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오늘을 사는 이름, 주수인 : 영화 '야구소녀'

글 입력 2020.06.16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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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야구소녀>의 주수인(이주영) ㅣ 에이스팩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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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니 근데 이 영화, 뻔하지 않다. 전개에서 익숙한 맛이 날지언정, 결말로 난 길이 훤히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진부하지 않다. 성장물이면서, 가족물이고, 스포츠물이자 청춘물인 이 영화에선 우리가 이미 아는 여러 맛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대중 영화의 ‘장르’란 게 그런 거 아닌가. 어딘가 알게 익숙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새로운 맛. 원래 그런 게 맛있는 법이다.

 

똑같은 규칙 위에서 매번 탄생하는 새로운 장면. 야구를 보며 손에 땀을 쥐는 이유와 마찬가지다. 영화의 장르 역시 이미 깔려 있는 길 위에서 새로운 변용과 창조를 만들 때, 그 바운더리를 확장하면서 재미를 만든다. 영화 <야구소녀>는 그런 의미에서 익숙하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특별하다.

 

 

 

야구, 그리고 소녀


 

<야구소녀>는 프로팀 입단을 꿈꾸는 ‘천재 야구소녀’ 주수인(이주영)의 성장 드라마다. 그가 프로로 가기 위한 길은 여느 성장 서사 주인공의 여로가 그렇듯 험난하다. 그 어려움은 어디서 기인할까? 먼저 첫 번째, 코치의 말마따나 남자 선수들도 진입하기 어려운 게 프로야구의 세계다. 맞다. 그건 최고구속 134km, 볼 회전력이 강점인 주수인에게도, 전지훈련을 떠나는 이름 모를 남자 후배에게도 똑같이 주어진 어려움이다. 그렇다면, 주수인의 어려움은 이게 다일까?

 

이렇게 한 번 상상해보자. '최고구속 134km, 볼 회전력이 강점'인 남자 선수를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면? 아마 이름 모를 그 주인공은 자신의 능력을 증진시키고, 알맞은 타개법을 찾아내 프로팀에 입단할 것이다. 아님, 청춘을 불살라 도전하지만 결국 입단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가족과의 갈등, 다른 길 찾아보라는 감독·코치와의 갈등, 먼저 프로팀에 입단한 친구와의 갈등. 이것도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동시에 충분히 '뻔한' 얘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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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소녀>가 특별해지는 지점은 바로 두 번째 어려움부터다. '여자'라는, 주수인이 가진 하나의 속성은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자 하는 여로에 근본적인 복잡성을 더한다. 남자 선수의 능력치가 기본으로 셋팅된 판 위에서 주수인이 가진 하나의 속성, 그가 ‘여자’라는 사실은 ‘실력’과는 다른 주변 배경을 만든다.

 

누구는 그것을 극복 못 할 단점이라 말하고, 누군 또 프런트 직을 제안하며 장점이라 말한다. 누군 아예 야구선수로서 봐주려 하지도 않고, 트라이아웃 참여도 힘겹다. 어떤 때는 ‘여자’로 라벨링을 당해 특별 취급되고 제한되지만, 또 어떨 때는 여자인 것과는 상관없이 힘들다는 소리를 듣는다. 프로야구 선수가 되려는 주수인의 여로를 더욱 문제적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 겹겹의 레이어다. 그래서 사실 이 길은 영화 밖 현실에서도 가본 사람이 거의 없는 길이다.

 

그곳을 넘으려는 주수인은 자신의 강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남이 치지 못하는 공을 던지는 것이라고. 그는 겹겹의 레이어를 걷어내고, 이 강점으로 정면 돌파하려 한다. 그는 최 코치와의 훈련을 통해, 이미 짜여진 판 위에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냈고 그것으로 어려움을 넘어서려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냈다.

 

그렇다 해도 판이 뒤집히진 않는다. 판을 떠나기는 싫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야구, 그리고 여성. 제목으로 내세운 것들의 현재성을 정면으로 직시하는 영화는 다만, 이 어려움 속을 묵묵하게 걸어가길 택한다. 야구를 향한 주수인의 열정을 동력 삼아, 이상과 현실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말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 스펙트럼


 

그러나 <야구소녀>가 보여주는 건, 이상 추구의 낭만만이 아니다. 누군가는 꿈을 좇다가 현실에서 실패를 맞기도 하고, 누군가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적당한 타협점을 찾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현실만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이상과 현실이 양극단에 자리한 스펙트럼 속에 영화는 다양한 인물을 포진시켰다. 그리고 그들이 각자가 어떤 고민을 안고 있고, 주수인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섬세히 살핀다.

