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슬픔이 어려운 날에 -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도서]

글 입력 2020.06.29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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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2018년 가을 즈음에 한 번, 그리고 그로부터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올해 봄에 한 번 더읽었다. 2018년, 시집을 덮은 뒤 의식의 흐름에 따라 줄줄 써내려간 메모를 찾아 공책을 뒤적인다.

 

‘헤엄치고 또 헤엄쳐도 결국 제자리인 바닷속 같기도 하고, 끝도 없이 어디선가 쏟아져나오는 중인 누군가의 눈물 같기도 한, 파랗다는 말보다는 퍼렇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이 시집을 두고, 자물쇠를 걸어놓은 듯 새어나오지 못하는 어떤 슬픔을 상상했다. 지금 여기서 써낼 수 있는 최대한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렇다. 방황하는 슬픔, 어딘가에 갇힌 슬픔, 그러므로 나는 들여다볼 수 없는 슬픔, 나는 여는 방법을 모르는 슬픔.’

 

나는 당신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세상의 슬픔이 어려웠다.

 

 

 

혀 끝에 달린 눈물을 떨굴 수가 없어서



 

지구 속은 눈물로 가득차 있다

 

타워팰리스 근처 빈민촌에 사는 아이들의 인터뷰

반에서 유일하게 생일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아이는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타워팰리스 근처를 둘러싸고 있는 낮은 무허가 건물들

초대받지 못한 자들의 식탁

 

...

 

혀 끝에 눈물이 매달려 있다

그녀 속에서 얼마나 오래 굴렀기에 저렇게

둥글게 툭툭,

사과 속살은 누렇게 변해가고

 

식탁의 모서리에 앉아 우리는 서로의 입속에

사과 조각을 넣어준다

한입 베어 물자 입안에 짠맛이 돈다

 

처음 자전을 시작한 행성처럼 우리는 먹먹했다

 

- 신철규, <슬픔의 자전> 중에서

 

 

그리고 이 시집을 다시 찾았던 올해 봄 즈음에 나는 ‘슬프다’는 말을 자주 중얼거리곤 했다. 구체적으로 기억을 곱씹자면, ‘슬프다’와 ‘외롭다’라는 감정 상태를 번갈아 자주 되뇌었다. 슬픔을 앞에 두고서 슬프기에 외롭다고 말하던 순간도 있었으며, 반대로 외롭기에 슬프다고 말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개는 동시적이었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결과는 비슷했다.

 

감정 상태라는 일종의 마음은, 행동이라는 몸의 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가로막혔다는 것.

 

슬픔이 감정 상태라면 그에 대한 행동 양식은 ‘우는 일’이 아닐까. 나는 울지 않았다. 울지 않았던 것에도 여러 이유가 있었을 테지만, 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울 일이 아닌데 울게 되는 날엔 이대로 도망쳐버리게 되는 건 아닐지 하는 벼랑 끝의 마음 때문이었다. 대신 지금껏 그래왔듯이 슬픔을 성실히 이겨내 보자고 다짐하며 부차적인 행동 양식을 생각해냈다. 그것이 슬픔을 중얼거리는 일이었다.

 

슬프다고 말해보면 목소리에 달려 슬픔도 털어질 거라 믿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은 효과를 기대했나 보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고 또 꺼내도 진짜 눈물은 혀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떨굴 수 없는 눈물을 머금으며 입안에 도는 짠맛에 먹먹해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여전히 당신의 슬픔과 세상의 슬픔이, 그리고 나의 슬픔이 어려웠다. 그래서 이 시집을 다시 펼쳤다. 슬픔이란 걸 알고 싶어서.

 

 

 

무지개가 뜨는 동안


 

산문과는 달리 독자에게 언어 그대로 투명하게 닿지 못하는 시의 특성을 애정한다. 그래서 시 한 편을 두고 찬찬히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가며 읽는 걸 좋아한다. 급하지 않게, 문장 간에 깃든 침묵을 함께하며, 그 여백을 곱씹는 일. 그렇게 몇 줄 안 되는 시 한 편이 산문보다도 더 기다란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해석보다는, 시로 읽는 누군가의 일기 정도로 여겨주었으면 한다. 내가 당신의 슬픔을 모르듯, 당신도 나의 슬픔을 모를 테지만 그래도 우리는 서로의 슬픔을 읽어보려는 마음들을 가졌으니까.


 

여기는 그늘이고, 저기는 환한 빛 속이야.

 

커튼이 쳐진 교실은 어둑하고

커튼 틈으로 들어온 햇살이 촛대처럼 길게 늘어져

교실 바닥을 두 쪽으로 쪼갠다

 

우리는 창틀에 팔꿈치를 괴고 무지개를 바라본다

처음과 끝이 희미해서 아슬아슬한 무지개

손으로 잡기에는 너무 멀고 뛰어가면 사라져 버릴

 

운동장에서 단체 줄넘기를 하는 아이들은 한 마리의 벌레 같다

지구가 생기고 난 뒤 한 번도 멸종된 적이 없는

구름에 대해 생각하는 오후

 

먼지 속에 갇혀 운동장에서 뛰고 있는 아이들에게

우리는 유령처럼 보이겠지. 

