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Why do I (__________)?

글 입력 2020.06.27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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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규칙적으로 무언가를 쓰는 사람이다. 하루에 한 번씩은 스케줄러를 작성하며, 일주일에 한 번씩은 아트인사이트 오피니언을, 계절마다 두 번씩 독립 잡지 기사를, 그리고 한 학기마다 학교 교지를 위해 2~3편의 칼럼을 쓴다. 딱히 세 보지 않았었지만, 의무 이외의 쓰는 행위를 시작한 지는 2년 정도 되었다.

 

 

 

Why do I write, write and write?


 

어릴 적 나는 글쓰기보다 그림을 그리는 게 쉬운 아이였다. 가령 4월을 맞아 전교생을 대상으로 과학의 달 대회가 열린다면 과학기술 글짓기를 하기보다 포스터 그리기를 택하곤 했다. 아직도 선명하게 생각나는 것 중 하나가 초등학교 4~5학년 때의 일이다. 교실에서 어떤 종목으로 대회에 참가할 건지 이름을 적어낸 뒤, 타일이 온통 하얀 화장실에서 변기 줄을 기다리며 대체 글짓기는 누가 하는 것이고, 무엇을 어디서부터 써내는 것인지 의아해하곤 했었다. 반면에 그림 그리기는 너무 쉽지 않냐며. 그런데 웬걸, 지금 나는 낙서하는 버릇을 고친 지 오래되었고, 성실히 타자를 두드리며 살고 있다. 지금의 나는 무엇으로, 어떻게 계속 쓸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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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부터 2019년 9월까지 썼던 일기장의 한 페이지

 

 

나 혼자를 위한 내밀한 쓰기 행위의 역사는 꽤 유구하다. 철저히 대입을 준비하기 위해서 학교가 직접 디자인하고 배포한 플래너를 3년 내내 써왔으며 재수 시절에는 기숙학원에서 제작한 스터디 플래너에 공부 계획과 찢겨나갈 것 같은 마음을 염불 외듯 몰래 박아 넣었다. 특히 대학에 입학하고 난 후로는 하루에 2시간이고 3시간이고 일기를 쓰기도 했었다.

 

그 당시의 나는 보기에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성실한 학생처럼 보였지만, 최은영 작가의 단편 소설 「쇼코의 미소」에 나온 문장을 인용하자면 “대부분의 시간은 무기력했고 가끔씩 정신이 맑아질 때는 내가 내 정신을 연료로 타오르는 불처럼 느껴졌”었다. 당시 나는 21살 국문과 신입생이었으며 룸메이트와 살고 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줄곧 내가 상상하며 강력히 기다려 온 대학 1학년의 모습과, -늘 혼자 살길 원했고, 대략 5년 정도 경영학과 진학을 희망했었다. 현역으로 입학한다는 것은 디폴트였다- 직면한 내 객관적인 상태 간의 괴리가 무척 컸기 때문이다. 이 간극에서 오는 충격은 제대로 씻고 필요한 물건을 사는 일상생활의 근간조차 흔들었고, 이로 인한 무위는 무기력을, 무기력은 죄책감과 부채 의식으로 나를 몰아넣었다. 이때의 상태를 정리해보자면, 21살의 나는 내가 누군지 몰랐던 것이다. 드라마에서 큰 사고를 당한 뒤 기억상실증에 걸려 현재의 나를 잃어버린 채, 2~3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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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타인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무지의 장막을 하나씩 걷어내는 일이 필요하다. 자꾸 말을 붙이고 시간을 보내면서 저 사람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인생을 걸어 왔는지, 나와의 공통점은 무엇인지 알아간다. 나는 ‘우제영’으로 산 지 21년이 지난 지금에야 ‘서서히 알아가는 단계’를 밝고 있었던 것이다. 거울을 보고 얘기를 했다가는 룸메이트에게 민폐가 될 것이고, 공상에 잠기기에는 정리가 잘 안 되는 느낌이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쓰기였다. 그 날의 스케줄만 나열한 기록에서 부끄러운 감정으로 여과 없이 물들인 기록까지, 며칠 뒤 다시 읽어보면서 자기객관화 과정을 거치는 등 나는 그간 미뤄뒀던 청소년의 과업 ‘자아 정체성 형성’을 대략 1년 만에 해치운 셈이었다. 이처럼 쓰기의 시작은 나에게 ‘알아가는 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 내가 어쩔 수 없이 타인에게 노출되는 글을 쓰게 된 시발점은 2018년 9월 4일, 단순 호기심으로 교지를 읽은 그날이었다. (여담으로 스케줄러를 쓰면 좋은 것이 손에 쥔 모래처럼 쉴 새 없이 빠져나가는 하루하루에 내가 과연 뭘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페미니즘, 학생의 권리로 요구하는 대학의 복지, 미성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터부시했었던 성(性)에 대한 담론, 1980년대 학생운동에서 출범한 교지가 지녀야 할 현재의 정체성, 아동학대, 평화 시위, 성소수자 부모 인터뷰... 세상에 기민하게 반응하고, 공생에 관하여 늘 고민하는 이들만이 발견할 수 있는 사회의 일면들이 편집 위원 저마다의 문체에 배어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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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1920년대 등장했던 낭만주의 사조는 시인이 창작한 시 한편은 작품성을 떠나 그 자체로 살아있는 생명체이자 견고한 유기체라고 생각했다. 당시의 낭만주의자들의 시각과 같이 내 눈에는 그 뜨거운 책 한 권이 분명 누군가의 삶을 잔뜩 안고 있는 하나의 세계처럼 보였다. 결코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세상은 노력하는 이에게는 반드시 합당한 보상을 주는 합리적인 공간이라는 순진무구한 사고가 깨어진 것이다.

