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식물처럼 사랑하기 - 빨간 열매 [문학]

글 입력 2020.06.30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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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는 우리나라 제도권 문학의 가장 독특한 시스템 중 하나이다. 서양권 국가에는 등단이라는 시스템이 없다. 글을 쓰고 싶다면, 단순히 출판사 한두 군데에 원고를 돌리고, 출판사와 합의가 되면 글이 곧 발표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제도권 문학에서는 등단 여부가 글을 발표할 수 있는 요건으로 작용한다. 등단을 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좋은 글을 출판사에 넘겨도, “아 이건 좋은 글이긴 한데... 혹시 일단 문학상이나 신춘문예에 지원하시는 것은 어떤가요..?”하며 일단 등단을 하고 오라고 회유를 당하는 경우들이 생긴다. 문단이라는 주류적인 시스템 내에서 작가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1000:1을 상회하는 경쟁률을 뚫고 일단 등단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우리 문단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받고 있고, 또한 최근에는 문학계에 진입하기 위한 여러 대안적인 경로들도 마련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명한 심사위원들의 심사 끝에 신년 첫날에 발표되는 이들 글의 가치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빨간 열매」는 이러한 경로를 통해 발표된 작품이다. 2020년 경향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당히 선발된 작품이다. 이 소설의 매력은 동화나 설화 같은 환상적인 분위기에서부터 온다. 나에게 소중하지만 더 이상 이 세계에 없는, 죽은 사람이 식물로 환생하고 다시금 나의 소박한 일상에 함께하는 이야기. 이러한 이야기는 사소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일상적 감정들을 소설의 표면으로 끌고 올라온다. 그 환상적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소담한 일상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그런 소설이다. 신춘문예가 반년이나 지난 이 시점에 읽게 된 소설이지만, 이러한 작은 감각들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올해 신춘문예가 반년이 지났고 다음 신춘문예가 반년 남은 딱 이 시점에, 이 소중한 작품을 공유하고 싶었다.


*

 

소설의 서술자는 번역을 업으로 삼으며 평범하게 지내는 여성이다. 그녀는 아버지와 같이 살았고, 아버지는 세상의 작은 일들에 사사건건 호기심과 불만을 그녀에게 털어놓으며 지낸다. 그런 평범한 나날들이 지나고, 아버지는 자신의 유골로 화분을 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장례를 치르고 유골을 찬장에 올려놓고 지내던 어느 날, 그녀는 아버지의 유언을 떠올리고 아버지의 뼛가루를 섞은 토양에 작은 모종을 심어 키운다. 관심 속에서 모종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모종에서 들려온다. ‘물을 달라’, ‘밖에 나가고 싶다’ 등의 목소리가 그녀의 일상을 이루게 되고 식물 아버지와의 새로운 일상을 시작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 아버지는 거리에 산책을 나가고 싶어 하게 된다. 아버지의 성화에 그녀는 결국 구루마에 아버지 화분을 싣고 거리와 공원을 산책하곤 한다. 그런데 공원에서 쉬어가던 그들은 우연히 화분을 들고 산책을 나온, 같은 처지의 남성을 만난다. 남성의 화분에서는 여성의 말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과 두 화분은 서로 놀란다. 그렇게 그들은 통성명을 한다. P라는 남자와 그의 어머니라는 화분, 서술자와 그녀의 아버지라는 화분. 그렇게 넷이 종종 어울리게 된다. 그들은 P의 집에서 모이는 날들이 부쩍 많아진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는 동시에 두 식물도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식물을 한 화분에 함께 심어 준다. 두 식물의 사랑은 빨간 열매를 맺는다. 두 사람은 열매를 반으로 쪼개 나누어 먹는다. 서술자는 꿈속에서 빨간 공을 마주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P가 태몽인 것 같다고 말하며 소설이 끝난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우리 현실의 소재를 끌어다 사용하지도 않았으며, 사회적 문제의식을 담고 있지도 않다. 한국인 독자를 상정하고 있는 주류문학의 소설이라면 현 시대의 이슈나 코드를 활용하기 나름인데, 이유리 작가의 「빨간 열매」는 마치 현실로부터 떨어져 있는 세계의 이야기를 써놓은 것만 같다. 한국 문학의 독자들에게 이러한 설정이 낯설거나 아쉬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이 이야기는 오랜만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두 식물의 모습이 어쩐지 사람의 모습보다 더 생생한 것 같아서 생경하면서도 재미있게 읽었다.

 

