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퇴근하고 싶다

격렬하게 퇴근이 하고 싶다
글 입력 2020.06.16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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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고 싶다. 격렬하게 쉬고 싶다.


 

지난주는 자비 없는 한 주였다. 마음 속 품고 있던 연차의 꿈은 2주 연속으로 날렸다. 다른 건 몰라도 연차만큼은 자유로운 회사인데 연차를 끼워 넣을 틈이 없었다.

 

월요일부터 야근으로 시작해서 매일매일 다채롭게 일이 터졌다. 일이 나에게 이렇게까지 자비가 없어도 되나 싶었다. 기나긴 시간이 흘러 겨우 금요일이 되었지만 기쁘지 않았다. 시간에는 양심이 없는 게 분명했다. 이렇게까지 늦은 금요일은 생전 겪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남들보다 스트레치 역치가 낮다. 중고등 학생 땐 시험기간 마다 감기를 달고 살았고, 대학 생활에 적응하는 과정은 험난했다. 아직도 환절기면 면역력이 떨어지고 여기저기 염증 반응이 올라온다.

 

강해지는 법을 모르니 외부 자극을 최소화해서 살살 지낸다. 야망 같은 건 꿈꾸지 않고, 열정은 고이 접어 두었다. 야망을 위해 열정에 불타오르는 건 미디어에나 있는 일이지, 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산다. 그래서 집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정시퇴근하는 직장을 찾아 들어왔다.

 

 

 

혹시 제 정시퇴근 못 보셨나요?


 

내가 하는 일은 무역이다. 거래처는 아시아와 유럽이다. 주요 거래처의 아시아지사가 우리 시간으로 7시가 되면 문을 닫는데, 닫기 전까지 열일하는 바람에 메일 핑퐁의 늪에 빠지게 된다.

 

이것만 쓰고 가야지! 하고 마무리를 하고 있으면 메일이 뿅. 적당히 답변하고 진짜 끝내야지 하면 다른 메일에 대한 답변이 짠. 내 퇴근 시간을 6시 반이라고 생각하고 일하면 마음이 덜 서럽다. 내 퇴근 시간이 남들보다 늦을 뿐이라고 전혀 위로도 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하면 말이다.

 

그렇다고 무역 일이 칼퇴와 거리가 먼 건 아니다. 나에게도 칼퇴하는 날이 있다. 정신없이 우당탕탕하는 퇴근이지만 나도 칼퇴할 줄 아는 사람이다. 우리 팀에서 내가 제일 일찍 퇴근하고 야근 거의 안 하는 편이다. ...집이랑 회사랑 가까운데 왜 7시 전에 집에 들어가기가 힘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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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라밸이고 뭐고, 그냥 하루하루 살기가 힘들다. 삶의 밸런스를 따지기도 전에 지쳐서 침대에 드러눕는다. 집에 와서 옷 갈아입고 널브러져 있다가 밥 먹고 쉬면서 게임 조금 하거나 핸드폰 보다가 죽지 않기 위해 운동을 하고 돌아와 씻으면 잘 시간이다.

 

나를 위한 시간이 부족한 거 같지만 운동을 하지 않으면 몸이 삐걱거린다. 유병장수 하기 싫으니 열심히 다니지만 운동을 가는 날과 가지 않는 날 저녁의 길이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일주일에 두 번 운동을 가니까 주중 삼 일은 저녁이 길고 삼 일은 저녁이 짧다. 없는 시간 쪼개서 운동을 다니는 나와 작고 귀여운 월급 쪼개서 적금 넣고 청약 넣는 내가 오버랩 된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 청춘이다.

 

나는 이렇게 사는 어른을 꿈꾸지 않았다. 하지만 딱히 하고 싶은 건 없고 싫은 것만 많았기에 싫은 것들을 뺐다. 야근 없는 곳, 연차 있는 곳, 집이랑 가까운 곳. 내가 덜 힘들게 다닐 수 있는 최소 필수 요건이었다. 정시에 퇴근을 못 하지만 야근은 거의 없다. 눈치 보지 않고 연차 쓸 수 있다. 심지어 회식도 거의 없다. 정시퇴근하고 버스 타이밍만 잘 맞추면 도어투 도어로 30분 안에 해결할 수 있다. 적당히 말해서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피곤할까.

 

여유 있는 삶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설마 금전적 여유가 없으면 시간적 여유도 없는 걸까? 예전엔 내 삶의 많은 시간을 임금노동에 쓰는 게 아깝고, 회사 다니기 싫어서 돈 많은 백수가 되고 싶었는데 이젠 매일매일 여유 있는 하루를 살고 싶어 돈 많은 백수를 꿈꾼다.

 

적당히 말고 잘 지내고 싶다. 아침이 상쾌했으면 좋겠고, 저녁이 가벼웠으면 좋겠다. 싫은 거 말고 좋은 걸 고민하고 싶다. 차와 커피 향에 집중하고 싶다. 여유를 갖고 글을 쓰고 싶다. 좋아하는 일에 집중해서 시간을 쏟고 싶다. 쫓기는 거 말고 이끄는 걸 해보고 싶다.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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