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시간의 강을 타고 흐르는 공작의 춤사위 - 프랑스 로맨틱 음악의 향연 [공연]

문외한의 클래식 감상기
글 입력 2020.06.03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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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기회가 왔다. 클래식 향유 기회이다. 사실 고백하자면, 쇼팽 몇 곡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몇 정도만을 애호하는 나로선 떳떳이 클래식을 애호하노라 말하기는 조금 부끄러운 감이 있지만, 어땠든 기다려온 바임은 사실이다.

 

이 고백을 하자니 또 다른 부끄러운 이야기가 하나 떠오른다. 기억력이 원체 좋지 않은 나는 여태, 음악을 듣곤 그 제목을 까먹는 일이 참 많았더랬다. 비단 클래식이 아니더라도 친구와의 일상 속에서 어떤 노래를 떠올리고 싶을 때는, `아, 그거 뭐였지?` 하고 음부터 흥얼거리기 일쑤였다는 말이다.


클래식은 곡의 구조가 다변하고, 곡 길이가 길며, 대개가 곡의 특성을 상징하고 특정하는 별칭이 아닌, OP 넘버로 되어 있었던 때문인지 클래식에 있어 유독 더 그러했다는 사실은, 그러므로 딱히 내게 놀라울 일도 아니다. 조금 부끄러울 일이라면 일일 것이다.

 

공연 시간을 착각해 조금 일찍 도착했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이 있는 음악당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고, 그 생각은 또 이런저런 글로 화한다. 차분히 기다리고자 애쓰며 곧 있을 시간들을 미리 그리어보았다. 드문 기회이니만큼, 할 수 있는 한으로 흠뻑 젖곤, 그에서 얻은 것들을 쥐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아름답게 표현해내기를. 그런 심산으로 타자를 잡고, 곧 있을 공연을 기다린다. 프로그램에 소개된 곡을 플레이리스트에 올린 것은 물론이다.

 

그러자, 하나 곤란한 생각이 먼저 내게 다가왔다. 음악은, 무슨 수로 표현해낼 수 있을까 하는. 사실 그렇게 따지자면 전 예술 영역에 똑같이 적용될 문제의식이겠으나, 그것은 예술이 인간의 깊은 영역을 소재로 하기 때문일 것이라 나는 믿고 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내가 음악을 두고 글을 써낸 적이 한 번 없기에 더욱 그렇다. 음악으로 나는 어떻게 하나의 글을 써낼 수 있으려나.

 

다른 글을 두고 내가 얻은 바 영감을 글로 화할 적을, 그러므로 다시금 떠올려 본다. 내 매주 해온 그 일을 3의 시선으로 그려내, 그 일련을 따라보는 것이다. 아아. 나는 그 글을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단 하나의 분명한 직감이 비로소 설 때 글로 나서곤 했었구나. 음악에 대하여 방금 재빠른 걱정을 가졌던 까닭은, 물론 내가 그것이 처음인 이유가 가장 강렬했겠지만, 다시 돌려볼 수 없는 까닭이겠다.

 

항상 가지는 바 영감은 느리게 선다. 최초의 경험은 무언가 짜릿한 감각에 더불어, 아주 아주 옅고도 희미해 아무런 노력으로도 분명히 만들어낼 수 없는, 얼굴 없는 생각을 배태한다. 아직은 태어나지 않은 까닭이다. 그렇담 나는, 그것이 분명한 얼굴을 가질 때까지 인내하며 바라보고, 집중하여야 한다. 음악에 대해서도 나는 그럴 수가 있을까.

 

이제 다시 생각해보니, 글이나 미술을 두고 글을 쓸 땐, 오래 두고 바라볼 수가 있었던 것이구나. 오래 보아 사랑스러운 너와 드디어 사랑스러운 너를 향한 나의 찬가, 이것이 곧 글이 되는 일련의 일이었겠다. 그러고 보면 음악과 같이, 이런 `동시간성`을 지니는 예술이 하나 더 있다. 연극이다. 시간과 함께 등장해, 시간에 꽉 붙어 흐르곤 나를 떠나가, 희미한 기억 속에만이 어른거릴 수가 있던, 이러한 동시간성의 예술을 나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이 질문에 이르러 드디어, 글에 대한 조금 나아간 고민을 하나 지녀 보게 된다.

