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과수원의 향기 - 칼릴 지브란, 예언자 4 [문학]

5부, 베풂에 대하여
글 입력 2020.06.08 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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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이번에는 부자 한 사람이 말했다.

‘베풂에 대하여’ 말씀해주소서.

 

그래 그는 대답했다.

 

그대들 가진 것을 베풀 때 그것은 베푸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베푼다 함은 그대들 자신을 베푸는 것뿐.

 

칼릴 지브란, '예언자', 베풂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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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풂. 아마 그에 가장 인색한 자가 나일 것이다. 그래서 이 장에 이르는 때면, 언제나 조금 두려운 마음으로 서게끔 된다. 그럴진대, 내가 그를 두고 하나의 글을 쓰는 때가 오다니. 이렇듯 답지 않은 글을 쓰는 일이란 언제나 더욱 두려운 일이다.

 

어느 부자가 베풂에 대하여 묻자 나지막이 그래, 하곤 바로 첫마디로 ‘가진 것을 베푸는 것은 베풂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베풂이란 닳지 않을 자기 스스로를 나누어 건네는 것이라 함이신가. 아직은 조금 더 살펴보아야 알겠다.

 

 

그대들 가진 것이란 사실 무엇인가, 내일 혹 필요할까 두려워 간직하고 지키는 것 외에?

 

그래 내일, 하지만 성도(聖都, 예루살렘)로 가는 순례자들을 쫓으며 자취도 없는 모래 속에 뼈다귀를 묻어 버리는, 지나치게 조심스런 개에게 내일이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인가?


 

아아, 말씀은 곧잘 알아듣겠다. 그러나 결코 자신이 없는 나는 지금 무엇일까. 아무도 보고 듣지도 않는 적막한 방에 앉아, 누군가가 흘린 글귀를 바라보고 있는 지금조차도 결코 아니 되리라는 굳은 생각 하나만을 덩그러니 떠올리는 나는 대저 무엇인가. 회의적이고, 또 회의적인 생각만이 궁근다. 그래서 이 장은 내게 가장 고통스런 장이곤 했다.

 

그래 내일, 언제나 문제는 내일에 있곤 했다. 당장 그때 순간까지의 모인 여태 ‘오늘들’이 무탈하였음에. 그렇다면 단순하니 계산을 해볼 적에, 모든 내일의 문제는 모든 과거를 되돌아볼 적과 꼭 유사하도록, 무탈하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탈해온 만큼 무탈하리라고 말해봄직도 하다.

 

그러나 언제나 오지 않은 것에 대해선 하나의 굳은 생각을 견지할 수가 없던 우리였기에. 믿음은 어떤 필요로도 오래도록 빛나게 할 수 없는 성, 공고히 세워놓을 수 없는 탑, 즉 허물어질 찰나에 대함이었다. 그리고 그 미래는, 대개 두려움으로 횡행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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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운 미래는 어쩌면, 전 역사에 반복되는 일이었을까. 즉, 인간의 일이었을까. 인간이 과거를 질료로 현재를 보고 알게 되고, 또 장차 그 생각의 방식이 오지 않을 미래를 쪼게끔 되는 일이었을 때, 그렇게 될 일이라 할 때, 두려운 미래는 온 인류가 공유하는, 하나의 방식이었을까.

 

비단 지금의 세태, 혹은 가까운 역사 내에서만 일어나던 일이 이것이었을까, 과연.

 

나는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언제가 되었건, 희망차고 갸륵한 미래로만 살던 시대가, 인간의 시대 속에는 있었던가, 혹 있었겠는가, 또 있겠는가라고까지 한 번 질문을 해보는 것이렷다.

 

여기에 이르러 아니라고 한다면, 즉 인간인 우리가 스스로 모습들에 더하여, 그것이 과거 속 유산 혹 원형의 모습이었건, 가까운 과거로부터 이어져 흘러 내리오고 있는 전통의 모습이건, 심지어 오지 않은 미래를 겨누어 그리어낸 모습이건 간에 모두 이렇듯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면, 이제 여기 이르러 그 까닭을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드디어 질문할 수 있게 된다. 무엇이, 우리를, 그러도록 하였는지에 대해.

