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전을 읽고, 보고, 듣다: 오만과 편견 [문화 전반]

클래식은 영원하기에, 영원함은 변화하기에
글 입력 2020.07.09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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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고전, 소설 [오만과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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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서, 저자 제인 오스틴의 가치관은 주인공 엘리자베스의 아버지인 베넷 씨와 닮아 있다. 결혼하지 않고 작품 활동을 했던 저자 오스틴과, 실수로 결혼했으나 아내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평범한 삶을 포기한 채 서재를 거점으로 학문과 남 비꼬는 일에 열중하며 사는 베넷 씨는 모두 당대 삶의 팍팍함을 지적할 눈은 있었으나 정작 자신들의 삶 자체를 개선하려고 했던 것 같지는 않다. 대신 그들은 그런 눈조차 없는 이들을 비판하는 한편, 자신들과 비슷한 눈을 지녔고 이제 막 세상과 대면해야 하는(결혼을 앞둔) 딸 엘리자베스만은 어여삐 여기며 그녀가 스스로의 마음을 따라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염원한다.

 

여기서 중요하게 언급하고 싶은 것은 그들의 ‘적절하게’ 비판적인 태도다. 이 비웃음의 거리감각은 참 절묘한 구석이 있는데, 여기에는 냉소에 포함되기 마련인 혐오가 담겨있지도 않고, 객관적인 관찰자의 시선이 담고 있는 초연함도 없으며, 그렇다고 자신도 그 비웃음의 일부라는 자조도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너희들은 이토록 어리석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안에서 사랑을 느낀단다.' 식의 휴머니즘적인 웃음도 아니다.

 

이 미묘한 거리감의 흔적은 아마 베넷 씨가 친척인 콜린스에게 느끼는 감정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헌스퍼드의 목사인 콜린스는 사회적 지위와 조건에 너무나도 얽매여 있는 고지식하고 답답하고 매력 없는 사람으로, 베넷 씨로서는 그가 자신의 집은 물론이고 서재까지 들어오는 것을 참기 힘들 따름이다. 하지만 동시에 베넷 씨는 콜린스의 언사를 아주 재미있어 하며 "편지 쓰기가 너무 싫지만 서도, 콜린스 씨하고는 무슨 일이 있어도 편지 왕래를 포기하지 않으련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옆에 달라붙어서 한없이 성가시게 구는 건 싫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지면 섭섭할 정도의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랄까. 재밌는 건 이 놀려먹기에 독자들이 개운하게 동참하게 된다는 건데, 그 조롱이 죄의식을 거의 동반하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보니 그건 콜린스가 베넷 씨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기분 한 번 상해하지 않은 채 꿋꿋하게 그 태도를 고수해나간다는 데에 있는 듯하다.

 

대상이 상처받지 않는 놀려먹기의 즐거움. 이는 제인 오스틴이 놀려먹을 대상들을 부당하게 실제 이상으로 둔감한 모습으로 묘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그 인물들이 18세기 말~19세기 초 영국 사회의 가치 체계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적당할 것이다. 베넷 부인이나 콜린스 등이 지니고 있는 결점들은 물론 개인의 성격을 통해 더 강조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사회적 지위가 요구하는 행동들에서 비롯된다. 구체적인 대상을 두고 풍자를 하되, 그 끝은 사회에 닿아있다는 것. 다소간의 과장을 통해 인물을 희화화하기는 하지만 그 웃음을 끌어내는 행동의 원인이 지극히 현실적인 탓에, 그들을 매섭게 매질하기는 쉽지 않다. 더군다나 우리의 분별력 있는 두 주인공조차도 재산과 사회적 신분, 명예라는 가치 속에 그토록 얽매여 판단과 행실을 그르치곤 하니, 그 무게가 얼마나 큰 것일지는 멀찍이서 실실 웃고만 있던 독자로서도 어렵잖게 느낄 정도이다.

 

그 때문에 특별히 연민 가득한 묘사가 담겨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만과 편견> 속 등장인물들은 마냥 경멸과 조롱의 대상만으로 남지는 않는다. 특히 구제불능의 베넷 부인이 대표적인데, 자식들을 시집보내는데 안달이 난, 수다쟁이 중년 여성을 보고 있노라면 그녀가 꼴 보기 싫은 인물이라기보다는, 바로 꼴 보기 싫은 그 면 때문에 오히려 볼만한 매력을 지닌 인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결국 독자는 인물에게서 나름의 매력을 느끼면서도 그 사람을 웃음거리로 여기는 일을 계속하게 된다는 건데, 사람을 베지 않으면서도 효율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비판의 칼을 휘두르는 것, 그것이야말로 제인 오스틴의 진정한 매력이자 이토록 뻔해 보이는 구조를 지닌 작품이 오래도록 생명력을 얻어 살아 숨 쉴 수 있는 한 가지 이유이리라 생각해본다.