 

파격적인 인상을 받고 교지의 수습 위원으로 활동하던 시절에도, 나에게 쓰기는 여전히 ‘알아가는 행위’였다. 가난에는 계속 이자가 붙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포인트만 다른 채로 혐오는 재생산되고 ‘배리어프리’는 단어로 공존할 뿐... 불편한 지점들을 속속들이 포착하여 문제의식 가득 담긴 칼럼을 써내려갔다. 그런 와중에도 빼놓지 않고 하는 일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모색할 수 있는 단 한 낱의 희망을 붙잡아 글에 녹여내는 것이었다. 원고료 한 푼 나오지 않지만 광고 대행사를 계약하고 일주일에 한 번 3~4시간의 회의를 거치면서 무언가를 쓴 이유는, 한 명이라도 내가 말한 희망을 손에 쥘 사람이 있길 바랐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교지를 읽었던 날 그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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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did I meet ART-INSIGHT?


 

종이책이 주는 질감은 정말 오묘하고 독보적이다. 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끝으로 살살 만지다보면 느껴지는 포근함. 딱딱해 보이는 겉표지를 들어내면 절대로 차갑지 않은 무궁무진한 세계가 깃들어 있다. 그 매력에 퐁당 빠져 출판업계에 종사하겠다는 꿈을 잠시 가지기도 했지만, 꽤나 현실 의식이 투철한 나로서는 큰 고민에 빠졌다. 얼마 전 쓴 오피니언의 내용이 그렇듯이 모든 콘텐츠는 디지털로 흘러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종이책을 좋아한다고 해도 내 주변은 종이책이 넘볼 수 없는 간편함과 가벼움을 자랑하는 디지털로 다량의 정보를 단시간에 흡수한다. 물론 휘발성이 짙으며, 양질의 정보인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단점은 있지만.

 

나는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로 빠져나간다고 해도, 절대 종이책을 놓지 않을 그 누군가가 구성하는 최소한의 파이의 크기는 보존될 거란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근처의 독립서점에 방문하여 커피향 섞인 종이의 냄새와 제본풀의 냄새를 맡으면 확신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꾸준히 콘텐츠를 생산하고 싶은 사람으로서 시류를 등지고 자신의 취향만 완고하게 고집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분명 아니다. 그렇게 내 글과 디지털이 이룬 교집합이 바로 아트인사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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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합격 메일의 일부 문장

 

 

그 전에 체화된 쓰기 주기에 비하면 숨 가빴던 일주일에 한 번 쓰기.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은, 마감 날짜를 직접 정했다는 이유 하나로 부여되는 강제성에 의해 부지런함으로 탈바꿈했다. 금요일이 마감이었던 나는 주말이 지나고서부터 어떤 글로 독자들에게 글을 읽는 동안만큼은 유익함을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머릿속에서 옥신각신 기획회의를 시작했다.