 

무엇이 우리를, 오지 않은 미래의 앞에 전율하도록 만들었는가에 대해. 과거의 인간들이 두려워하던, 그 미래에를 살고 있는 나는 그것을 질문해보며, 장차 내가 두려워하는 미래를 대답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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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렇듯 인색함이란 두려움의 먼 소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누가 이렇듯 말해볼 수나 있을까. 저 자신의 온 생애를 순례하는 몸가짐으로 살아온 이가 아니라면, 내일 필요할까 두려워하며 움켜쥐는 작은 우리의 모습들을 두고, 누가 이렇듯 반기의 언어를 세워볼 수나 있을까.

 

뼈다귀를 묻는 강아지에게는 당장 내일의 미래까지도 도통 알 수 없는 것이었다면. 그래, 알 수 없는 것이라, 미리 알 수 없는 것이라, 땅에 묻는 지금은 오직 지금에만 미치고 그치는 일, 후회만이 우리 장차 가질 수 있는 대개의 것이었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되었다는 말들이란, 어쩌면 내가 벌써부터 가장 많이 하는 언어의 하나. 그것은 내가 미리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미리 알고 사는 삶이란 그 얼마나 경쾌할는지. 나는 나의 한 조각 뼈다귀를 쥐고, 아아 이것의 쓰임새, 즉 이 뼈다귀에 서리인 운명은 딱 여기까지이구나 하는 소박한 사실 하나를 미리 알 수 있었더라면, 우리는 얼마나 경쾌한 존재들이었을지. 다만 까마득히 모르기에 미련이라는 생김새가 못나게 어리는 것이렷다, 내 얼굴에는. 모르는 것은 대개가 두려운 것이기에.

 

 

또 모자랄까 두려워함이란 무엇인가? 두려워함, 그것이 이미 모자람일 뿐. 그대들은 샘이 가득 찼을 때에도 목마름을 채울 길 없어 목마름을 두려워하진 않는가?


 

모자랄지 어떨지를 몰라 두려워하는 마음은, 실로 이미 모자람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자람임을 쉬이 아는, 이해를 이렇듯 우리가 가지고 있다지만, 그 마음을 쉬이 져버릴 수 있는 정신을 우리가 갖진 못하였다. 그러니 한 조각구름 같은 바로 그 앎과 생각이 우리 모자람의 열쇠 아니요, 그곳이 이 모자란 두려움이 뿌리를 내린 곳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 멀리 아득히, 우리가 모든 나약함과 두려움을 알고서는, 이제 잊어보잔들 잊어낼 수 없었고, 살뜰히 지워내련들 언제나 실패하였고, 잠시 잠깐 벗어났다 한들 다시금 돌아오게 되었다는, 이 질긴 실패와 회귀의 모습이 우리 모자람의 실상이 아니었을지. 그때 다시 작게 웅크리고, 굳게 움켜쥐는 우리 모습들.

 

부족함이란, 곳간을 전부 채워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낱말이 아니었음에. 퍼내고 다시 채워낼 나의 곳간, 그러나 그 곳간에서 믿음은 피어오르지 않으리이다. 곳간은 언제건 비워질 수 있기에.

