 과정에는 오직 텍스트와 독자만이 놓여있다. 책장을 넘기면 펼쳐지는 소설의 세계에만 집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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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문체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이 소설의 각 문장들 사이에는 유기적인 관계가 드러나지만 그것은 개연성이나 필연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피지 않은 꽃봉오리는 연한 분홍색이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색이 점점 더 짙어져요. 분홍색에서 자주색으로. 자주색에서 갈색으로. 갈색에서 검붉은 갈색으로. 검붉은 갈색에서 검정에 가까운 색으로. 색의 변화는 꽃이 지는 속도를 가리켜요. 추측이에요. 꽃줄기와 잎줄기는 고구마순을 닮아 있어요. 길이와 굵기가 다르고, 형태와 색이 유사해요. 나는 고구마순을 본 적도, 먹어본 적도 있어요. 그것의 이름이 고구마순이라고 들었을 때, 나는 그 이름을 의심하지 않았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p.66)

 

 

이러한 문장들을 보았을 때, 이어진 두 문장들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독자에게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문장들은 아니다. “추측이에요”는 앞 문장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을 알려주는 표지라서 작가 자신이 적은 문장의 필연성을 오히려 떨어뜨린다. 꽃줄기의 외양을 고구마순에 빗대어 표현하다가 갑자기 고구마순과 관련한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야기를 집약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발화의 방향을 분산시켜 이야기의 구심력을 흐트러뜨린다. 작가는 이야기의 탑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완성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다만 한 문장에 의해 우연히 연상된 다른 문장으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이어갈 뿐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이러한 유기적인 문장들로부터 소설의 장면이, 인물의 심리가 더욱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소설은 독자를 어디론가 끌고 가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그냥 우연적이고 무의식적인 장면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우연적인 모습이 더욱 자연스럽다. 사실 우리의 생각의 과정은 질서정연하지 않다. 주인공이 그러고 있듯이 한 생각을 하다가 다른 경험이 떠오르기도 하고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이런 내면을 곧이곧대로 말하면 주변에서는 엉뚱하다고 핀잔을 줄지도 모르나, 이러한 엉뚱한 생각들이 오히려 힘을 주지 않은 자연스러운 방향이다.

 

생각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실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현실은 우연적이다. 현실의 현상들을 직선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의 생각이 때론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듯이, 세상사도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어쩌면 이러한 세상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기존의 ‘개연성-소설’들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식물의 이름」을 통해서 개인의 감정과 세상의 양상에 더욱 가까워지는 느낌이 든다. 서사를 쫓아가려 노력하며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문장들 하나하나 천천히 읽으며 개연적 불일치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 것이 이 소설의 매력인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이러한 문장들을 무의식적으로 발화하며 독자들을 이야기에 매료 시킨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문장들 속에서 주인공의 불안한 면들이 보이기도 한다. 주인공은 사물의 이름, 혹은 사물의 개수에 대해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녹색과 갈색 사이의 색의 이름을 궁금해 한다든가, 쌀알과 커피가루의 개수를 센다든가 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손을 닦았죠. 손을 닦았는데도 땀과 크림과 비누가 뒤섞인 미세한 냄새가 났어요. 그런 냄새에도 이름이 있을까요. 내게는 의미나 상징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내게는 이름이 필요해요. 구체적인 이름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리킬 수 있는 이름이. 모든 것의 모든 이름이. (p.83)

 

 

이름이나 개수에 집착하는 것은, 존재를 명확하게 규정짓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모든 사물들을 논리성과 필연성의 세계에서 파악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필연적 세계는 명확하고,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어서 불안하지 않다. 규정되는 순간 다른 가능성이 없어서 더 이상의 해석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주인공이 이름과 개수에 매달리는 것은 불안의 가능성과 해석의 여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은 그래서 오히려 불안해 보인다. 무의식적이고 자유로운 문체 속에서도 자유롭지 못하고 주변을 계속 규정지어야 하는 주인공의 모습. 이러한 모습은 어쩌면 불안한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의 모습인 것이 아닐까. 규정짓고 싶은 마음은 무엇일까. 불확실한 세계로부터 안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아닐까. 공기 중의 먼지처럼 둥둥 부유하는 것만 같은 자유로운 문체와는 반대로 이름과 개수에 집착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더욱 안타깝다.


*

 

리얼리즘 진영에서는 소설을 현실에 가깝게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들에게는 개연성이 보장된 소설이 중요하다. 논리적으로 그럴듯한, 현실에 일어날법한 현상을 그려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현실이 논리적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현실의 우연적 사건들의 연속체이다. 현실은 우연적이고, 사람들은 논리적인 틀을 이용해서 이러한 현실을 이해하려고 할 뿐이다. 개연성을 세상을 파악하는 한 가지 방식일 뿐, 세상의 본질 그 자체는 아니다. 한유주의 작품은 리얼리즘 작품보다 더욱 현실에 가까운 예술이 아닐까 생각한다.

 

「식물의 이름」과 같은 소설을 읽을 때면 일상적인 사고방식, 논리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 멀어져 자유로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소설이라면 매일같이 읽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소설을 읽고 책장을 덮은 뒤에는 다시 일상적 세상에 속한 스스로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소설의 주인공에 조금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자유로운 발화 속에서 한편으로 강박을 간직하고 있는 그녀를 만나고 싶다. 기계처럼 정연하게 움직이는 세상에서 불안을 느끼는 그 모두의 곁에 함께 있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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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주 작가

 

 

[한승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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