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감성. 그 놈의 감성이 뭐길래.

글 입력 2020.06.0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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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결벽증에 걸리기라도 한 듯이 서로를 어떻게든 분류하고 정리하려고 안달이 난 것만 같다. 인종으로 나누고, 국적으로 나누고, 피부색으로도 나누고, 혈액형으로도 나눠 비슷한 맥락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다. 이처럼 과학적인 연구 또는 생물학적인 목적에 의해 객관적인 기준을 만들고 그에 따르는 일도 있으나 흔히 하는 말 중에 이성적인 사람과 감성적인 사람 같은 분류법에서 객관성이라고는 알람을 듣지 못해 늦은 아침에 찾아 헤매는 양말처럼 찾아도 찾아도 보이지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저 사람은 이성적이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감성적일 수도 있다.

 



이성에 대하여



이성적인 사람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당연히 그 이성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발생한다. 이 이성이라는 개념이 아주 오래전부터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열정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굳이 그랬어야 했나 싶을 정도로 말다툼을 벌여 온 탓에 관련된 지식이 너무나도 많은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이해하기 더 힘들어졌다. 학창 시절에 수학 시간이나 과학 시간이 올 때마다 이런 걸 왜 알아내서 나를 힘들게 하는 거겠느냐는 생각을 곧잘 하곤 했다. 이들처럼 인류의 발전에는 지대한 공헌을 한 늘어놓으면 끝도 없이 나올 인간에 관한 탐구를 이어 온 학자들은 내 두통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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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Giammarco Boscaro on Unsplash

 


간단하게 정리를 해 보자면 이 이성이라는 개념은 절대적인 진리인 로고스와 칸트가 주장하는 사물을 왜곡 없이 받아들이고 본능에 휘둘리지 않으며 자신의 도덕적 법칙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는 이론이성 및 실천이성이 있다. ‘내가 진짜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라는 상투적인 어두로 말문을 여는 사람을 보면 ‘그럼 하지 마. 왜 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최대한 쉽게 정리해 보려 노력했으나 읽는 처지에서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손가락을 놀려 최대한의 언어적 발악을 해 보자면 잘못된 정보를 걸러내고 감정에 휘둘려서 판단을 흐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은 이성이며 이러한 행동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을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성적인 사람은 보통의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계산적인 사람 또는 냉철한 사람과 종종 연결된다. 나는 학기 중에 가계부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는 편이었는데 내가 가진 재산을 교통비, 식비, 핸드폰 요금, 그 외 여윳돈 및 기타 비상용으로 구분하여 예산을 마련한 뒤에 돈을 쓰는 편이었다. 재무제표를 작성하는 살아있는 기업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내 재산을 보면 이 기업은 상장조차 불가능한 수준이다. 도산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덕분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경제적인 사람이나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냉철한 사람이라는 평을 종종 받고는 했는데 아마 그 속뜻은 앞서 말했던 이성적인 사람에 가까웠으리라 생각한다.


주변으로부터 이런 평을 받았지만 이성적인 사람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쉬이 동의할 수가 없다. 인간에게 이성이라는 것은 완벽하게 구현할 수 없는 프로그램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인간은 동물로 태어나 생존을 위한 수단을 찾아 헤매다 사회를 구성했고 현재까지 살아남아 그 속에서 자신들만의 규율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물 중의 하나가 이 ‘이성’이라는 개념이다. 풀어보자면 자기들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에 지나지 않는다.


이성의 바탕이 되는 ‘합리적’이라는 요소부터 이성적이지 못 하다. 이 합리라는 기준에 적합한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주체는 어떤 사건이나 행위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단 한 가지 사항에만 초점을 둔다. 내가 봤을 때 그럴 만했는가 아닌가. 결국 입맛에 맞추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조금 더 쉬운 예시를 들어보자면 예산을 짤 정도로 계산적으로 사는 나도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다 느껴질 때는 기분이나 달래자며 치킨을 시킨다. 요즘 치킨값이면 며칠 분의 왕복 교통비인지 계산이 되리라. 교통비 할인을 찾아 그렇게 체크카드 혜택을 뒤적거리면서 치킨은 그냥 질러버린다. 결국 세상에 이성적인 사람은 없다. 그저 덜 감성적인 사람이 있을 뿐이다.

 



감성에 대하여



학자들은 감성을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한 반응이나 욕구 또는 본능으로 정의한다. 감성적인 사람이나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에 속하는 경우를 보자면 영화나 드라마의 슬픈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느끼는 감정에 대한 풍부한 공감을 표출한다. 분명 이들도 감성적인 사람에 해당하지만 사람보다는 감정이 풍부한 사람으로 분류하고 싶다. 감성이라는 요소가 워낙에 까다롭다 보니 여기저기 붙이기 나름이라 이런 사람들에게 붙이기에는 지금 이곳에서 풀어낼 감성의 정의는 적절치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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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Mink Mingle on Unsplash

 


감성에는 또 다른 모습이 존재한다. 인스타 감성이나 감성적인 사진, 감성 있는 장소 따위에 붙는 감성은 위에서 말 한 감성과는 확실하게 다르다. 아마 분위기라는 것과 비슷한 요소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인스타그램 해시태그로 감성을 검색하고 게시글들을 보면 ‘아, 그래. 이게 감성이지’라며 공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며 나도 그들 중 하나이지만 우리에게는 문제점이 한 가지 있다. ‘그래서 그놈의 감성이 도대체 뭔데?’라는 질문에 답변을 내놓으려고 할 때마다 설단 현상을 겪는다는 점이다. 분명 공감하고 느끼고 알고 있지만 제대로 된 설명이 불가능하다. 애초에 답이 존재하는지도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답을 찾을 수 없다면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나만의 답이다.


