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모성애는 母를 위한 것이었다 [영화]

영화 <미씽:사라진 여자>로 다시 보는 모성애
글 입력 2020.06.18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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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하는 소재는 아니지만, 꺼리는 소재가 있다. 모성애.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대체로 표현방식이 획일적이다. 그래서 거부감이 들었다. 성스럽고 눈부신, 아가페적 사랑.

 

그래서 영화 [케빈에 대하여]가 인상 깊었나 보다. 다만 이 영화는 아이가 소시오패스라는 전제로 전개되기에, 일반적인 상황에서 사랑 없는 모성은 불가능하다는 주류의 관점을 오히려 강화하는 것도 없잖아 있었다. 그나마 현실적으로 그린 영화는 [툴리]뿐이려나. 독박육아에 점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여성의 모습을 잘 드러냈으니 말이다.

 

모성애를 다른 방식으로 조명하는 콘텐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영화 [미씽:사라진 여자]에서 모성애를 소재로 보여주는 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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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제주도로 여행 간 첫날, 비가 억수로 쏟아져서 밖에 나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다. 어두운 바깥 탓에 으슬으슬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그 날 오후, 영화나 보자고 VOD를 검색하다가 골랐던 영화가 [미씽]이었다. 그때가 17년도 초였으니 3년 만에 다시 본 셈이다. 여성 주연 두 명의 조합은 한국 영화에서 특히 희귀한 조합이라 넷플릭스에서 뭐 볼지 고민하던 친구에게 주저 없이 [미씽]을 보자고 했다.

 

오늘은 그 친구에게 전했던 감상 중 일부를 풀어놓고자 한다. '모성애'라는 소재를 이 영화는 어떻게 다루었는지에 대해.

 

 

*

스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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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는 이러하다. 주인공 지선은 남편과 이혼 후, 딸 다은이를 지키기 위한 양육권 소송을 진행 중이다. 지선은 혼자서도 다은이를 부족함 없이 키우고자 하루 대부분을 일하며 보낸다. 자신의 빈자리는 한매가 채운다. 다은이를 끔찍이 아끼며 애정을 쏟는 한매 덕에 지선은 바쁜 나날을 그나마 지탱할 수 있었다.

 

문제는 어느 금요일에 터진다. 목요일 아침부터 한매와 다은이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지선이 알고 있던 한매의 인적사항이 모두 거짓인 게 드러나자, 한매와 짜고 다은이를 숨긴 것이 아니냐고 더욱 의심을 받는다. 경찰 등 주변의 도움을 받지 못하자 지선 스스로 해결하려고 동분서주한다. 그리고 마주한 한매의 정체.

 

한매는 시골 마을에 시집간 외국인이었다. 국가가 중국이나 베트남 등 외국에 사는 '여성을 구입해서' 농촌 남자와 결혼시키는 '농촌 총각 장가보내기'에 속했던 외국인 여성 중 하나. 특히 한매가 지내게 된 집은 가부장제의 뿌리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남편은 틱장애를 앓고, 폭력적이고, 제멋대로고, 그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어머니의 품에서 산다. 가부장제의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 어머니는 제 아들을 감싸고 돌며 한매를 무시한다. 남편처럼.

 

이 환경에서 모든 의욕이 사라진 한매가 변한 것은 아이가 생긴 후부터였다. 한국어를 배우고, 같이 수업 듣는 동네 친구도 생겼다. 변화는 금방 끝났다. 아이가 아픈데 큰 병원에 데려가긴커녕 돈 아깝다며 집에 데려가는 남편과 그의 어머니. 한매는 자신의 딸 재인이를 데리고 도망쳐 병원에서 겨우 치료를 받지만, 결국 재인이는 죽고 만다.

 

다은이를 재인이의 대체재, 혹은 재인이라고 생각하며 한매는 의도적으로 다은이의 보모가 되고, 지선의 신뢰를 쌓았다. 의문이었다. 한매가 왜 이렇게 재인이에게 미친듯이 집착을 할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유를 찾았다.

 

재인이를 임신했을 무렵, 그네에 앉아서 배를 쓰다듬으며 한매가 말한다. 너에게는 좋은 것만 보고 살게 해주리라고. 의문이었다. 왜 자신은 좋은 것을 취하려 하지 않고 그 아이에게 해주려는 걸까.

 

답은 간단했다. 한매는 절대 못 하기 때문이다. 자신은 '개새끼'인 남편의 집에서도, 몸을 상품처럼 팔던 천상의 여인에서도 좋은 것을 누리지 못했다. 한국에 오기 전의 삶도 비슷했을 거다. 어쩌면 그곳이 더 최악이라서 도망쳐 나왔던 걸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한매는 삶에서 좋음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재인이는 탄생부터가 '좋은' 존재이다. 태아는 산모의 칼슘, 비타민, 혈액 등을 기생충처럼 빨아먹는다. 자신의 일부였던 아이가 세상에 떼어져 나간다. 그것도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좋은 것들로만 이루어진 채로. 문득 영화 [아가씨]의 대사 하나가 떠오른다.