 

나는 아직, 클래식 음악에 대한 평론을 이해할 만큼 시야가 넓지 못하다. 그것은 우선 클래식에 대한 입문교육도 받지 않은 까닭이 하나일 것이고, 애초 그런 것들과 무관하니 있을, 감각과 상상의 집속 능력에 대한 부족이 또 하나일 것이다. 예술은 그 무엇이었건 표현이라고 하자. 색은 어떻게 특정 감정을 대변하거나 유도할 수 있는가. 또한, 음의 무리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나는 아직 결론을 잡을 수 없는 문제의식 하나를 두려움으로 지닌 채, 콘서트홀로 진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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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어두워지고, 연주자들은 차례로 입장해 곧 음을 고르기 시작한다. 같은 부문의 악기들끼리 정음 정박의 음을 화하니, 공명이 일어난다. 벌써부터 내겐 놀라운 체험이다.

 

곡의 첫 순은 가브리엘 포레의 `파반느`이다. 파반느는 16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유행한 느린 2박자의 궁정 무용곡 장르를 일컫는다고 한다. 그 명칭은 스페인어에서 공작을 뜻하는 `파본`에서 유래했다는 설명을 접했다. 미리 예습하고 온 덕에, 저 비유의 뜻을 곧잘 알 것도 같다.

 

`파반느` 하면 음악을 잘 모르는 나로서도 곧잘 떠오르는 곡이 하나 있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그것인데, 파반느라는 단어를 여기서 가장 먼저 접한 덕분일 것이다. 워낙 유명하기에 본의 아니게도 이따금 접하게 되는 이 곡, 그러나 이 노래가 무곡 舞曲일 줄은 미리 알지 못했다. 이렇게 느리고 우아한 음 위로 짓는 춤이라니, 절로 상상되지는 않을 탓이다.

 

그러나 그리 알고 다시 듣자니, 이 느린 선율의 위로 아주 우아한 몸짓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모습이 위의 어원, 공작의 그 모습에 착하니 달라붙는다.

 

 

 

 

곡은 현악들이 스타카토로 낮은 반주를 깔아주며, 주선율은 플루트의 독주로 시작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기에 영 스스로 자신이 없긴 하다.) 하나의 악기가 고고히 이 홀을 메워 아늑하게 퍼지는 음으로, 그러나 충분하게 다가온다.

 

한 마디를 플루트가 솔로로 연주하고, 바로 이은 마디에는 곧잘 관악기 군이 화음을 형성한다. 아주 슬며시, 그리고 곧잘 음악으로 빠져들어 집중하게 만든다. 현악의 소리가 꽉 알이 들어찬 농밀한 소리라면, 관악은 어딘가 비어 풍부히 울려오는 소리 같다. 첫 번째 레퍼토리를 마치며, 플루트 솔로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며 떨림음을 만든다. 직관을 하고 있자면 이렇듯, 관악이 이루는 잔 떨림의 미세함까지 곧잘 다가온다.

 

그렇게 첫 번째 레퍼토리를 마치면, 주선율에 바이올린이 참여한다. 여전히 한 마디를 바이올린들이, 이은 마디는 관악기 군이 받고 있다. 이은 마디에서 반주를 이루는 음이 아주 환상적이다. 대략 이런 기분을 일게 하는 음악을 두고, 서정적이라고들 하는 것이었을까.