 

그것이 예언자께서 지적한 부분이시려니, 그 채워낸 곳간을 우리가 다시 우리 손으로 퍼내는 한, 우리가 언제까지고 쌀밥을 먹고 먹으려는 한, 영원히 불안정할 꿈이리다. 우리가 쥔 것을 앗기지 않고서는 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내지도 좀체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인색한 손아귀는, 영원한 화수분의 꿈임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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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당장 오늘 먹일 라면 한 봉지와 쌀 한 톨 마저 없는 이가 아니고서야, 누가 하늘 아래 그 누구의 앞에서도 떳떳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그러나 우리가 또한, 영원히 바라고 꿈꾸고 또한 불안해하는 존재이었기에, 우리의 부족함이란 다만 지금 갖지 못한 많은 것에 대함이요, 다가올지 모를 재앙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뼈다귀를 묻고, 잊고, 나아가 또 다른 뼈다귀를 찾고 있을 것이다. 겨우내 얼마만큼의 식량이 있어야 할지를 몰라, 할 수 있는 만큼으로 양 볼과 제 보금자리를 채우는 다람쥐와 같이, 두려움이란 우리 모두의 것.

 

두려움이란 우리 모두의 것. 그러나 평안을 꿈꾸는 이에게는 버려내야 하는 것일게다. 평안을 꿈꾸는 이는 두려움을 버리려 한다. 그러나 그 손으로 두려움의 일체를 버려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두려움이란 현상, 그 기원은 무궁하기에. 다만, 어느 미래 우리 샘물에 대한 두려움 하나를, 여기서는 버려내라 하신다. 샘이 차 있음에도 장차 목마름을 찾아낼, 환상하는 우리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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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것은 많으나 조금밖에 베풀지 않는 이들, 그런 이들은 알아주기를 바라며 베푸는 이들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은밀한 욕망은 그들의 선물마저 불결하게 만들어 버린다.

 

허나 가진 것은 조금밖에 없으나 전부를 베푸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삶을 믿는 이들이며, 삶의 자비慈悲를 믿는 이들이며, 그리하여 그들의 주머니는 결코 비지 않는 것을.

 

 

가진 자들의 베풂을, 나는 비하할 생각이 없다. 나는 그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또한 많이 가졌다는 말이란 모호한 성질의 수식언이기에. 나는 얼마나 가졌다면 많이 가졌노라 말할 수 있는지를 모른다. 어쩌면 지금, 나는 충분히 가지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다만 더 목말라 하고, 또한 두려워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면... 나는 조금도 베풀지 않아 왔기에.

 

이어, 가진 것은 조금밖에 없으나 전부를 베푸는 이가 한편 세상엔 있다 하신다. 베풂에 있어 가진 양이란 의미가 없니라 말씀하심이다. 얼마를 가졌건 그것은 다시 환원하고 순환시키어야 옳다는 말씀. 그들은 삶, 아마 나아가 세상을 믿고, 그 세상의 자비를 믿고, 즉 간만큼 다시 돌아옴을 믿는 이들. 그를 굳게 믿는 이들. 그런 이들에게 목마름의 환상은 당치도 않을 것이다. 정말로 그럴 수가 있는 이들에게는.

 

삶의 자비를 믿는 이들, 아마 세상과 세계의 순환율을 믿는 이들, 나는 그런 이들을 본 적이 없다. 아무것 믿지 못하는 자인 불신자가 나이고, 불신자의 빠알갛게 충혈된 눈이 나의 눈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극히도 두려워했던 것이다. 우리는 공중으로 흘려보낸 스스로 땀이, 얼만큼이나 순환하여 되돌아오는지를 보지 못한 따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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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너무 멀리 돌아오는 중인 것인가. 사위 온통 눈 돌리어 보면 두려운 속이다. 두려운 소식들의 속이다. 우리는 그를 겪기를 적게 하면서도, 날아들어 오는 소식지들 틈바구니에서 두려움을 체화한 것인지도 모르지. 사위는 온통 두려운 소식들 속이다.

 

 

세상에는 또 기쁨으로 베푸는 이들이 있으니, 이 기쁨이 바로 그들의 보상. 허나 또 고통으로 베푸는 이들도 있으니, 이 고통이 바로 그들의 세례식. 허나 또 베풀되 고통도 모르며, 기쁨도 찾지 않으며, 덕을 행한다는 생각도 없이 베푸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마치 저 계곡의 상록수가 허공에 향기를 풍기듯 그렇게 베푼다. 그리하여 이런 이의 손길 사이로 신은 말씀하시고, 이들의 눈 속에서 그분은 대지를 향해 미소 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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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풂 자체가 기쁨이요 또 고통인 자에게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는 말씀, 나는 아직 그런 이를 만난 일이 없다. 마치 계곡의 상록수가, 아무런 의지도 의식도 없이 향기를 풍기듯, 아무런 목적은커녕 의식조차 없이 제 품에서 무언가를 풍기는 이를 본 적이 없다.