 

 

"태어난 게 잘못인 아기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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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산모의 축복이라는 말을 우습게 여겼는데 한매를 생각하면 축복일 수밖에 없다. 한매는 두 번째 기회를 얻었다. 자신의 일부인, 태생부터 좋음을 타고난 재인이는 앞으로도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렇듯 재인이는 또 다른 한매였다. 그런데 재인이가 죽었다. 한매가 죽은 셈이다. 아직 좋은 삶을 놓기 싫었던 한매는 눈을 돌린다. 자신의 병상을 빼고 그 자리를 차지한 다은이, 그리고 다은이를 보며 기쁘게 웃는 지선에게로. 한매는 그렇게 생각했을까. 저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은 자신이라고, 자신이 저 자리에 있다면 아주 행복할 거라고.

 

잘못된 방향이 제자리를 찾으며 영화는 끝을 달린다. 다은이를 꼭 붙들고 절대 놓지 않으려던 한매는 조심스럽게, 느리게 다은이를 경찰에게 넘긴다. 그리고 풍덩. 깊은 물 속으로 빠진다.

 

한매를 구하려던 지선의 손을, 한매는 놓는다. 자신의 선택에 주저함이 없었다. 또 다른 자신이던 재인이가 죽었을 때 이미 한매는 죽었다. 단지 그 상실감과 고통이 너무 큰 바람에 그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눈에 들어 온 다은이를 자신처럼 쥐려던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 하듯.

 

그러나 거짓은 진실로 가려지지 않는다. 한매도 안다. 이제는 한매 스스로 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때였다. 한매의 좋은 점들을 모아 탄생한 존재가 더는 없음을. 나쁜 것으로만 이루어졌다고 느꼈을 한매는, 삶에 미련이 남았을까.

 

다은이의 진짜 엄마, 지선도 한매와 다르지 않다. 다은이에 관한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는 점이.

 

지선은 일터에서 눈칫밥을 먹는다. '애엄마'라는 칭호가 낙인이 되고, 민폐가 되고, 힐난 받는 원인이 된다. 그런데도 삶을 지속해야 한다. 자신의 좋은 것들로 만들어진 다은이에게 앞으로도 좋은 것들만 주기 위해.

 

똑 닮은 두 사람이기에, 지선은 몸을 던져서라도 한매를 구하고 싶었을 거다. 둘이서 다은이에게 좋은 것들만 선물해 주자고. 같이 여행도 가고, 쉬고, 기대고, 살아가자고.

 

부질없는 상상을 해본다. 어느 시점에서 둘이 만났더라면, 지금과 다른 결과가 나왔을까. 적절한 시기였다면 자기의 분신을 위해 희생하는 삶 말고, 자기 자신을 돌보며 살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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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모성애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 감독의 역량을 이야기하고 싶다.

 

영화는 글과 달리 눈으로 보여준다. 주인공의 심정이나 생각, 느낌을 설명할 수 없다. 대신 이미지로 드러내야 한다. 스토리를 눈과 귀로 풀어내야 해서 창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관람객에게 닿기 까다롭다고 느낀다. 그래서인지 의도를 전혀 알 수 없는 작품도 글보다 훨씬 많다.

 

모성애 소재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으면서 이 영화를 끝까지 본 이유는 여기서 나온다. [미씽:사라진 여자]는 '모성애' 하면 흔히 다루던 아이와 어머니의 관계성이 아니라 '한매' 혹은 '김연'이라는 한 인물의 처지에서 재인이가 어떤 의미였을지 그린다. 관점을 조금 바꾼 데에서 영화가 관객에게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다.

 

엔딩 크레딧에서 이언희 감독과 홍은미 각본가의 이름을 보고서야 알았다. 그들이 여성이었기에 이 전개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개인의 역량을 깡그리 무시하는 발언이 아니다. 다만 여성만이 알 수 있는 여성의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그러했듯이.

 

한국 영화나 드라마계에서 미디어 위기를 말한다. 뉴미디어 때문에 입지가 점점 좁아진다고. 오래된 것은 새로운 것으로 대체된다. 오래된 것이 도태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이전과 다른 방향을 나아가야 할 테지. 이 시점에서 여성 감독과 여성 각본가가 만든 여성 영화가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등장마저 생소한 조합일 테니 신선함은 일단 얻고 시작하는 것 아닌가.

 

새로운 관점,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인물이 판을 뒤집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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