 

이제 주선율에는 여러 악기들이 하나의 음을 이루고 있다. 뭇 사람들이 일제히 동음 동박의 음을 낼 때 일어나는 공명 현상, 클래식 콘서트를 직관하는 것에는 이런 즐거움이 있는 것이구나. 이 공명은 분명 스피커 너머에 까진 닿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막 일제히 떨리는 음, 연주자들의 팔 움직임을 눈여겨보게 된다. 바이올린 현 위에 얹은 채 흔들리는 손가락의 박자들이 과연 일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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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은 짧았다. 7~8분 남짓. 나는 여기서 어떤 `감정`을 얻었을까. 얕은 수준의 감정만이, 즉 충분한 서사와 묘사가 없는, 덩그런 감정 하나만을 지금 떠올릴 수가 있다. 그것은 고요함이고, 장중함이며, 우아함이다.

 

나는 아쉬워, 이를 두고 그림을 한 번 그리어본다. 즉, 이 개개 낱말의 수식어가 모두 담기는 곳, 나아가 채 규명해내지 못한 제 감정들마저 착하니 감길 곳인, 하나의 화폭을 짜내려 노력해본다. 노력해본다만, 스케치를 그리기도 전에 다음 곡이 시작됐다.

 

**

 

다음 곡이 재빠르게 시작된다. 이은 곡은 생상스의 `피아노 콘체르토 No.5` 일명 Egyptian이다. 이 곡은 솔직히, 예습이 부족했다. 앞선 곡과 달리 콘체르토는 길고, 여러 악장으로 구조되어 있기에 기억 안에 충분히 잘 갈무리해두질 못했다. 관악이 음을 고르고, 건반이 가볍게 멜로디를 두드리며 출발한다. 아주 산뜻한 시작, 장차 여행하는 이가 막 배에 오를 때의 마음가짐 같다. 

 

 


 

 

피아노 콘체르토, 피아노 협주곡. 누군가 한 말이 기억난다. 피아노 협주곡은 `다 대 일`의 싸움같이 보인다고. 치열하게 대결하는 선율들이, 그런 와중에 모종 화합을 찾는 일이랬던가. 이 곡에서는 그렇게 말할 정도로 치열한 싸움이 보이진 않는다. 곡 선율은 유려하고 부드럽다. 다만, 당연히도 각각의 선율은 서로에게 묻히지 아니한 채로 동시에 다가온다. 그렇게 동시에 내게 닿고, 이 안 어딘가에서 둘은 시나브로 감긴다.

 

건반 연주자의 손가락이 충분히 보이는 이곳에 감사한다. 멀게나마 그의 손가락이 보드라이 흐느적거리는 것을 본다. 그의 어깨는 잔뜩 긴장하여 포인트에서마다 온몸이 튀어 오르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손가락은 놀랍게 유연하다. 유튜브로 독학한 것을 실제로 보고 있자니, 그런 때마다 건반 음의 디테일이 눈으로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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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Egyptian이란 부제를 붙들어 상상의 배경을 한정, 구체화한 뒤 음악을 따라가려 애쓰고 있건만, 이집트 하면 사막과 모래와 피라미드뿐이 모르는 나로선 그림이 잘 아니 짜인다. 그러나 이 선율은 결코 사막과 모래와 바람을 형상화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곡을 ‘이집트의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일까.

 

이집트와 사막을 이어붙이는 일이란 얼마나 고루한 관념일까 싶으면서도, 일단 떠오르는 것이 그뿐이라, 음악이 마련해둔 관념의 막 위에다가 모래와 사내를 배치해본다. 그러나 역시 당치도 않다. 이것은 사막의 느낌이 아니다. 그런 의아함으로, 내 막을 다시 뜯어고치려고 골몰하는 와중에 곡이 미처 마친다. 하나의 그럴듯한 장면과 서사도 만들어내지 못하다니, 감상 실패다.

 

이 음의 맥락 위에 능히 소환해낼, 아무런 서사를 내가 갖고 있지 않다는 게 지극히 아쉽다. 차라리 예습이라도 좀 더 열심히 해둘 것을 그랬다. 나는 불현듯, 차라리 아예 새로운 종류의 숲 속, 알지 못하는 바람을 느끼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이 알 듯 말 듯한 바람의 색이 무언지 나는 붙잡으련마는, 자꾸만 음은 흐르고 그림도 흘러 흐려, 허둥대고는 만다.

