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일상 속에서 예술을 거니는 방법 - 예술과 나날의 마음

글 입력 2020.05.06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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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광훈 교수의 책을 처음 읽은 건 작년 11월이었다. 미술사 독서모임에서 선정된 책은 저자의 또 다른 미학에세이 《미학수업》이었고, 그 책은 아주 강렬했다. 예술은 일상의 연장선이며 나와 다른 세계와 이야기를 보여주어 감각과 사유의 세계를 넓히는 일이라는 책의 근본적인 예술관은 정확하게 나와 일치했다.


한창 미술과 미학 책에 심취해 있었을 때 나는 예술이야말로 사유의 항해를 떠나게 해주는 매개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인문학의 역할과도 상통했다. 우리들은 '사람'이라는 지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겪어보지 않았음에도 '다름'을 인정해야하고,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게 인문학이었고 그건 나의 이상과도 일치했다. 여기에 예술은 단순히 학문을 넘어서 시각을 비롯한 오감을 자극하면서 더 생생한 '다름의 자극'을 주었기에, 나는 더 더욱 예술을 좋아했던 것 같다.

 

《미학수업》은 위에서 말한 것들을 다양한 작품들과 함께 엮어놓은 책이었다. 미학 수업의 교과서처럼,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눈을 사로잡는 문장들이 있었고, 각 챕터마다 예술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예술적 경험과 심미적인 체험에 대해 수려한 저자의 생각들이 쏟아져나왔다. 단순히 읽는다기 보다 거의 공부하듯 열성적으로 읽었던 책이었기에, 이번 《예술과 나날의 마음》 역시 '문광훈'이라는 이름 석 자만 보고 바로 읽고 싶어졌다.


전체적으로 《미학수업》에 비해서는 조금 가벼운 내용이었다. 물론 여기서 가볍다는 말은 전적으로 이전 책에 비해서라는 의미지, 책 자체가 가볍다는 뜻은 아니다. 각 챕터들의 주제가 비교적 정확하고 잘 분류되어 있던 점이 아무래도 독서 시간을 확 단축시켜줬다. 그리고 이전의 독서경험 덕에 저자의 예술관을 대략 알고 있었다는 점도 영향을 줬다. 여전히 미술 뿐만 아니라 활자와 자연, 일상 속 경험을 예술에 포함시켰고, 아름다움과 예술의 정의, 근원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키워드라면 일상과 우울, 숭고와 심미적 경험이다. 어떤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 단어들을 골랐다기보단 책을 읽고 나니 자연스레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일상'과 '우울'은 작품에 대한 느낌이고, '숭고'와 '심미적 경험'은 예술의 기능과 정의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반영한다.

 


 

일상이 주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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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메이르, <우유 항아리를 든 하녀>, 1658-60

 

 

페르메이르의 <우유 항아리를 든 하녀>는 빛이 주는 안온함, 따뜻함으로 가득 차 있다. 단순히 우유를 따르는 일상 속의 행동이지만, 창가에서 들어온 빛이 여인의 몸에 부서지는 형상은 새삼 경건하다. 이 그림에 대한 찬사야 워낙에 많지만, 나는 이 그림이 주는 따뜻한 느낌을 항상 좋아했다. 그저 평화로운 일상, 아무 일없이 조용하고 꾸준히 흘러가는 하루가 느껴진다.


무탈하고 조용히 흘러가는 하루에 대한 갈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심지어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삶에선 이 여유가 꽤나 절실하다. 페르메이르의 그림은 도시인에게 간절하게 필요한 여유를 고스란히 건네준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잔잔한 일상 브이로그를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비록 영상과 다른 정지된 이미지지만, 햇빛 아래서 우유를 따르는 행위가 주는 풍취가 오롯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따스한 일상에 대한 욕망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욕망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일상의 모습은 매일 반복된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런, 그래서 흔해빠진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이런 흔해 빠진 것들 덕분에 인간의 생애가 영위된다는 것이다.


p.100

 

 