 

- 신철규, <무지개가 뜨는 동안> 중에서

 

 

무지개는 비가 온 뒤 공기 중의 물방울 속에서 만들어진다. 다채로이 반짝거리는 무지개마저도 그 안 깊숙한 곳엔 축축한 습기를 머금고 있는 셈이다. 언제 어디에나 있는 슬픔.

 

시의 공간은 ‘여기’와 ‘저기’로 나뉜다. 교실과 운동장을 각각 지칭하는 지칭어로서 ‘여기’와 ‘저기’가 쓰이는 것으로 미루어 학교라는 공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학교 안 교실엔, 왠지 어리숙해 보이는 얼굴의 두 인물, ‘우리’가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저기엔 환한 빛 속에서 단체 줄넘기를 하는 중인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저기에 없다. 우리가 있는 여기는, 해가 들지 않는 커튼으로 그늘이 진 어둑한 교실 안이다.

 

우리는 창틀에 팔꿈치를 괴고 저기의 밝음을 내다보기도 하고, 그 뒤로 희미하게 펼쳐진 아슬아슬한 무지개를 잡으려 손을 뻗기도 한다. 어둠의 공간에서는 빛의 공간을 내다볼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밝은 공간에서는 어두운 공간 안의 풍경을 볼 수 없다. 이를 섭섭해하듯, 화자는 저기 해가 내리쬐는 운동장 속 아이들의 눈에 우리는 유령처럼 보일 거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저기로 밝은 공간으로 가보고 싶은 아이들의 마음을 생각했다. 손으로 잡기엔 너무 멀고 그렇다고 뛰어가면 사라져 버릴, 어느 쪽이든 무지개엔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무력한 마음을 상상했다.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송사리떼 같은 햇살이 스쳐간다

우리는 서로 뜨거운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어준다

너의 슬픔은 찰랑거린다

그 수면에 손바닥을 갖다대면

오른눈은 반달모양으로 웃고 왼눈엔 주먹만한 눈물이 맺힌다

 

우리가 평생동안 흘린 눈물을 모은다면

몸피보다 더 큰 물방울이 눈앞에 서 있을 거야.

 

누군가 텅 빈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우리는 가만히 숨을 멈추고 몸을 포갠다

훈풍이 불어와 커튼을 펄럭이자

우리의 등 뒤로 뚱뚱한 거인의 그림자가 늘어진다

그녀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그림자의 어깨를 토닥인다

 

여기는 투명한 그늘이고

저기는 여전히 물방울이 타오르고 있어.

 

- 신철규, <무지개가 뜨는 동안> 중에서

 

 

하지만 환한 저기를 내다보던 그늘진 여기의 아이들은, 곧 여기에 놓인 ‘너’와 ‘나’의 얼굴을 마주 본다. 이전까지는 ‘우리’로 일관되던 주어로부터 분리되어 ‘너’라는 구체적인 개인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대목이다.

 

우리는 밝은 곳에선 들여다볼 수 없는 어두운 그늘에서 서로의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는 중이다. 저기의 무지개엔 갈 수 없어서, 대신 옆에 있는 너의 이마를 짚어주면서 여기에 무지개를 만든다. 그늘진 여기에 무지개를 만들어내는 방법은 찰랑이는 어떤 슬픔에 잠기는 것.

 

왼눈엔 주먹만한 눈물을 달고 오른눈으로는 반달 모양의 웃음을 지어 보인다는 대목에선, 공기 중의 차가운 물방울과 따뜻한 빛의 무지개의 동시성을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 어린 화자들은 슬픔에 잠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몸피보다도 더 큰 물방울을 상상하며 적극적으로 눈물을 모으기까지 한다. 그리고 누군가 텅 빈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몸을 포갬으로써 비로소 자신들이 말했던 ‘몸피보다 더 큰 물방울’이 된다. 이들의 등 뒤로 늘어지는 뚱뚱한 거인의 그림자는 너와 나의 눈물을 포개어 만든 ‘우리’의 거대한 눈물방울이다.

 

 

 

나는 여전히 당신의 슬픔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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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성실하게 이겨내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아니 반대로 슬픔의 저 끝까지 가보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무지개가 뜨는 동안>의 두 물방울이 찰랑이는 슬픔에 잠기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몸피보다도 큰 거대한 슬픔으로 포개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끝까지 슬퍼하기.

 

그리고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한 아이처럼 ‘슬프다, 정말 슬프다, 매일 슬프다’ 어색한 문장들을 중얼거리던 나는, 이 시집으로 하여금 나의 슬픔 곁에 서 있는 너의 슬픔을 만났다. 서로의 슬픔을 완벽하게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너의 슬픔을 모름의 영역에 둔 채 그저 부둥켜 안아볼 수는 있다. 포개져 볼 수는 있다.

 

그렇게 나의 슬픔은 너의 슬픔이 되고, 그 끝에는 기적적으로 ‘우리의 슬픔’으로 불러볼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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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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