 

아아, 있었다면 아마 내 어머니이시다. 사실 내 가진 것은, 전부 다가 어머니이시다. 어머니 냄새가 아니 서린 구석이 없다. 이것이 내 인색함의 완벽한 변명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무얼 나의 것이라고 가졌다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비로소 무엇을 베풀 수가 있을까.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 그리고 조건이 없는 헌신. 이 글을 보시는 당신들께선 전시대적 신화라고 할 텐가. 그러나 이것이 내가 받고 겪은 기적의 전부이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나는 베풂이라고 말할 수 없을지. 베풂이란 단어가 자기 자신의 한 조각을 떼어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치 ‘그’가 몸을 떼어 나눠주고 피를 나누어 마시게 함을 두고, 우리 오래도록 가장 거룩한 베풂이라 말하듯.

 

 

요청받을 때 베푸는 것, 그것은 좋은 일이다. 허나 요청받지 않을 때에도 다만 이해함으로써 베푸는 것, 그것은 더욱 좋은 일. 그러므로 마음 넓은 이에겐 받을 이를 찾음이 베풂보다도 더 큰 기쁨인 것을.

 

그런데 지금 그대들 움켜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대들 가진 것은 모두 언젠가는 주어야 하는 것을. 그러므로 지금 주라. 베풂의 때가 그대들 뒷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대들 것이 되게 하라.


 

‘마음 넓은 이에겐 받을 이를 찾음이 베풂보다 큰 기쁨인 것을.’ 마음이 풍요로 넘실거리어, 어디 이 보잘것없는 나의 것을 받고선, 그보다 더 큰 선물인 미소를 돌려주실 이가 없을까 하는, 본적 없는 돈후한 인상을 지닌 노인의 얼굴이 저 말 위에 떠오른다. 그에게는 더 바랄 것이 없어 보인다. 저 스스로 삶에 이제 더 많은 것이 필요치도 않음을 깊이 아는 얼굴, 마치 어느 백반집 아주머니의 날 바라보는 눈빛 같다.

 

장사를 취미로, 심심풀이로 하신다던 그 아주머니의 눈빛 같다. 하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이제 더 욕심부릴만한 미래도 없다시며, 여기서 조용히 동그마니 장사를 하다간, 이따금 학생들의 건네오는 이야기라도 듣는 맛으로 사노라 하시던. 점심시간이 한창 지난 늦은 오후, 바깥의 먼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시던 그 돈후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기억난다. 그분의 베풂이란, 더 바랄 것이 없는 두 손이 드디어 풀어내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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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씀을 듣는 둥 하며, 값싸고 맛 좋은 제육볶음을 먹던 그때의 내가 받는 것은 무엇이고, 드리는 것은 무엇이었나. 나아가, 그때의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은 무엇이고, 움켜쥐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나. 받는 것은 마음이고, 드리는 것은 감사였으며, 가지고 있던 것은 어머니의 땀내음, 움켜쥐고 있는 것은 두려움이었으리라.

 

두려움이었으리라. 나는 덕분에 이리 배 주린 줄도 모르고 살아왔더라만, 언제고 당신께 받기만 하는 이 몸뚱이가 송구스러웠기에, 줄어가는 모든 것들이 두려웁더라. 그 보답이란 언제나, 언젠가는 이라는 말로 미루어 온 일이 오래다. 그간 시간은 지나고, 지나고, 지나고, 그냥 지났으며, 이따금 내려가 뵙는 얼굴에는 착각 아닌 변화가 패이어 있었다.