사람들이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에 마음이 동하는 건, 그것이 우리의 삶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긴 인생에서 사실 특별한 순간들은 많지 않다. 회사를 가건, 학교를 가건, 어떤 사회적인 신분을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의 시간은 대부분은 큰 변화를 허락하지 않는다. 흔해 빠진 것들이다. 하지만 결국, 그 흔해 빠진 것들은 우리의 일상을 이루고 긴 시간을 이룬다. 자연히 흔해 빠진 것들은 흔해 빠졌기에 중요한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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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메이르 <열린 창가에서 편지 읽는 여인>, 1657년 경

 

 

페르메이르의 그림에서 빛은 이런 일상의 순간들에 의미를 더한다. 일상을 순간을 묘사한 그림 전체를 빛은 은은하게 감싼다. 빛에 감싸여진 일상 속 모습은 편안함과 따뜻함을 준다. 요즘은 일상에 대해, 특히 하루를 충실히 살아내는 일에 대해 온 노력을 들인다. 내 의지로 하루를 설계하고 어제와 오늘의 소소한 변화를 찾고, 다가올 내일을 새롭게 들여다볼 준비를 하기 위해서. 일상 글을 적기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겉보기에 크게 달라지지 않은 시간동안 내가 지나온 작은 변화들을 잡아두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페르메이르의 그림들이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느낌이다. 덕분에 이 그림들이 어떤 다름이나, 불편함을, 그래서 차이을 찾아나가는 확장의 경험을 주지는 않더라도, 충분히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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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댕, <물컵과 커피포트>, 1760

 

 

문득 이렇게 익숙한 존재를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그 대상을 찬찬히 다시 살필 수 있다. 관조하는 것이다. 매일 보는 하늘이, 매일 보는 출근길 풍경이, 매일 보는 주변 사람들을 새삼스럽게 '인식'하고 나면 이들은 다르게 보인다. 찬찬히, 자세히 살펴보면 더 다르게 보인다. 모든 것들은 매 순간마다 야금야금 달라지고 있다. 그 변화를 인정하고 나면 동일과 반복을 통해 이어지는 일상의 흐름을 조금은 더 즐겁게 감상할 수 있다. 변화는 아주 작은 단위로 계속 이어지기에 너무 과도하지 않은, 익숙한 범위 내에서 끊임없는 새로움을 찾아낼 수 있다.

 


사물은 이렇듯 우리 눈앞에, 아무런 말없이 그냥 있다. 그러면서 무엇인가 보여주고, 또 무엇을 기다린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몽상의 실현방식이다.


p.119


 

모든 것은 각자의 속도에 따라 변해간다. 매번 똑같은 듯한 일상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세하게 변해간다. 그 익숙함 속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일, 사물이 보여주는 풍경의 달라짐을 바라보는 일, 작은 변화를 통해 시선을 달리하는 일. 그 모두가 예술을 거니는 한 가지 방법이 된다.

 

 

 

우울을 마주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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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 <밤 올빼미>, 1942

 

 

일상의 안온함과 작은 변화를 즐길 수 있다고 해서 모두가 행복한 것은 아니다. 사람의 근원적인 감정 중 일부는 부정적이다. 외로움과 우울, 두려움과 불안, 걱정과 분노 같은 것들은 우리의 인생에서 사라지지 않는 감정들이다. 일상의 행복 속에 가려질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 한번씩은 이런 종류의 감정이 우리를 찾아온다. 호퍼의 그림에서 보이는 4명의 사람들 역시 그런 종류의 감정을 안고 있다.