감성은 ‘말로는 표현이 어려운 어떤 느낌이나 감정을 불러오는 분위기’ 정도가 아닐까 싶다. 굉장히 전문적이고 분명 그게 맞겠지만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교수님들의 강의를 듣는 기분이 들겠지만 이 이상의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가 없다. 핑계 같겠지만 딱 떨어지는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게 감성의 매력이다. 모든 것을 수치화하고 정리하며 살아가는 데이터 공화국의 시대에 짓눌려 숨이 막힐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이렇게나마 숨구멍을 틀 수 있기에 우리는 감성을 그렇게 갈구하는지도 모른다.


햇볕이 따스한 날 카페 창가에 앉아 태블릿이나 노트북을 꺼내고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키고 과제를 하는 대학생. 바람이 선선한 저녁에 재즈를 틀어놓고 은은한 조명 아래서 한 잔의 위스키를 즐기는 퇴근 후의 직장인.


이 두 문장으로 묘사하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지는 풍경은 감성적이다 또는 분위기 있다 외에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없다. 잘 모르겠지만 감성적인 것은 분명하다. 설명도 어렵고 눈에 딱 들어오게 보여주기도 힘들지만 감성은 분명 존재하며 일본에는 감성에 관해 연구하는 감성 디자인 연구소까지 있다. 이들이 연구하는 것은 감성적인 디자인이며 그들이 추구하는 ‘감성적인 디자인’이란 어떠한 향수나 분위기를 불러오는 디자인이다. 도심 한복판의 카페에 이제는 보기도 힘든 엘피판 플레이어를 놓아두는 것은 현대라는 시간적 개념을 잊어버리지 않으면서도 지금의 노년층이 젊은 시절에 음악을 듣던 모습을 떠올리며 향수를 불러온다. 테이블 야자를 투박한 주황색 화분에 담아 방에 두는 것과 라탄 바구니에 담아서 방에 두는 것은 화분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디자인에서 오는 이 감성이라는 것이 달라진다.

 



감성충; 감성에 충실하다



감성이 유행하면서 부정적인 키워드들도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벌레를 뜻하는 한자 충을 어미에 붙여 감성충, 인스타충 따위의 단어를 들먹이며 반감을 표하는 시류도 어느 한쪽에서는 흘러들어온다. 벌레 자체가 외관상 그다지 유쾌한 모습은 아니다 보니 주로 특정 대상이나 현상을 비하할 때 많이 쓰인다. 인스타충이나 감성충으로 불리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때와 장소, 그리고 정도를 생각하지 못하고 오로지 감성에만 충실해지려는 모습을 보이는 데 이렇듯 눈치 없이 굴면 욕을 먹더라도 할 말이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벌레가 보는 것처럼 부정적인 대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농작물의 해충들을 잡아먹는 것도 벌레고 식물의 번식에 도움을 주는 것도 벌레다. 요점은 언제 어디서 어떤 벌레가 될지를 잘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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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Toa Heftiba on Unsplash

 


애인과 오랜만의 데이트 약속을 피시방에서 게임이나 하며 보내기라도 하는 날에는 내일의 나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업무에 찌들고 사람들에 치이던 평일을 견뎌내고 간신히 손에 쥔 주말 휴일에 방구석에 앉아 핸드폰으로 유튜브만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다시 출근을 해야 하는 월요일이 찾아온다면 주말의 나를 다시 데려와 눈앞에 세워두고 등을 시원하게 한 대 때려주고 싶을지도 모른다. 때와 상황을 가리지 못하고 감성만 찾아대는 부류가 감성충이라면 이런 부류는 감성 해충이다. 감성이란 감성은 있는 대로 갉아먹어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조금 더 풍부하게 살아가지 못하게끔 만든다. 결국 감성 해충과 감성충을 골고루 풀러놓고 자연스럽게 먹이 사슬이 만들어지도록 노력을 해 줘야만 한다.


감성이 식물이라면 그 감성이 심어진 나 또는 당신은 흙이자 그 감성이 뿌리를 내릴 화분이다. 적절한 양분과 물, 그리고 해충 제거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얼마 못 가 시들거나 죽어버릴 게 분명하다. 플랜테리어에 한창 빠져 있을 당시에 뭣도 모르고 덜컥 식물부터 사서 방에 들인 적이 있었다. 식물 이름도 몰랐고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도 몰랐으니 얼마 못 가 죽어버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줄기가 썩어가면서 시큼한 냄새가 풍기는 화분을 보자니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지고 불쾌함이 덮쳐왔기에 당장 내다 버렸다. 감성이 죽어버린 우리를 보는 누군가도 내가 죽어있던 식물을 보던 표정을 지을지도 모른다.


양분과 물, 해충 제거 작업이 될 것들은 감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그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감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식물의 종을 알아야 올바르게 키울 방법을 배울 수 있듯이 나에게 가장 잘 맞는 감성을 찾아내야지만 그 감성을 채울 수 있는 일들을 할 수 있다. 집에서 한 잔의 커피를 내리며 재즈를 듣는 게 나에게는 감성을 채우는 일 일지도 모르나 다른 누군가에게는 손안의 맷돌을 돌리며 고리타분하게 차나 즐기는 노인처럼 보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의 답은 노력이다. 재즈도 들어보고 힙합도 들어보고 어떨 때는 방에서 조용히 게임만 온종일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 모든 일은 나의 감성을 찾아가는 노력이며 누가 뭐라든 나의 감성을 채울 수 있는 일이면 된다. 결국 커피가 갈리는 소리보다 우두둑 거리는 관절의 마찰음이 더 크게 들리지만 않는다면 마음속의 감성은 착실하게 자라 꽃을 피우리라 본다.

 


[김상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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