 

언젠가는 하며 미루어 버리고 만 것들… 내가 줄 것, 아니 줄 수 있는 것이라곤 마음뿐이었다. 내가 일가를 이루고 사업을 이루기 전까지 내 쥐고 있는 것은 나의 것이 아닌 것. 그런 빈 몸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다시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아무것 내게서 나가는 것이 없었으니, 나는 송구스럽기만 하더라.

 

 

그대들은 가끔 말한다. `나는 베풀리라, 그러나 오직 보답 있을 것에만 베풀리라.` 하지만 과수원의 나무들, 목장의 양 떼들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살기 위해 베푼다. 서로 나누지 않고 움켜쥐는 것이야말로 멸망하는 길이기에.

 

 

보답이 있을 때만 베풀겠다는 말이, 베풂이 아님을 누군들 모를까. 그것은 교환이요, 거래이다. 그래, 내 어머니의 나에 대한 것도 이와 마찬가지. 베풂이란 행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보상과 보답이 없어야 하는 것. 오직 눈인사와 감사와 마음뿐이 있을 수 없는 것임을 누가 모를까. 그러나 언제까지고 마음을 담보로 땀의 결실을 받고 받고 받기만 하기도 버거운 노릇이다.

 

과수원의 나무와 양 떼들의 침묵은 생존을 위한 내어줌. 나누고 베푸는 삶과 삶들이 모이어, 하나의 사회를 형성하여야 종족이 번영하리라는 저 말씀을 잘 알아듣겠다마는, 사실 과수원의 밭에 떨어진 사과는 대지를 향한 출사이자 번영을 위한 산통, 깎이는 양털은 천공을 느끼기 위한 그들의 탈피였다면… 우리의 베풂이 그와 같기 위해서는, 베풂이 양과 같이 스스로 생존을 위함이어야 할 것이고, 또한 베풂이 나무와 같이 제 가족의 번영을 위함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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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 내 아는 얼굴은 하나뿐이라, 베풂은 내 어머니와 같다고 다시금 말하게 되다. 내 내리받은 사랑은, 거슬러 오를 수도 거슬러 줄 수도 없는 것이었기에, 언젠가 다시금 내려 주어야만 살겠음을 떠올린다. 내가 아는 한, 최고의 베풂은 오직 이뿐이다. 내가 받은 한, 최고의 베풂이 이것이기에.

 

‘요청받지 않을 때에도 다만 이해함으로써 베푸는 것, 그것은 더욱 좋은 일.’ 그것을 나의 가족에 대해서 먼저 행할 수 있기를. 나는 어릴 적부터 배워 오기를, 이 지상에 유일하게 이어진 존재들이 있다면, 그것은 가족뿐이니라 하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그 말씀의 무게는 무거웠다. 말씀하시는 내 부모의 표정과 삶이 무거웠기에.

 

그것은 어려운 것, 그것은 내 자연스런 사랑의 대상인 미래의 자식들을 넘어, 내 곁을 지켜주는 동반자에 대해서도 꼭 그러해야 하는 것. 나아가 내 부모에게 그러해야 하는 것이요, 또한 내 동반자의 부모에게까지 그러해야 하는 것. 하나의 가족을 모조리 끌어안는 일, 그것은 분명 어려운 일일 것이다.

 

가족에게 먼저 그러할 수 없는 이가, 다른 이에게 베푸는 일이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렇다면 나는 장차 베풂을 말할 적에, 가장 먼저 내게 이어진 그들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베풂의 때가 그대들 뒷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대들 것이 되게 하라.’ 나는 한참 멀리 있을 내 미래의 가족을 먼저 떠올린다. 그들에게 지금, 내 부모에게 받는 만큼으로 해야 함을 떠올린다. 베풂이란 내리사랑이 그렇듯, 받고서 감사하고 송구하고, 더없이 죄스런 마음으로 또다시 가지를 뻗어내는 일. 누구에게도 받지 못한 자에게 베풂을 청할 수 있는 이가 그 누구일 것인가.