조용히 가라앉은 도시의 밤에 혼자 환하게 밝혀진 가게, 그 속에서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사람들, 이들을 비추는 색은 화려하고 밝지만 어딘가 초라하다. 밝은 색은 오히려 더욱 강한 그늘을 만들기도 하기에 이들 간의 단절은 밝은 색채 아래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우울이, 외로움이, 비슷한 부류의 감정이 공격적으로 솟아오를 때면, 사실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그저 그 감정을 묵묵히 받아내거나 시선을 돌리는 일 뿐이다. 하지만 극한의 상황에선 시선을 돌려도 소용없다. 어떤 것도 방해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밀려올 때면 눈을 꼭 감고 그 파도가 지나가길 기다릴 뿐이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분명 모여 있지만 각자 존재한다. 이들 각각의 인물들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저 순간 저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감정의 파도를 견디고 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들은 각자 분리되어 고독을 마주하고 있지만, 모두가 고독을 마주하고 있기에 묘하게 위로를 받는다. 나만 이런 일을 겪는 것이 아니라는 얄팍한 안도감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이가 있다는 동질감은 무거운 감정의 무게를 덜어준다. 만약 이 그림을 보고 묘하게 안심이 된다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독과 우울의 순간을 마주한다'는, 이 그림이 주는 당연한 메세지에 위로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보편적 감정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사랑이나 박애, 동정이나 연민 같은 것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고독이다. 삶에서 중요한 계기는 거의 예외없이 홀로인 채로 일어난다.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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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의 시 <우울> 일부

 

 

책 속에 소개된 보들레르의 시 <우울>은 우울감이 사람을 좀먹어가는 과정을 독특하게 비유했다. "우울한 무관심"이라고 표현된 권태는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도피성 마음 가짐에 의해 발현된다. 눈을 가리고 아웅하는 격, 덮어 놓고 쓰는 격이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해야할 때, 그 순간을 끊임없이 미루고 싶은 마음이 들때, 권태는 고개를 든다. 지극히 현 상황에 안주하는 척 생각을 접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사태를 방치하면 상황은 겉잡을 수 없이 빠르게 망가진다. 권태가 "불멸의 크기"까지 커지게 되면 불안함만을 안은 채 게을러지고, 두려워하면서도 어떤 일도 시도하지 않게 된다. 결국은 모두에게 잊혀서 오로지 석양 속에서만 남들 눈을 피해 붉은 노래를 토하는 "늙은 스핑크스"가 되버리는 것이다.

 

보들레르의 시 역시 호퍼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우울을 마주하는 일이 혼자만의 일이 아님을 알려준다. 나 역시 이런 감정을 겪었다고, 그러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만 유별나게 그런 감정을 겪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마음을 뒤흔드는 부정적인 감정들은 오롯이 혼자 견뎌야하는 감정이지만, 그 감정을 겪는 유일한 사람은 아니라는 연결고리- 인류의 보편성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우울이 드러난 두 작품의 예술은 공감의 예술이 된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고, 나와 다르지만 나와 같은 다른 이들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위로를 받는다.


 

 

숭고, 보다 극적인 사유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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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 <작은 새 둥지>, 1873-74

 

 

아름다움과 예술에 대한 정의, 이들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탐구는 책에서 다뤄지는 주요 부분 중 하나다. 그 중에서도 미(美)의 근거에 대하여 이야기를 서술한 부분과 칸트의 숭고 개념은 새롭고 인상적이었다. 미학의 가장 근본적인 논제인 '아름다움의 정의'에 대해 가장 많이 던져지는 화두는 미와 추의 개념이다. 흔히 미는 아름답고 긍정적인 것, 추는 부정적이고 불편한 것 (혹은 불쾌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 두 가지 미추의 개념이 공존할 수 있으며, '아름다움'이라는 정의에 추라는 항목이 포함되는지 등에 대한 물음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나는 단순한 감각적인 단계에선 '미'만이 아름다운 것이며, '추'로 인해 발생한 불편함(혹은 불쾌감)이 사유의 단계로 이어져 다름을 경험하는 경우에 한해서 추 역시 아름다움의 범위에 들어선다고 생각했다. 현대미술의 그로테스크함을 사랑하는 나에겐 더도 없이 명확한 정의였는데, 이와 비슷한 맥락의 개념이 '칸트의 숭고' 개념이다. 물론 저자 역시 이 개념이 현대 이전의 미적 경험에서 나타나는 존재라 이야기했지만, 전문가가 아닌 일개 독자에게 추와 숭고는 감각적 혼란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숭고는 무엇보다도 “부정적 쾌감”이다. 그것은 단순히 매혹이라기보다는 “뒤흔듦”이고, 이런 뒤흔듦은 그저 “놀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함”을 불러일으킨다. …… 그러므로 숭고는 무제한적 부정성이고 탈경계적인 한계 경험이다.


