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요함을 향한 나의 투쟁 [도서]

오늘도 역시 소란하다.
글 입력 2020.06.22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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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살의 나는 안정된 어른이기를 바랐다. 아니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꼴로 카드를 잃어버리는 사람은 아니길 바랐다. 이룬 건 없어도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연애의 고수는 아니더라도 혼자 있지 못하는 찌질이는 하지 말아야지. 그런 나의 다짐 하나하나 처참할 만큼 지켜지지 않는다. 그렇다. 나는 불안하다! 불안함에 요동친다.

 

외부의 공격이 없는 날이면 내부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예쁘고 싶지만 코르셋은 안되고, 부자가 되고 싶지만 돈을 향해 달리긴 싫고, 외향적인 듯 내향적이고, 솔직하게 사랑하고 싶지만 감정을 내보이기 두렵다. 인정받고 싶어 활개치다 인정에 치우치는 건 멋이 없다고 다시 숨는다. 가관이다. 문득 과거가 오늘을 덮치고, 미래가 오늘을 흔든다. 작은 불안들이 모여 큰 파도로, 때론 슬픔으로 데려갔다가 때론 낙원으로 놓아준다.

 

이토록 마음이 불안할 때면 책만큼 좋은 것이 없다.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시야가 넓어져 생각을 새롭게 점검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더 넓어진 바다에는 더 거센 파도가 친다는 것이다. 쉽게 읽히는 글은 나를 잔잔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글과는 합의가, 또 다른 싸움이 필요하다. 나는 나의 이 슬픔과 낙원의 반복을 ‘감정 기복‘, ‘정신산만’으로 칭했는데 딱 적당한 단어를 발견했다. '소란', 박영준 산문집의 제목이다.

 

 

소란騷亂

 : 시끄럽고 어수선함.


소란巢卵 

: 암탉이 알 낳을 자리를 바로 찾아들도록 둥지에 넣어두는 달걀. 밑알이라고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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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란은 고요를 기를 수 있다


 

소란은 박연준 시인의 첫 산문집이다. 초판 서문, "모든 소란은 고요를 기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말과 함께 개정판 서문에는 "소란은 '어림'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책"이라고 덧붙인다.

 

 
"'어림' 에는 여림, 맑음, 유치, 투명, 슬픔, 위험, 열렬, 치졸, 두려움, 그리고 맹목의 사랑 따위가 쉽게 들러붙죠. 나이가 들수록 우리가 비껴 앉게 되는 것, 피하거나 못 본 척하거나 떨어트려 두려고 하는 것들이요. 진짜 삶은 '어림'이 깃든 시절에 있는 줄도 모르고, 우리는 어림에서 멀어집니다. 소란한 시절, 당신의 '어림'에 제 어린 마음을 보냅니다." -11p
 


스물 다섯 살 쯤 되면 자본주의에 꽤나 적응한 인간이 되어있다. 수많은 만남과 선택에 손익을 계산하고, 상처 받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열고, 혹여 슬픈 일이 있어도 티를 내지 않을 수 있는 건 나 뿐만이 아닐 듯 하다. 어쩌면 지금 겪는 나의 소란은 어림을 나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처럼, 무던하게 있을 때 비집고 나오는 눈물이다. 사실 가득찬 슬픔을 슬퍼하지 못할때, 더 나은 방안을 애써 찾고 난 후의 공허함이다. 이러다 어림을 완전히 잃어버리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다.


 
"한 시절 사랑한 것들과 그로 인해 품었던 슬픔들이 남은 내 삶의 토대를 이룰 것을 알고 있다. 슬픔을 지나온 힘으로 앞으로 올 새로운 슬픔까지 긍정할 수 있음을. 세상은 슬픔의 힘으로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이제 나는, 겨우 믿는다" -185p
 


우리는 모두 각자 과거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오늘을 살고있다. 과거의 슬픔이 오늘의 나를 조금이나마 단단하게 만들어 줬다는 걸 잊고, 만나선 안되는 감정인 것 마냥 고개를 돌리고 있던 것은 아닐까. 지금의 슬픔을 인정해 보자고 생각한 순간, 내일이 더 기대가 되는 신기한 경험이다.


 
"오늘의 불안이. 등짝을 맞고 시무룩해졌던 유년의 나에게 귓속말을 하는 밤.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를 때가 있다. 만져보고 싶은 것은 등짝을 얻어맞기 전에, 아니 등짝을 맞더라도 만져보자. 유년에 아직 많은 것이 살고 있을 테니까." -197p
 


저자는 책 한 권에 걸쳐 자신의 어린날과 오늘을 오가며 소란스러운 시간들, 처음의 기억들을 다정하고 솔직한 문장으로 들려준다. 스스로 인식 하기 전에 어른들의 시선으로 통제되었던 우리의 원석, 깎이지 않은 원석, 날것의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고요라는게 있는지 아직 모르겠지만 '어림'이 붙어있는 삶을 사랑한다면, 이 책처럼 나의 어림을 응원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끊임없이 소란스럽고, 결국 더 넓은 바다의 더 거센 파도를 탈 수 있는 바람 정도는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믿는다.


 

[박은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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