 

**

 

인터미션이다. 15분간의 쉬는 시간이 주어졌으니, 나는 급하게 책자를 편다. 직전의 `Egyptian`에서 참패와 낭패를 느낀 까닭이다. 곡을 따라가기 위해선, 정말로 정말로 최소한의 예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방금 절실히 경험한 덕분이다.

 

입장 때에 나눠준 책자에는 곡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배경, 그를 통한 `감상의 유도등`이 제시되어 있다. 예컨대 방금 곡의 경우, 역시 사막이 아닌 바다와 강이 주 무대였고, 즉 선율의 진행상은 대개 항해를 조망하고 있었다. 즉, 나는 완전히 잘못 짚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그 안에서 스스로 바다의 이미지를 추출할 수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여태 향유해온 것들, 글이나 회화와는 달리, 음으로 가득하고 오직 음만이 존재하는 이곳에서는 상상이 나아가기 위해 정말 등대가 필요한 것이었구나. 모든 예술에는 주제인 제목이 있다지만, 그 외에 어떤 유도도 없는 음악에서는 그것만으론 길 잃기가 십상이겠다.

 

프로그램의 마지막 구성은 다시 포레의 곡. `Requiem`, 진혼곡이다.

 

무대가 더욱 꽉 찬다. 합창단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여기선 선율은 배면으로 물러나 웅장한 배경을 형성하고, 목소리가 주선율을 이루는듯하다. 앞선 무대들에선 뭇 악기의 하나 됨에 놀라더니, 이번엔 또 목소리에서 놀란다. 외려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소리를 조율해 조화시키되, 여전히 모두 다른 목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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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모든 이들의 얼굴을 동시에 바라보며 전부 파악하고 느낄 수가 없듯이, 모든 소리들은 제 얼굴을 가진 채 흐드러지고 흔들리며 내게 온다. 규명할 수 없는 집체가 되어 있다. `아름답다` 너머, 그 이상의 단어를 우리가 갖지 못했다는 사실이 상기되며, 괜히 안타까워진다.

 

이번의 곡은 책자에 가사가 마련되어 있어 더욱 따라가기가 수월하다. 죽은 영혼을 애처로이 여겨, 살아있는 뭇 인간들이 그 영혼의 구원을 신께 바라는 목소리들. 대주제는 대략 이와 같다 하겠다.

 

 


 

 

곡 시작과 함께 나긋하게 출발하며 짙게 깔리던 음성들은 얼마 안 가 곧, 삽시간에 일제히 터져 나온다. 시작부터 한 템포 압도하고 들어간다. 순간 나는 내 안에서조차 언어를 잃었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나긋이 기도를 되뇌던 목소리들은 일제히 성화와 같이 터져 나왔다. 연옥의 불 구덩이 속에서 망자들이 부르짖는 고통에 찬 비명들과 대조되는 그림. 저기 뭇 합창단의 하늘로 살짝 젖힌 고개 너머로 흰 빛이 쏘아나오는 듯한 그림이 그려진다. 자비를 갈구하는, 절규 같은 기도.

 

이내 절규는 그쳐 고요가 찾고 2절이 시작된다. 포레의 이 레퀴엠은 총 7절로 이루어져 있다. 2절을 듣고 있자니, 방금의 1절은 참 강렬한 시작을 알리었구나 싶다. 2절은 내내 조용하고 서정적으로 흘러간다. 어딘가 멀리서 아른거리듯, 시원하고 서늘한 흐름을 이루는 듯 이어지다간, 이내 남성 바리톤의 독창. 홀로 내는 소리이지만 소리는 더욱 밀도 있다. 절절하진 않지만, 가득 찬 이 소리는 담백하고 경건한 어느 신도의 기도하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바리톤의 독창 부가 끝나고 `윤창`(돌림노래)으로 합창이 재개된다. 남성부가 시작한 마디를 여성부가 뒤이어 받으며 음악에는 입체감이 형성되고, 그렇게 통일되지 않은 소리들이 퍼져 나와 너른 홀을 부딪고 돌아오니 소리는 종소리같이 울리며 화한다.