 

 

그리고 그대들 받는 이들이여, 물론 그대들은 모두 받는 이들이지만, 얼마나 감사해야 할까에 대해 생각지 말라. 그것이야말로 그대들 자신에게도, 베푸는 이에게도 멍에를 씌우는 일. 그보다 그이와 함께 날개이듯 그의 선물을 타고 오르라. 지나치게 그대들의 빚을 걱정함은 그의 자비를 의심하는 것이 될 뿐. 넓은 마음의 대지 大地를 어머니로, 신을 아버지로 한 그의 자비를.

 

 

그러므로 나는 송구한 마음을 안고, 감사한 마음은 물론으로, 할 수 있는 일의 최선이 나를 뻗어내는 일뿐임을 떠올린다. 얼마나 감사를 표해야 하는지를 골몰하다가, 정작 감사조차 하지 못하고, 때를 놓치고, 거기에 후회까지 하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알겠기에. 나는 미안한 마음이 크고, 감사한 마음도 큰 만큼으로, 날개를 다듬기로 한다.

 

태연히 받으라고 말씀하시지 말라. 오히려 그 감사와 죄스럼이 큰 만큼, 스스로를 들어올리라 말씀하심이 더욱 옳을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깊이 품은 사람만이, 품은 만큼으로 날개를 드리울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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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베풂이란 반드시 주어야 하는 것일까. 베풂은 차라리 당신 말씀대로, 나무의 전신에서 피오르는 솔 향기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아무런 의지도 의식도 없이, 보상에 대한 기대도 없이, 그런 기대를 잘라내고자 애쓰는 스스로 작위조차도 없이, 그저 줄기를 뻗은 자신의 나무와 과수원이 푸른 향기를 풍기어내는 것.

 

그렇담 일가 一家의 과수원이 베풂으로써 번영하고, 화목하고, 풍요로와졌을 때, 그 농장과 밭에서 피어오르는 향기는 그 얼만 할까. 그래, 베풂은 정말이지 당신 말씀대로 향기처럼 뿜어나와야 하는 것.

 

서로의 사이에 오가는 것, 주고받는 것이 마음이라 이미 풍족하고, 그때 우리 각자가 기꺼이 너그러울 수가 있다면, 한 인간이 기꺼운 마음으로 너그러울 수 있을 때가 오직 그런 때뿐이라면, 의식과 의지로써 너그러움을 애쓰는 것이 외려 더욱 우스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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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과수원을 피워내는 것, 그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를 나는 아직 대충만 안다. 그러나 그렇게 피어난 과수원이 장차 또 어떻게 향기의 권역을 차츰 넓혀가는지를 또, 대충은 안다. 저곳이 내가 닿아야 할 곳, 힘써 닿을만한 곳이고, 저곳이 내가 닿기를 애써도 옳을 곳이다. 내가 받은 것들의 고향.

 

나는 받았으니 내려보내기를 꿈꾼다. 받기만 하고 흘려보내지 못한 샘은 버티지 못하여 터질 것임에. 두 가지 지극한 마음, 감사와 송구함이 이내 터져버리지 않도록, 내려보낼 물꼬를 그려본다.


그리고 장차 내려보내기 위해선, 그 스스로가 그럴만한 위인이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받은 선물을 날개로 하여. 그 날개의 좌측 편은 다만 깊은 감사함이고, 우측 편은 깊깊은 미안함으로 얽어져 있다. 한올 한올의 기억들이 깃털 또는 나뭇잎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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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이번에는 부자 한 사람이 말했다. 베풂에 대하여 말씀해주소서.


그래 그는 대답했다.


그대들 가진 것을 베풀 때 그것은 베푸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베푼다 함은 그대들 자신을 베푸는 것뿐. 그대들 가진 것이란 사실 무엇인가, 내일 혹 필요할까 두려워 간직하고 지키는 것 외에?