 

주수인의 코치인 최진태(이준혁)는 오랫동안 프로 선수의 꿈을 놓지 않아서 인생이 꼬인 케이스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그는 수인이 하루라도 빨리 현실적인 길을 찾아가길 바라지만, 결국 수인의 진심을 느끼고 그를 조력한다. 수인의 어머니 신해숙(염혜란)은 꿈과 욕망을 접고 가정경제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수인에게 일자리를 알선하며, 그가 야구를 포기하고 현실적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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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수인의 꿈을 응원하던 아버지 주귀남(송영규)은 공인중개사를 오래 준비하다가 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 가수가 꿈인 수인의 친구 한방글(주해은)은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지만, 다시 손에 꿈을 쥔다. 야구를 접을 생각까지 하던 이정호(곽동연)는 프로 야구에 수인보다 먼저 진출하게 되었고, 일본어 선생님(이채은)은 학교 선생님으로 일하면서도 야구를 계속한다. 밤늦은 시간까지 잔업을 해야 하는 고된 병행이지만 그럼에도 좋아서 한다.

 

<야구소녀>는 꿈을 계속 좇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현실과 타협하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꿈을 접고 사는 삶도 얼마나 어려운지를 두루 살핀다. 영화는 이들 모두의 꿈이 이루어진 청사진을 그리지 않는다. 누구는 타협했고 누구는 꿈을 좇고 누구는 현실을 살아간다. 그렇지만 무엇이 옳다 그르다의 가치판단은 여기에 없다. 다만 인물들은 과하지 않게 관계를 맺으면서, 나만큼이나 너의 꿈을 응원해준다. 그리고 그 느슨한 지지는 객석과 스크린 속 세계를 잇기에 이른다.

 

 

 

오늘을 사는 이름


 

영화의 엔딩은 어떻게 보면 현실적이고 또 어떻게 보면 비현실적이다. 그래서 러닝타임이 끝난 후, 주수인의 삶은 어떠할지 관객 나름대로 상상해볼 여지가 있다. 어쩌면 주수인의 삶은 지금보다 더한 어려움에 부닥칠 것이다. 거친 굴곡을 만나 좌절하고 고민에 빠지는 일이 반복될 수도 있다. 현실의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을 때, 어렵지 않은 상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라운드에 발을 내디딘 주수인의 얼굴엔 막연한 좌절이 담겨 있지 않다.

 

영화가 담아내는 건 바위를 치는 계란의 비극적인 얼굴이 아니라, 길이 나지 않은 곳으로 첫발을 떼는 선구자의 단단한 얼굴이다. 묵묵히 도전하며, 하루하루 자신의 길을 만들어나가는 주수인은 오늘을 사는 사람이다. 자신과 자신의 꿈을 위해 디딘 한 걸음은 또한, 발자국으로 남아 뒤에 오는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그렇게 오늘을 사는 주수인이란 이름은 누군가의 내일이 된다. '현실의 야구소녀'들이 그래왔고, 그러고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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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수인이 서 있는 빈 그라운드엔 어떤 함성도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스크린 밖에서 안으로, 수많은 외침이 침투해 공명한다. “주수인, 파이팅!” 트라이아웃에 함께 참여했던 여자 선수 제이미의 외침, 그리고 뒤이은 남자 선수들의 외침처럼.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꿈을 실현하려 묵묵히 노력하는 한 인간에게, 프로 무대를 꿈꾸는 수많은 ‘야구소녀’에게, 그리고 무수한 어려움을 헤치고 누군가가 뒤따라올 길을 만드는 이들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다. “주수인, 파이팅!”

 

이 영화의 스펙트럼 속에서 가장 도전적인 얼굴로 빛나는 건, 배우 이주영의 얼굴이다. 멀리서 온 이방인이 아닌 언제나 거기 있었던 듯한 얼굴. 내부에서, 진부한 세계의 질서에 균열을 내는 얼굴. 그의 연기는 자연스럽고 또 묵직하게, 세계에 도전하는 주수인의 길을 만들어낸다.

 

<미성년> <82년생 김지영> <동백꽃 필 무렵> 등 많은 필모그래피에서 여성 캐릭터들과 관계성을 다져온 염혜란의 연기는 또 어떠한가. 그는 아이스크림 하나에도 벌벌 떨던 해숙의 고단함을 그대로 내보이면서, 수인과 정반대에 서 있는 누군가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짊어진 게 많아 섣불리 꿈꿀 수 없던 삶. 그래서 우리는 주수인의 삶만큼이나 신해숙의 삶을 응원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를 봐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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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소녀
- 꿈을 향해 던지는 단 하나의 스트라이크 -


감독 : 최윤태
 

주연

이주영, 이준혁, 염혜란

송영규, 곽동연, 주해은

 

장르 : 드라마

개봉
2020년 06월

등급
12세 관람가

상영시간 : 105분

 

 


 

 



[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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