 

곡은 이렇듯 고요함과 격정적으로 몰아치는 클라이맥스가 계속 번갈아가며 흐른다. 죽은 자의 구원됨을 진실로 위하는 마음들이, 이 많은 입을 통해 구현되곤 물결처럼 흘러내린다. 소리는 저 많은 입으로부터 안개처럼 흘러내리다간, 온통 진동의 파형으로 가득 차 공간을 전율케 하는 이미지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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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와 구원의 기도와 전율과 경배, 그리곤 안식으로…… 심판의 날의 지엄함과 그 앞 공포로 전율하며 작아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고, 이제 잇따르는 구원의 기도에는 절로 전율과 경배가 실리어 있다. 충분한 전율과 기도, 즉 참회를 건너온 다음 마지막의 7절은 안식의 장이다.

 

마지막 절, 음은 맑고 밝으며 영롱하니 반짝이고, 산뜻하니 퉁긴다. 그렇게 점차 천천히, 점차 조용히, 평화롭게 멎어가며 구원의 순간의 평화로움을 그리곤 종착으로 다가선다. 이윽고 마지막, `Re-qui-em`하며 슬며시 흩어진다.

 

*

 

곡이 긴 꼬리를 내며 이어지다 완전히 마치니, 우레와 같은 박수가 끊이질 않는다. 인사와 박수가 계속되는 와중에, 나는 급히 노트를 붙잡아 마구 휘갈기고 있다. 현장감이 흩어지기 전에 대략으로나마 남겨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박수가 멎는 때 즈음까지 급한 마음으로 펜을 움직였다. 이제 연주자들은 삽시간으로 흩어지고, 무대의 조명은 암전. 관객들도 우르르 몰리어 나간다. 나는 조금 더 머물며, 스태프만 남은 객석을 망설였다. 아직 어른거리기만 하고, 붙잡지 못한 무언가가 남은 듯해서 말이다.

 

그럼에도 결국, 전부 다 적어내진 못했다. 못마땅해야 할 부족함일까. 사실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 싶다. 시간의 축을 붙잡고 뻗어 나간, 돌아오지 않을 음의 예술. 음악은 단 한 번의 향유만으로 전부 갈무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닐 테니 말이다. 이 못내 섭섭함은, 장차 더 많은 향유의 경험으로 이어지면 그로써 만족할 만한 일일 테다.

 

함신익 지휘자와 심포니 ‘SONG’, 국립합창단에게 진한 감사를 표한다. 내 첫 클래식 콘서트를 너무도 아름답게 장식해준 덕분이다. 저 모든 사람들이 이 2시간의 조화를 위해 보낸 시간이 어떠했을지 조금도 감이 오지 않지만, 어땠든 내겐 너무 대단한 시간이었다. 그들을 위한 마땅한 찬사가, 내게서 나오지 못하였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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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헤드폰과 스피커를 통해서만 듣던 클래식 음악들, 직관으로 드디어 접하니 왜 여태껏 클래식 콘서트가 만석이었는지를 알겠다. 나는 드디어 체험한 것이다. 이 현장성만이 가지는 전율을. 그것은 공명이 아니었을까. 또한, 놀라움이 아니었을까.


제각기로 외따로 떨어진 인간들을 하나로 만들어낸 일에 대하여, 우리가 가지는 자연스런 놀라움. 또한, 그런 때에야 비로소 발하는 동음 동박의 공명과 피부에 와닿는 전율의 감각이란…... 느리고 우아한 서정의 선율이, 달콤하게 피부로 스민다.

 

콘서트홀을 나서곤 우리는 삽시간에 흩어 나왔다. 나는 늘 그랬던 대로 헤드셋부터 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니 공연에 앞서 듣고 있던 파반느가 이어서 흘러나온다. 그리곤 아직 간직하고 있는, 현장의 감동과 이제 깊이 비교가 된다.

 

아마 내일부터 잊히기 시작할 감동. 아쉬울 바에는 다음의 공연을 기다리고, 또 준비하고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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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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