 

깊고 내밀한 글을 6개월에 3~4편씩 쓰는 것보다 A4 용지 3~4 페이지의 분량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쓰는 것이 디지털에 요하는 콘텐츠의 문법이었다. 호흡이 짧아야 하니 간결한 문단으로 모든 문단을 띄워야 했고 심심하지 않도록 적절한 사진을 통해 시각적인 자극을 동반해야했다.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지만, 마감일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더 이상의 기획이 생각나지 않아 쓰기 시작한 ‘소확행, 생활인 하루키의 지극히 사적인 일상’은 예상보다 많은 조회수를 기록했고, 야심차게 업로드한 애니메이션 『코렐라인』의 조회수는 꽤 저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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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이라는 통로를 거치면서 맞닥뜨린 가장 가시적인 차이점은 우리학교 학우, 더 넓게는 대학생으로 한정되었던 독자층이 직장인, 중고등학생, 가정주부 등으로 그 범위가 넓혀졌다는 것이다. 대신 노골적인 비판은 없었지만, 조회수로 판명 나는 내 글의 소구력이 판명났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내가 관심 있는 것과 남들이 좋아하는 것의 사이, 종이책의 문법과 디지털의 문법의 사이를 비롯하여 적어도 2주는 공들여야 남에게 보여줄 글을 쓸 수 있던 나와 속도감 있게 오피니언을 작성할 수 있는 나, 그 사이를 조정해나갔다. 예외가 존재하지 않는 허공을 메웠나갔다. 나에게 아트인사이트는 절대로 디지털에서는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내 글의 가능성을, 종이를 벗어나 발견한 순간이었고 역시 ‘나를 알아가는 행위’로 수렴했다.

 

그런 와중에, 내가 불만으로 가득한 칼럼에서 실낱 같은 희망을 제시했던 것과 같은 류의 발견이 있었다. 디지털을 소비하는 이들은 모두 가벼운 것만 좋아할 거라는 편견. 조악한 웃음을 좇으리라는 편견. 나조차도 와이파이에 연결될 때면 그런 것만 찾게 된다는 사실. 그러나 역시 디지털이었던 아트인사이트에 차곡차곡 쌓인 수많은 콘텐츠들은 결코 짧은 시간에 축적된 게 아닌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예술에 관한 지식일 수도, 수려한 글쓰기 스킬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었다. 깊은 진심은 때로 조롱받는다. 디지털 세상이 도래하면서, 비대면 소통이 증가하면서 그 진심의 깊이를 알기 어려워진 탓에 그런 경시 풍조는 더 심화되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트인사이트 식구들을 통해 앞으로 더욱 성장할 디지털 시장이 결코 천박하지도 소모적이지도 않을 거라는 희망을 나는 역시 발견했다.


*

 

앞서 나는 단 한 명이라도 내 글을 읽으며 희망을 가지거나 유익한 시간을 가지길 바란다고 했다. 여기서 그 '단 한 명'은 그렇게 되리라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적어도 나만큼은 그 희망을 머릿속에 아로새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물건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온전히 내 머리로 기억하는 일은 분명 유익했다. 내가 바라는 그 세상은 모든 이들이 행복한 유토피아가 아니다. 절대 모두가 행복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행복으로 나아가고자 건강한 담론들을 나누고 개선해나가는 사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가 동등한 무게를 띠는 열린 목소리를 가져야 하지만, “언어는 의사소통 또는 지식의 수단일 뿐 아니라, 권력행사의 수단이기도 하다”라는 부르디외의 말처럼 현실적으로 목소리 없는 이들은 너무 많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세상에 대해서 대신하여 쓴다. 그렇게 척박한 각자도생 사회에서 사회인이 된 뒤 내 손으로 실현할, 혹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누군가가 실현할 희망을 기대하며. 표준국어대사전에 정의된 ‘기록’의 의미는 ‘주로 후일에 남길 목적으로 어떤 사실을 적음’이다. 나에게 ‘기록’이란 너무 쉽게 의무에 지치거나 자본에 압도된 내가 절대 세상을 냉소하게 바라보거나, 이에 무기력하게 순응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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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제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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