p.215



거대한 자연에 압도 당할 때, 익숙하지 않은 자극에 감각적 혼란이 생길 때, 우리는 흔들린다. 흔들리는 감각은 인지의 한계를 불러일으킨다. 평소 내가 알던 것과 다른 모양, 다른 지식, 다른 세계를 마주하고 새로운 자극에 이성을 잔뜩 끌어올려 생각한다. 자신에게 펼쳐진 풍경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래서 숭고는 탈 경계적인 경험이고 불편함을 포함한 부정적 감각이다. 이 감각의 끝에서 다름을 체감하고 나면 새로운 시야를 가지게 되는데, 그제야 이 부정적 감각은 부정적 쾌감으로 변모된다.



‘심미적’ 요소에는 미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추와 악까지 포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의 경험’이라는 말도 쓸 수 있지만, ‘심미적 경험’이라는 말이더 포괄적이고 현대적 삶에 어울리는 술어인 것이다.


p.207



흔히 사람들은 '미적 경험'이라고 하면 아름다운 경험, 즉 긍정적인 경험을 떠올린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든 숭고의 개념을 통해, 또 현대미술에서 추구하는 불편하고 부정적인 쾌감을 통해 우리는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부정적인 것을 통해 긍정을 향해 나아가는 일은 현대 예술에서 중요한 주제고 결국 추와 악을 포함하는 '심미적'요소와 '심미적' 경험이 더더욱 지금과 어울리는 표현이 될 것이다.

 

 

 

나날이라는 현실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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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hungryjpeg, 출처 Unsplash

 

 

문광훈 교수는 책의 제목으로 쓰인 '나날'을 현실의 풍경이라 말했다. 하루 하루 흘러가는 우리의 시간이 한순간 한순간 풍경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술은 우리가 미처 눈으로 담지 못했던 풍경들을 선물처럼 보여준다. 매일 보기에 익숙함에 속아 아름다움을 잊어버리는 풍경과 시공간적 한계로 직접적으로는 절대 볼 수 없는 새로운 풍경을 모두.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읽어나가는 것은 사실 모두 예술적 행위다. 존재하는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유하는 일 자체가 새로운 생각의 확장이며 나의 세계를 넓히는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고의 폭을 넓혀가는 행위, 그 자체가 아름다움의 궁극적인 목표지점일 것이다.

 


그것은 모두, 조금씩 종류는 다른 채로, 하나의 풍경, 즉 내가 모르는 세상의 다른 풍경을 만나는 일이다. 그것은 ‘느낌의 풍경’이자 ‘생각의 풍경’을 경험하는 일이고, ‘나날이라는 현실의 풍경’을 체험하는 일이다.


p.7



나는 자주 다감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풍성하게 느끼고, 냉철하게 분석하는 일. 가슴의 따뜻함과 머리의 차가움이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가는 일이 좋다. 결국 새로운 나를 만나는 일, 감각하고 사유하는 일, 그게 사람으로서 내가 살아가고 싶은 가장 근본적인 원리다. 앞으로도 세상을 더욱 풍성하게 느끼면서 내가 아직 모르는 것들을 알아가길 바랄 뿐이다.



감각이 풍성함을 목표로 한다면, 사고는 논리를 목표로 한다. 우리는 최대한 다채롭게 느끼고, 가능한 한 면밀하게 생각해야 한다. 일상의 기쁨은 이러한 생활의 쇄신에 있다. 날마다 다르게 느끼고 새롭게 생각하는 기쁨보다 더 큰 즐거움은 별로 없다.


p.324



[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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