 

그래 내일, 하지만 성도(聖都, 예루살렘)로 가는 순례자들을 쫓으며 자취도 없는 모래 속에 뼈다귀를 묻어 버리는 지나치게 조심스런 개에게 내일이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인가?

 

또 모자랄까 두려워함이란 무엇인가? 두려워함, 그것이 이미 모자람일 뿐. 그대들은 샘이 가득 찼을 때에도 목마름을 채울 길 없어 목마름을 두려워하진 않는가? 


가진 것은 많으나 조금밖에 베풀지 않는 이들, 그런 이들은 알아주기를 바라며 베푸는 이들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은밀한 욕망은 그들의 선물마저 불결하게 만들어 버린다.


허나 가진 것은 조금밖에 없으나 전부를 베푸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삶을 믿는 이들이며, 삶의 자비(慈悲)를 믿는 이들이며, 그리하여 그들의 주머니는 결코 비지 않는 것을.

 

세상에는 또 기쁨으로 베푸는 이들이 있으니, 이 기쁨이 바로 그들의 보상. 허나 또 고통으로 베푸는 이들도 있으니, 이 고통이 바로 그들의 세례식.

 

허나 또 베풀되 고통도 모르며, 기쁨도 찾지 않으며, 덕을 행한다는 생각도 없이 베푸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마치 저 계곡의 상록수가 허공에 향기를 풍기듯 그렇게 베푼다. 그리하여 이런 이의 손길 사이로 신은 말씀하시고, 이들의 눈 속에서 그분은 대지를 향해 미소짓는 것이다.

 

요청받을 때 베푸는 것, 그것은 좋은 일이다. 허나 요청받지 않을 때에도 다만 이해함으로써 베푸는 것, 그것은 더욱 좋은 일. 그러므로 마음 넓은 이에겐 받을 이를 찾음이 베풂보다도 더 큰 기쁨인 것을.

 

그런데 지금 그대들 움켜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대들 가진 것은 모두 언젠가는 주어야 하는 것을. 그러므로 지금 주라. 베풂의 때가 그대들 뒷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대들 것이 되게 하라.

 

그대들은 가끔 말한다. '나는 베풀리라, 그러나 오직 보답 있을 것에만 베풀리라.' 하지만 과수원의 나무들, 목장의 양떼들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살기 위해 베푼다. 서로 나누지 않고 움켜쥐는 것이야말로 멸망하는 길이기에.


실로 낮과 밤을 맞이해도 좋을 이라면 그대들로부터 다른 모든 것을 받기에 부족하지 않은 이들이다. 삶의 바다를 마셔도 좋을 이라면 그대들의 작은 시냇물로 그의 잔을 채워도 괜찮을 이들이다. 받을 줄 아는 저 용기와 확신, 아니 받아 주는 저 자비심보다 더 큰 보답이 어디 또 있을 것인가?

 

그런데 그대들은 어떤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가슴을 찢게 하고, 자존심을 벌거벗게 하며, 그리하여 형편없게 된 가치와 찢어진 자존심을 보는 그대들은.

 

무엇보다 먼저 그대들은 스스로 베풀 수 있는 자로서 베풀 수 있는 그릇에 마땅한가를 생각하라. 실로 삶을 주는 자는 삶, 그것뿐이다. 다만 그대들, 스스로 시혜자라고 생각하는 그대들은 그 증인에 불과할 뿐.


그리고 그대들 받는 이들이여,

물론 그대들은 모두 받는 이들이지만,

얼마나 감사해야 할까에 대해 생각지 말라.

 

그것이야말로 그대들 자신에게도,

베푸는 이에게도 멍에를 씌우는 일.

그보다 그이와 함께

날개이듯 그의 선물을 타고 오르라.

 

지나치게 그대들의 빚을 걱정함은 그의 자비를 의심하는 것이 될뿐. 넓은 마음의 대지 大地를 어머니로, 신을 아버지로 한 그의 자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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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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