 

 

 

청춘들의 오만, 그리고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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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영화 오만과 편견은 원작의 향기를 고스란히, 동시에 신선하게 되살리는 데 주력한 영화로, 조 라이트 감독은 18세기 영국 시골의 풍경을 담아내며 그 안에서 사랑의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젊은 연인들의 심상을 좇는다. 시대극이라고는 가까이 해본 적이 없으며 오스틴의 원작에 대해 말 그대로 ‘오만과 편견’을 지니고 있던 TV출신 신인 감독 조 라이트를 기용한 것부터가 남다른 일이다. 그는 놀라울 만큼 원작의 품격을 고스란히 살려낸다. 배우들은 물론 제작진 대부분이 오스틴 원작의 팬이어서 만들 수 있었던 이 영화를 18세기 신데렐라 스토리쯤으로 여긴다면 그것이야 말로 편견이다. 오만과 편견은 순수하게, 뜨겁게 사랑했던 시절을 떠올리도록 재치와 유머를 발휘하는, 그래서 더없이 사랑스러운 영화다.

 

영화에는 여러 번의 무도회 장면이 나온다. 모두 저택 안에서 무도회가 열리기 때문에 카메라는 실내에서 움직여야만 한다. 아무리 세트에서 촬영했다고 해도 무도회에서 자유롭게 춤추는 사람들처럼 이 방 저 방을 춤추듯 옮겨 다니는 부드러운 카메라의 워킹은 놀랍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장면에서 과감하게 '롱 테이크'를 보여준다. 거의 백여 명이 각자의 연기를 하고 있는데, 카메라는 컷 없이 그들을 모두 잡아낸다. 실내에서 부드럽게 무빙하는 카메라, 그리고 롱 테이크, 이것은 철저하게 짜인 콘티와 엑스트라 하나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는 연기의 호흡, 고도의 카메라 기술,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실현된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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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모두 완벽한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는 러닝타임의 한계 때문인지 굉장히 빠른 흐름으로 지나간다. 덕분에 특히 앞부분이 많이 잘렸는데, 그래서 다아시의 오만함과 그로 인한 엘리자베스의 편견, 그리고 왜 다아시가 엘리자베스를 사랑하게 됐는지 등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지 못했다. 그로인해 등장인물들의 갈등이 약화되고 왜 제목이 오만과 편견인지 알 수 없게 됐다. 조 라이트 감독버전의 <오만과 편견>은 너무 가벼웠다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다만 이러한 영화적 퀄리티 저하는 '워킹 타이틀' 영화들이 종종 보이는 현상이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따름이다.

 

 

 

고전이 영원한 이유, 고전을 재해석하는 이유?


 

소설이 쓰여질 당시, 젊은 미혼의 여성들은 ‘결혼을 위해서 남성들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을 것인가’, ‘어떤 남성이 좋은 결혼 상대자인가’, ‘이상적인 결혼은 어떤 형태인가’와 같은 문제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었고, 당시의 소설은 이들에게 결혼 지침서의 역할을 했다. 『오만과 편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스틴은 이상적인 결혼 조건을 위해서는 자신과 상대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존경에 바탕을 두면서 현실적인 여건도 고려해야 한다고 논평한 바 있다. 그래서 오스틴에게 중산층 여성의 탈출구는 곧 ‘결혼’이었다.

 

주인공의 성적 욕망이, 특히 엘리자베스의 성적 욕망이 거의 언급되지 않는 원작과 달리 영화에서는 엘리자베스가 성적으로 일깨워진 욕망의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이 전경화된다. 라이트의 영화는 전체적인 큰 틀은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여성의 몸을, 여성의 욕망을 주체화했다는 점에 있어 원작을 새롭게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영상)와 문학을 이야기할 때 지금까지는 ‘영화가 원작 소설을 얼마만큼 충실하게 재현했느냐,’ 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 질문을 ‘영화가 원작 소설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영화가 원작 소설을 왜 그렇게 보고 있느냐’로 바꿔보면 어떨까. 왜냐하면 영화를 통해 문학을 보다 깊고 넓게 읽을 수 있고, 자연스레 문학은 무궁무진한 콘텐츠의 원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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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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