이 2020년의 소설에 대해 내가 받은 깊은 인상은 두 가지 측면에서 오는 것 같은데, 그 중 하나는 인물 구도이고, 또 하나는 작가의 표현이다. 일단 인물 구도를 먼저 이야기하자면, 이 이야기를 이루고 있는 모든 인물들은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한다. 좀 풀어서 말하자면, 인물들 사이의 대립이나 갈등이 없고, 모든 인물들이 하나의 분위기, 하나의 인상으로 점점 모여드는 느낌이 난다. 살아생전 아버지는 나를 귀찮게도 했지만, 결국 나를 사랑했고 그러한 사소한 고집과 말다툼을 통해서 서술자와 아버지는 하루하루 일상을 완성해 나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간이 지나, 그는 다시 한 식물로 서술자의 일상에 참여하게 된다. 손이 가는 귀찮은 존재가 다시 나타난 것이지만, 이는 오히려 예전의 일상의 복원해주고 그 사소한 대화로서 서술자의 생활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서술자에게 있어서 공원에서 만난 P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P와 P의 어머니(화분)의 생활은 서술자의 일상과 꼭 닮아 있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의 생활을 지내고 있으며, 이들의 일상이 서술자 ‘나’의 일상에 들어오게 된다. 서술자와 아버지의 일상은 비현실적인 상황이라서, 그들끼리는 의미 있는 생활을 지내고 있으면서도 바깥 세상의 사회적 관계에 동화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서술자는 자신과 평행한 생활을 하고 있던 P를 만나고, 경험과 일상을 공유하며 자신의 일상을 더욱 풍족한 영역으로 이동시키게 된다. 그러면서 ‘사랑’이라는 감정도 일상 속에 들어오게 된다. 그 사랑은 ‘나’와 P 사이의 사랑인 동시에, 두 식물의 사랑이기도 하다. 이 복합적인 대칭관계 속에서 서사가 더욱 아름답게 빛이 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환상적인 것이다. 현실의 반영은 아니며, 앞으로 누군가의 일상이 될 리도 만무하다. 이러한 동화적인 이야기가 내 앞에 펼쳐질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이야기는 다른 누군가와의 공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서, 이 소설을 통해 다른 누군가와 이어지는 느낌이 들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이 독자의 생활에 굉장한 활력이 되어줄 수 있다고 믿는다. 저자가 평범한 일상에 환상의 세계를 중첩시켜 놓은 것처럼, 이 이야기를 읽은 독자도 자신의 일상에 일말의 활기를 불어넣어줄 상상력을 얻게 된다. 나와 같은 말 못할 일상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누군갈 만나게 되는, 그런 소박한 상상 정도는 스스로에게 허용해보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환상적, 동화적 상상력이 독자에게 크게 와닿을 수 있는 것은 작가 특유의 문체와 표현력에서 기인한다. 이 흥미로운 인물 구도에 작가의 표현력이 더해져 소설이 완성된 것이다. 이유리 작가의 여유와 재치를 통해 독자의 마음속에 기분 좋은 상상력이 자리잡게 된다. 그러한 것이 느껴지는 문체는 가령 다음과 같은 표현에서 나타난다.


 

아버지와 P 어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를 향해 완전히 기울어진 데다 부러뜨리지 않고서는 떼어낼 수가 없을 만큼 가지가 친친 얽혀 한 그루의 나무나 다름없게 되었다. 아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버지와 P 어머니를 구분하기 어려웠고 굳이 구분할 필요도 없었으며, 또한 그렇게 말하자면 나와 P도 거의 비슷한 구조의 인간인 데다 나는 아버지를 P는 어머니를 닮았으니 결국 우리 넷은 서로가 서로를 닮아 가고 있는 셈이었고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가지가 친친 얽혀” 있다고 말하는 부분, 그리고 이 대칭적인 구도 속에서 “나와 P도 거의 비슷한 구조의 인간”이라고 인식한 부분에서 작가 특유의 재치가 느껴진다. 이러한 문장을 읽노라면, 인간들도 식물들의 모습처럼 사랑하길 염원하게 된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어느 새 두 화분이 부모 세대가 되고 두 남녀가 자식 세대가 되는 묘한 양상이 드러난다. 나이가 찬 두 식물은 아마 자신들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들의 사랑에는 부끄러움이 없다. 서로의 가지를 더듬으며 솔직하게 애정 표현을 나누며 관계를 맺고 끝내는 빨간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이 모습을 지켜보는 두 인간이 있다. 식물들의 느리지만 스스럼없는 사랑을 보는 이들은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또 그 감정을 통해 서술자와 P는 어떻게 서로에게 다가가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을까. 부모의 사랑을 본 그들의 포옹은 식물처럼 느리지만 순수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작은 낭만들이 이 신진 작가의 소담한 표현을 통해 독자의 삶으로 뻗어 나오게 되는 것이다.


*

 

문학은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없으며, 다만 구원이 오기까지의 시간을 기다릴 수 있게 해줄 뿐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문보영 시인이 한 말인데, 나로서는 이유리 작가의 등단작에 붙여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세상이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우리를 괴롭히고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떤 삶을 구축하여 세상에 대응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하면 앞길이 막막한 기분이 든다.

 

이유리 작가의 「빨간 열매」는 우리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며, 먼 미래에도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녀의 글쓰기는 독자에게 빛나는 상상력을 전달해준다. 독자는 이 상상력에 힘입어 스스로에게 동화의 세계를 선물하게 된다. 이 동화 속에서 스스로를 보살피다 보면 구원이라는 것도 어느 새 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유리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길 바란다. 신춘문예 작품들은 각 언론사에서 인터넷에 공개하고 있다. 올해 경향일보 신춘문예를 찾아보면 어렵지 않게 이유리 작가의 「빨간 열매」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등단 직후 계간지 《실천 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며 곧바로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으니, 아마 앞으로도 그녀의 작품을 계속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올해 처음 문단에 발을 디딘 그녀의 행보를 기대해 본다.

 

 

[한승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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